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과 사랑
우리는 지금 번창하는
황금 만능주의와 권력형 스캔들의 탁류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으면서도 서로 불신하고
인간성을 날로 박탈당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진정한 지성인이 되고자 할진대
우리는 모름지기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좌표부터 확인하여야겠습니다.
만일에 이 정도의 확인마저 꺼려한다면
그것은 바로 이 땅의 지성인 세계가
그만큼 마비되어 있다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실을 의식이라도 해야겠고,
무엇보다도 우리들 자신을 의식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아는 능력이 있고
서로 동참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남을 위해서 투신까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 속에서는
이웃을 의식해야 합니다.
우리가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존재라면,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내가 남의 안에 있고 남이 내 안에
존재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이웃의 아픔이나 기쁨이
곧 나의 아픔이고 기쁨이며,
나의 웃음과 슬픔이 바로 내 이웃의 웃음과
슬픔인 것입니다.
우리의 앎은 이러한 사랑,
즉 서로 동참하려는 사랑을 전제로 하고
또 이러한 사랑에로 향한 것이라야
비로소 그 뜻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아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물질계에서는 오로지 우리 인간의 고유한 행위이며,
이 행위를 통해 사람은 하느님 생명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본성적으로
사회적 존재임을 인류의 원초적 사회인
첫 남녀 창조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2장에 여자(하와)가 남자(아담)의 갈비뼈에서
창조되었다고 묘사되어 있는데
이것은 남녀의 우월을 설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께서 여자와 남자의 일심동체와 같은
상호 협동을 원하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담은 자기의 갈비뼈를 줌으로써
자기 자신을 하와에게 주는 것이고,
하와는 그의 갈비뼈를 통하여
아담의 생명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아담의 뼈가 하와의 몸이 된다는 것은
하와가 아담의 완성인 동시에 아담은 하와로 하여금
모든 산 이들의 어머니가 되는 바탕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보듯이 남녀의 관계는
본성적으로 자기 이탈 혹은 자기 창조를 요구합니다.
사랑은 자발적으로 기꺼이 자기 자신을 포기할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아담과 하와의 관계를 단순히 남녀의 관계로만
보아 넘겨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만남은 바로 모든 인간적 만남의
거울이며 원형이기 때문입니다.
혈연관계가 전혀 없는 이웃에 대하여도
우리가 마땅히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도 있는 것입니다.
- 김수환 추기경 잠언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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