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

종교와 인생 / 김수환 추기경

문성식 2011. 11. 23. 19:53

     
    
      종교와 인생 종교에서는 인생을 어떻게 바라보며 삶을 무엇이라고 말할까요?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떤 가치관에 살고 있느냐 하는 것도 생각할 수 있고,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는 것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먼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봅시다. 금융위기 시대에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일터를 잃고 실직자가 나오는 때에는, 그 실직자들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일터, 직장이겠지요. 그리고 또 돈이 없어서 부도를 내고 파산하는 중소기업이 매일 수십 개씩 된다는데 그런 중소기업 사장들에게 제일 소중한 것은 돈일 것입니다. 중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는 말기 암 환자에게는 무엇보다도 쾌유와 건강 회복이 제일 소중하다고 여겨질 것입니다. 그리고 대학 입시를 치르는 입시생들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대학 합격일 것이고, 또 실연한 사람에게는 사랑이 제일 중요하겠지요. 이렇게 각자 자기 자신이 서 있는 입장과 환경에 따라서 제일 소중한 것이 다를 것입니다. 이처럼 직업, 돈, 건강, 대학 입학, 사랑 다 각각 해당 되는 사람에게는 제일 소중하고, 우리 모두는 그것이 중요한 것이라는 데는 공감을 하는데, 만일 어떤 사람이 실직했다 해서, 즉 자기에게 제일 소중한 직장을 잃었다 해서 또는 부도를 내고 파산했다 해서 실망과 좌절에 빠지고 자포자기 한다든지, 더 나아가 목숨까지도 끊으려 한다면 우리는 여기에 동의할 수 있습니까? 동의할 수 없습니다. 왜 동의할 수 없습니까? 단순히 아직도 죽기에는 나이가 너무 아까워서입니까? 무언지 자포자기하기에는 너무 이르기 때문입니까? 그것만이 아닐 것입니다. 무언지 표현하기는 힘드나 인간에게는 그 무언가 더 소중한 것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느낌은 우리 모두가 무의식중에 인생에는 무언가 돈이나 건강, 신분이나 계급 그 이상의 무엇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아마도 삶의 의미가 될 가치일 것입니다. 각자가 생각하는 삶의 의미일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 더 보편적인 모든 인간에게 근본적으로 주어져 있는 의미, 인생의 목적일 것입니다. 아무튼 자신의 삶의 의미를 자각하고 있는 사람은 매일의 삶이 비록 힘이 들더라도 살아나갈 것입니다. 니체는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거의 모두 어떻게 살면 좋을지 모를 어려움도 견디어 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비록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도 없고 (예를 들면 세상의 삶에 아무런 의미도 볼 수 없을 만큼 된 사람) 내가 할 일도 없고 세상의 견지에서는 전혀 쓸모없는 존재밖에 되지 못할 경우이라든지 또는 오히려 하루라도 더 살면 살수록 남에게 폐를 끼칠 수밖에 없는 처지일 때, 그런 사람에게는 아직 삶의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노인이 아닐지라도 말기 암 환자, 몸은 병들었는데 의지할 곳 없는 신세, 차라리 죽는 것이 더 좋다는 본인과 다른 사람들도 생각하게 하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인생에 의미가 있다고 누가 말해 줄 수 있습니까? 한마디로 기타 모든 것을 잃고 절망적 상황에 있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도 인생의 의미가 있습니까? 사실 이런 사람들에게 그래도 인생에는 아직 의미가 있다고 확신시켜 준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 때로는 거의 불가능해 보일 때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서 유명한 정신 의학자 빅터 E. 프랭클(Viktor E. Frankl)이 쓴 책 『죽음의 수용소』는 2차 대전 중 독일 나치에 의해 유다인 인종 학살을 목적으로 지어진 강제 노동 수용소입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곳이 아우슈비츠일 것입니다. 슈비츠 수용소의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를 여러분도 들으신 일이 많으실 것이며, 영화 '쉰들러의 리스트'를 보시고도 짐작하실 것입니다. 『죽음의 수용소』를 읽어 보면 어디를 둘러보아도 살아날 길은 전혀 보이지 않고 강제 노동과 전염병, 굶주림과 목마름, 무엇보다도 매일같이 수백 명, 수천 명을 굶어 죽이는 가스실에서 나오는 연기, 조금만 규칙을 어겨도 즉시 혹독한 폭행, 고문 또는 총살 등 도처에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인간이 희망을 가진다는 그 자체가 모순이요, 허무해 보이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그 책 8장의 제목도 '절망과의 투쟁'입니다. 