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성탄 팔일 축제 내 제7일(12/31)|오늘의 말씀과 묵상

문성식 2011. 12. 31. 19:04




성탄 팔일 축제 내 제7일(12/31)







    말씀의 초대
    ‘그리스도의 적’은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부정하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결국 진리이신 예수님을 부정하는 것이다(제1독서). 요한복음의 서두는 말씀이신 예수님을 중심에 두고 구원의 역사를 요약하고 완성시킨다. 곧 역사의 예수님과 하느님의 영원한 말씀은 태초부터 함께 계셨던 분으로 하느님과 동일하신 분이심을 증언한다(복음).
    제1독서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2,18-21 자녀 여러분, 지금이 마지막 때입니다. ‘그리스도의 적’이 온다고 여러분이 들은 그대로, 지금 많은 ‘그리스도의 적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이 마지막 때임을 압니다. 그들은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갔지만, 우리에게 속한 자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속하였다면 우리와 함께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들이 아무도 우리에게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진리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진리를 알기 때문입니다. 또 진리에서는 어떠한 거짓말도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의 시작입니다. 1,1-18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요한은 그분을 증언하여 외쳤다. “그분은 내가 이렇게 말한 분이시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어느 신문 인터뷰에서 원로 조각가 최종태 교수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미켈란젤로 작품에 미완성이 많은 게 이해가 돼요. 예술 작품에 완성이란 없는 겁니다. 다만 어느 시점에서 작업을 멈출 따름이지요.” “더는 손댈 수 없다고 느껴지는 시점이 있어요. 영감이기도 하고 욕심을 버리는 때이기도 하지요. 그런 점에서 보면 미완성이 곧 완성이지요.” 원로 조각가의 표현처럼 예술이라는 것이 완성이 없는 미완성이라는 말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미완성은 아직 못 다한 말이 있고, 못 다한 표현이 있어, 들리지 않는 언어와 보이지 않는 형상을 더 채워야 할 여지를 남겨 놓고 있다는 뜻입니다. 작가가 더 채워야 하지만 더 채울 수 없고, 더 표현해야 하지만 더 표현할 수 없는 그 자리는 어쩌면 인간의 한계를 넘는 신의 영역으로 남아 있기에 미완성은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누군가 우리 인생도 예술이라고 했지요. 예술가가 미완성의 작품을 두고 더 이상 어쩔 수 없어 하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는 한계를 경험합니다. 더 성장하고 더 성숙해지고 싶지만 늘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마지막 날까지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한 채 이 모양으로 주님께 갈지도 모릅니다. 우리 인생을 예술이라고 한다면 이렇게 우리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미완성의 삶을 살기 때문일 것입니다. 살고 싶지만 살지 못하고, 이루고 싶지만 이루지 못한 우리 인생의 미완성의 자리는 하느님께서 채워 주실 자리입니다. 약함과 결점, 결핍, 한계를 가진 가장 불완전한 우리를 ‘가장 완전하신 분’께서 채워 주십니다. 못나고 죄스러운 삶을 살아도 여전히 우리 인생이 예술이고 아름다운 이유입니다. 한 처음 ‘흙의 먼지’로 우리를 만드신 말씀이신 그분께서 우리 가운데 오시어 창조 때 그 본래의 완성된 모습으로 채워 주십니다. 우리의 미완성은 그분 때문에 가장 아름다운 완성이 됩니다.
-출처 매일 미사-
저녁노을(모니카)
♬ 그 큰 빛 주님 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