적암리~정수암지~853봉~정상~쌀난바위~적암리
아홉 굽이
병풍은
부드럽고도
강하다
글 노규엽 기자 \ 사진 양계탁 기자
구병산의 등산지도를 펼쳐놓으면 단번에 눈에 띄는 등산로가 동서로 길게 뻗은 능선길이다. 서쪽의 보은군 서원리에서 시작해 주능선을 따라 정상으로 향하는 이 길은 아홉 개의 병풍이라는 뜻을 지닌 구병산 산행을 위해 피할 수 없는 코스로 여겨진다. 더욱이 속리산까지 가지 못한다 해도 충북알프스라는 이름이 붙어있으니 더욱 구미가 당겼다. 내심 이 코스를 산행 코스로 잡고 보은군청에서 등산안내인을 소개받았다. 구병산 지리에 훤하다는 송자헌씨에게 종주의 뜻을 전하였더니 난색을 표했다. 길이 무척 험한데다가 눈이 한참 쌓여있을 시기라 산행을 하루에 마치기에는 무리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가장 즐겨 찾는 적암리 원점회귀 코스가 적당하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아쉬움에 입맛이 다셔지는 상황이지만 외지인으로서 현지인의 말을 따르는 것이 가장 안전한 산행이 아니겠나 싶어 그의 말을 따르기로 한다. 나중의 이야기지만 이 결정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나는 산행을 하면서 밝혀졌다.
위성지국으로 내려서는 하산길에 있는 철사다리. 양옆으로 암벽들이 늘어서 칼바람을 막아준다.
관리 상태가 아쉬운 보은의 명산
보은읍에서 25번 국도를 따라 상주 방면으로 향하다보면 서당골관광농원을 지나 도로 왼편에서 적암휴게소를 만날 수 있다. 이 휴게소를 끼고 왼쪽으로 들어서면 적암마을이 나오고, 그곳이 구병산 산행 기점이다. 마을 초입의 길이 갈라져있어 등산로 찾기가 애매한 듯 보이지만 아무 길이나 선택하여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다 보면 구병산 등산로 안내도를 마주치게 된다. 이 안내도를 정면으로 마주한 채 오른쪽의 길을 따라가면 이내 충북알프스 푯말이 보인다. 이후로도 잠시 마을길이 이어지는데 구병산포장마차를 지나면 마을의 느낌은 사라지고 산길로 접어든다.
오른편에 흐르는 성황당골을 따라 걷다보면 팔각정이 있고, 완만한 경사를 오르다보면 왼편으로 잠시 너덜지대가 나타난다. 이곳을 지나 이정표를 만나는데 왼쪽으로 오르는 길이 853봉으로 향하는 길이라 가르쳐준다. 지도상으로는 직진하면 신선대로 향할 수 있다고 하나 길이 험한 탓인지 등산로를 표시한 이정표는 없다. 송자헌씨의 안내에 따라 853봉으로 향하는 길은 눈이 꽤 쌓여있었지만 등산로가 제법 넓고 뚜렷해 길을 잃을 걱정은 없었다. 사면을 치고 올라가는 길이라 조금씩 경사가 높아지는 탓에 숨을 고르며 땅을 보고 가게 되지만 이 구간에서는 가끔씩 눈을 들어 정상 능선을 확인해야 한다. 능선의 일부이긴 하나 깎아지른 암벽의 봉우리들이 연이어진 모습이 눈에 들어오며 병풍처럼 둘러쳐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능선에 가까워지면 이 모습을 볼 수 없으니 구병산 명성에 걸맞는 모습을 보고 싶다면 놓쳐선 안 될 구간이다.
구병산 정상 능선이 나무에 가리고 나면 이내 정수암이라는 암자가 있었다는 절터에 이르게 된다. 먼저 조그만 옹달샘이 보이는데, 옹달샘 옆에 ‘정수암지 옹달샘의 전설’이라는 제목의 표지석이 세워져있다. 그에 따르면 정수암은 500여 년 전의 조선시대 때 존재했던 암자로 지금은 절터와 스님들이 사용했던 옹달샘만 남아있는 것이라 한다. 그 설명 뒤에 따르는 옹달샘의 전설이 기막히다. 옹달샘의 샘물이 너무 좋다보니 정수암에 머무는 스님들이 음용한 후 정력이 넘쳐 6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암자를 떠났다는 것이다. 이를 설명하는 표지석에도 ‘전설치고는 참으로 웃기는 전설’이라고 말하면서도, 이어 물 한 모금을 마시면 칠 일간 생명이 연장된다는 전설도 있어 주말마다 한 모금씩 마시면 불로장생을 하게 될 테니 ‘쉬고 떠나시는 등산객들이여! 다음 주에도 또 찾아주시구료’라고 귀엽게 끝을 맺는다. 하지만 정작 좋다는 샘물은 눈구덩이 속에 파묻힌 데다 보존 상태마저 허술해 샘물이 나와도 전설을 믿고 마시기에는 무리가 있다.