중간 쯤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재소자 중 쉽게 절망하여 죽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이고, 그들은 정신적으로 자포자기하고 맙니다. 어떤 위로나 격려의 말도 들으려 하지 않고 일체의 관심조차 거절하며 그들의 한결같은 말투는 보통 이러합니다. "나는 이미 인생으로부터 기대할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사람들은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저자는 이렇게 자문합니다. 이 수용소에서는 1944년 크리스마스와 1945년 신년 사이에 일찍이 없었던 대량의 사망자가 나옵니다. 프랭클의 견해에 의하면 그것은 가혹한 노동 조건이나 악화된 영양 상태에 의해서나 또 나쁜 기후나 새로 나타난 전염성 질환에 의해서가 아니고, 그 원인은 집단적 실망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 때, 연합군이 와서 구해 줄 것이라는 근거 없는 소문이 돌았고 사람들은 이것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인 12월 25일이 되어도 그 다음 26일도 , 또 27일에도 고대하던 구원의 손길인 연합군은 오지 않았습니다. 연합군이 이 수용소를 해방시켜 준 것은 이듬해 1945년 5월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구출된다는 소문에 모든 희망을 두고 기대를 걸고 있던 사람들은 그것은 아무런 근거 없는 뜬소문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들은 일시에 실망과 좌절에 빠지고 정신적 저항력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저항력을 잃음으로써 '발진 티푸스'라는 전염병에 걸려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수용소에 있던 사람들이 겪은 이 체험에서, 인간이란 의미 없는 고통은 결코 참아낼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어떤 고통이든지 무언가 의미있다고 느껴질 때 우리는 그 고통의 짐을 지고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내겐 나를 필요로 하는 자식이 있다. 나를 기다리는 아내가 있다. 사랑하는 애인이 있다. 나는 꼭 이루어져 할 일, 목표가 있다"등 무언가 삶의 의미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고통을 이겨낼 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즉 기다림도 없고 할 일도 없을 때에는 고통을 이겨 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빅터 프랭클은 앞서 제기한 물음, 즉 절망에 사로잡혀 인생으로부터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다고 보는 사람에게 무어라고 답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생명의 뜻(인생의 의미)에 대한 관점의 변경일 것이다. 즉 인생에서 우리는 무엇을 더 기대할 수 있는가가 아니고 도리어 인생이 무엇을 우리에게 기대하고 있는가가 문제인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배우지 않으면 안되며, 또 절망하고 있는 인간들에게 가르치지 않으면 안된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여기서는 관점의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이 문제라고 할 것이다. " 즉, 우리가 인생의 뜻을 묻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질문을 받은 자로서 체험하는 것이다. "인생은 우리에게 매일 매시 문제를 제기하고 우리는 그 질문에 대하여 말로만이 아니라 정당한 행위에 의하여 응답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인생이란 결국 인생의 의미에 대한 문제에 정확하게 대답하는 일, 인생이 각 인간에게 부과하는 사명을 다하는 일, 매일 매일의 임무를 행하는 것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 빅터 E. 프랭클 참으로 중요한 내용의 이야기입니다. 내가 인생에서 무엇인가를 기대하기보다 인생이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깨닫고 여기에 올바르게 답한다는 것… 이 말은 후에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인용하여 "여러분은 국가가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 기대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여러분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하고 생각해야합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입니까? 무엇이기에 삶의 의미를 찾고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으려는 것입니까? 참으로 끝까지 지켜야 할 가치는 무엇입니까? - 김수환 추기경 잠언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