정체불명의 샘물은 그 자리에 놓아두고 위로 오르면 제법 넓고 평평한 공터가 나오면서 확실히 절터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등산안내인 송자헌씨도 절터 앞의 나무를 가리키며 “저 나무들이 감나무잖아요. 감나무가 있다는 건 이곳에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죠”라며 절터가 있었던 것이 사실임을 시사한다. 그와 동시에 벤치도 있으니 잠시 휴식을 취하기도 좋은 곳이다.정수암지에서 길이 갈리는데 구병산으로 바로 가는 왼쪽 길과 853봉으로 먼저 향하는 1시 방면의 길이 있다. 안내인에게 어디로 갈지를 묻자 망설임 없이 1시 방향으로 가자고 한다. 초행길이다 보니 이유를 물을 필요도 없이 묵묵히 뒤를 따른다. 853봉으로 향하는 길에 들자마자 급한 경사길이 시작된다. 이때부터 송자헌씨와의 산행 속도가 차이나기 시작했는데, 뭐가 그리도 급한지 그는 한마디 말도 없이 위를 향해 오르기만 했다. 열심히 좇아가 보지만 현지인의 경험을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인지 거리는 갈수록 벌어지기만 했다. 감당할 수 없는 속도를 따라잡아봤자 숨이 차서 이야기다운 이야기도 할 수 없을 것이니, 내심 정상 능선에서 만나기로 작정하고 속도를 늦췄다. 속도를 자신의 페이스에 맞추고 나니 비로소 길의 모양새가 눈에 들어온다. 제법 급한 경사라 길은 지그재그의 곡선을 그리며 이어지는데, 눈에 파묻혀 알지 못했으나 기실 나무 목책을 박은 계단길이였던 것이다. 그 사실도 우스운 것이 길을 따르다 보면 어느 구간에서는 계단이 길 옆의 경사면에 비스듬히 누워있다. 평형감각의 착각이 아닌 이상 계단이 무너져 경사면으로 밀린 것으로 보여지는데, 보은을 대표하는 산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이용한다는 길을 이 상태로 놔둔 것이 원망스럽다. 구태여 무너진 길을 따라 가려는 고집스러운 사람이야 없겠지마는 등산객의 안전을 위하여 마련한 시설일 터인데, 지금 모습은 되려 자연만 해친 경우이지 않은가. 보은군의 입장에서는 수고스러운 일이겠지만 시정이 필요한 일이라 생각된다.
적암리 마을 안쪽으로 접어들면 가장 많은 사람이 찾는 구병산 등산로로 들어설 수 있다.
부드러운 능선 속에 험로를 감춘 산
경사는 가파르지만 힘든 구간은 없어 정암사지부터 한 시간 정도면 능선에 도달할 수 있다. 그곳에서야 안내인을 따라잡는데, 일행이 도착하자마자 “이제부터는 아이젠을 하는 게 안전하다”며 주의를 준다. 그 말에 안전에 대비를 하고 이제 능선의 왼쪽으로 정상을 향하기 시작했다. 급한 경사를 오르다 완만한 능선에 이르니 산행의 힘듦은 거의 느껴지지 않지만 심심치 않게 ‘위험 표지판’을 발견하게 된다. 벼랑으로 이어지는 바윗길을 조심하라는 것인데, ‘윗길은 바윗길 벼랑이 있고 추락 위험이 있으므로 노약자 부녀자는 아랫길 이용’이라는 내용이다. 궁금증이 생겨 윗길로 올라가보니 바위로 이어지는 길에 눈이 덮여있어 도무지 길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한 눈에 보기에도 위험해보여 아랫길로 내려서지만, 좋은 조망을 위해 윗길을 택할 사람들도 있을 듯하다. 표지판의 설명대로 아랫길로 내려서면 편안한 길이 이어지니 굳이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길을 따라 20분 정도 걸으면 853봉에 도착한다. 정상과의 표고차가 10m 정도 밖에 나지 않는 지점이지만 조망을 즐기기에는 충분치 못한 곳이다. 잠시 짐만 점검하고 정상을 향해 가려는데 산행 내내 빠르게 앞장서던 송자헌씨의 발걸음이 움찔한다. “눈에 덮여서 길이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산악회 리본은 분명 등산로임을 알려주는데 어느 방향에도 길로 보이는 흔적은 없었던 것. 잠시 우왕좌왕하던 송자헌씨가 결국은 벼랑으로 보이던 길 끝에서 로프를 발견하고 길을 찾아낸다. 로프를 잡고 내려가는 구간은 보통 사람 키의 2~3배 정도로 짧은 구간이지만 수직에 가까운 경사를 지니고 있어 발 디딜 곳이 잘 보이지 않으니 조심히 내려가야 한다. 아찔한 순간을 지나고 한숨을 돌리지만 아직 안심하기에는 이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병산의 험하다는 정상 능선이 이 짧은 구간으로 끝날 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벼랑에서 내려서 몇 발자국을 걸으니 역시나 또 한 번의 난코스가 나타난다. 경사 자체는 심하지 않지만 내려가는 길이가 제법 길고 눈까지 쌓인 바위라 내려설 때 힘을 좀 들여야 하는 곳이다.
위험구간 두 곳을 내려서면 안부에 이르러 이정표를 만난다. 정암사지로 원점회귀할 수 있는 갈림길이 있는 장소인데, 853봉이 반드시 들러야할 곳은 아니니 앞서 말한 위험구간 두 곳을 피하고 싶다면 정암사지에서 왼쪽 길을 택하는 것도 좋은 방법으로 생각된다. 이 위치에서 구병산 정상까지는 봉우리 2개만 오르면 도착한다. 첫 번째 봉우리를 넘어 다음 안부에 이르면 KT위성지국으로 내려가는 갈림길이 나오고, 이곳에서 정면의 봉우리를 오르면 정상에 도착할 수 있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에도 급경사 구간이 있으나 로프만 잘 잡고 오르면 어려움은 없다.
이윽고 구병산 정상인 백운대에 서게 되는데 구병산 정상을 알리는 정상석이 하나 있을 뿐 백운대라는 명칭은 적혀있지 않다. 정상은 제법 넓고 평평한 공터로 되어있고 사방으로 조망이 열려있어 시원한 느낌을 준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북쪽으로 속리산 천황봉을 비롯한 능선들을 볼 수 있으며, 남쪽으로는 보은평야의 너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정상에 있는 이정표를 보니 충북알프스 기점인 서원리까지 7.7km 거리라는 정보가 적혀있다. 앞서 정상 능선으로 올라선 위치에서 구병산 정상까지 이정표 기준으로 1.8km를 이동하는데 1시간 30분 정도가 걸렸는데, 험한 구간이 종종 나타나는 능선을 따라 7km 이상 이동하는 일이 만만치 않을 것 같다. 구병산의 충북알프스 종주가 하루에 쉽지 않을 거라는 말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구병산 능선에 대피소 등의 편의시설이 갖춰지지 않으면 충북알프스 산행은 힘들 것 같다.
정상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정상 인근에 있다는 풍혈을 둘러보고 싶어 송자헌씨에게 위치를 문의했다. 허나 송씨는 “가깝기는 하나 풍혈까지 가는데 또 험한 구간을 지나야하고, 막상 가보면 그다지 볼 것이 없다”며 찾아가기를 만류한다. 지금껏 경험했듯이 눈 쌓인 구병산은 위험하여 안전을 우선으로 길을 권하는 것 같다. 안내인의 의견을 받아들여 하산을 하기로 했다. 하산 루트는 올라왔던 길을 다시 내려가 KT위성지국 방면으로 잡았다.
정상에서 내려서서 위성지국 방면으로 길을 잡자 올라왔던 길과 비슷하게 지그재그 곡선을 그리며 내려간다. 좌우로 바위들이 호위하며 바람을 막아주어 칼바람 불던 정상 능선에 비해 따뜻하게 느껴지는 길이다. 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철사다리를 지난 이후 오른편 암벽들을 잘 살피면 아랫부분이 움푹 파여 들어간 형태의 큰 바위를 볼 수 있다. 파인 자리에는 옛날 사람들이 산 흔적인지 아니면 무속인들이 기도처로 사용하는 것인지 몰라도 사람 손을 거친 흔적도 제법 보이는 장소다. 이 바위 벼랑 아래에 바위틈에서 쌀이 나왔다는 쌀난바위가 있다. 다만 별다른 표지판이 없어 쌀난바위임을 모르고 지나칠 수 있으니 유심히 살펴보고 지나도록 하자.
쌀난바위를 지나 다시 완만한 경사의 하산길을 이어나가면 길이 점점 평평해지며 다리를 하나 지난다. 이후로는 거의 평지인 길을 걸어 산을 빠져나가게 되고 위성지국의 커다란 위성안테나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위성지국을 오른쪽에 두고 길이 이어지며 산행을 시작했던 적암리 마을로 향하게 되는데, 적암리에 들어서기 전 구병산의 병풍친 모습을 다시 바라볼 수 있다. 적암리로 들어서면 오를 때와 마찬가지로 마을길을 따라 내려가 산행을 마무리 짓게 된다. ⓜ
구병산 정상 부근에 이르면 사방으로 병풍처럼 펼쳐진 주능선을 바라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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