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과류를 먹지 못해 슬픈 인생 새벽부터 저녁까지 이어진 촬영, 녹초가 되었는데 스태프 중 한 명이 초콜릿을 내밀었다. 한입에 넣고 깨물었는데, 초콜릿 안에 숨어 있던 마카다미아(너트의 일종)가 정체를 드러내는 것 아닌가? 급하게 휴지를 찾아 초콜릿을 뱉었다. “견과류 알레르기가 있어서요. 뱉었으니 괜찮을 거예요.” 미안해 하는 스태프에게는 웃어 보였지만, 벌써부터 혀가 근질근질하다. 조만간 피부가 울긋불긋해질 게 분명하다. 이 해프닝을 보고 여기저기서 각종 알레르기 환자들이 ‘커밍아웃’을 했다.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갑각류를 먹지 못한다고 하고, 포토그래퍼는 고무 알레르기가 있단다. 안 그래도 카메라의 뷰파인더에 휴지를 대놓은 까닭이 궁금했는데, 고무가 피부에 직접 닿으면 두드러기가 나기 때문이란다.
알레르기란 그리스어로 ‘변형된 것’을 뜻하는 ‘allos’에서 유래했다. 어원에서도 알 수 있듯 보통 사람들에게는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는 물질이 유독 어떤 이에게만 과잉 반응을 일으키는 현상이다. “한 여자 환자가 입 주위에 발진이 계속된다며 병원을 찾은 적이 있어요. 접촉성 알레르기라 판단해 화장품, 립스틱 등 얼굴에 바르는 것을 모두 중단해볼 것을 권했는데 호전이 없더군요. 알고 보니 치약에 알레르기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답니다.” 후즈후클리닉 한광호 원장의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듯,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이 알레르기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만일 고등어를 먹고 모든 사람이 과민 반응을 일으킨다면 고등어는 먹지 못하는 생선으로 분류되겠지요. 하지만 특이한 체질의 누군가만 반응하니 ‘알레르겐(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되는 것이죠.”
수천, 아니 수만 개의 알레르겐 중 가장 흔한 유발 인자는 집먼지진드기, 꽃가루, 곰팡이, 동물의 비듬과 털, 바퀴벌레다. 음식 중에는 우유, 달걀, 견과류 등이 주범으로 꼽힌다. 어떤 이들은 화장품, 금속, 고무, 모직 등에 노출될 때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이쯤에서 다시 견과류 이야기로 돌아가볼까? 한 친구가 술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 “태어나서 단 한번도 맥주와 땅콩을 함께 먹어보지 못했다면 세상의 큰 즐거움 하나를 모르고 사는 거야!” 본인이 직접 구운 피칸파이가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인데 내가 맛볼 수 없어 유감이라는 친구도 있고, 견과류를 먹지 않아 손톱이 쉽게 부러지는 거라며 혀를 차는 선배도 있다. 이 기회에 한번 견과류 알레르기를 극복해보리라 마음먹고 WE 클리닉의 박정수 원장을 찾았다.
“알레르기란 몸을 보호하는 면역계가 특정 단백질이나 낯선 물질에 대해 과민 반응을 일으켜 나타나는 현상이다. 없다가도 생기고, 같은 물질에도 매번 다른 증상으로 나타나 우리를 괴롭힌다”
(위) 블랙 톱 타임Time. 네이비 쇼츠 바슈ba&sh. 스타킹 월포드Wolford. T 스트랩 슈즈 랄프 로렌Ralph Lauren. 실버 뱅글 데이빗 여먼David Yurman.
알레르기의 종류
● 흡인성 알레르기 사람의 피부에서 떨어지는 때와 비듬을 먹고 사는 집먼지진드기, 나무나 꽃에서 떨어지는 꽃가루, 애완동물의 털이나 비듬 등. ● 약물 알레르기 알레르기를 유발하는 여러 약물이 있으나, 가장 대표적인 것은 항생제다. ● 식품 알레르기 우유, 초콜릿, 땅콩, 복숭아, 갑각류, 메밀 등 ● 접촉성 알레르기 옻나무, 니켈, 크롬, 금속, 가죽, 화장품, 세제, 고무 등. ● 물리적 알레르기 온도 변화, 햇볕, 압박, 문지름, 방사선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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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진국에 일찍 진입한 국가일수록 알레르기 환자 비율이 높고, 형제자매가 많거나 탁아 시설에서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며 자란 사람의 경우 발병율이 낮다는 사실을 아는가?”
(위) 실버 원피스 손정완Sonjungwan.
알레르기는 불치병일까? “알레르기 질환은 치료라기보다 조절이라는 개념이 더 맞습니다.” 무작정 알레르기를 치료하고 싶다고 하니 박정수 원장이 말했다. 한 번 치료하고 사라진다면 ‘치료’라 부를 수 있지만, 주사 한 대 맞는다고 체질이 달라질 수는 없기 때문이란다. 적을 알아야 이긴다고 했던가? 우선 견과류 이외의 다른 물질에도 과민 반응을 일으킬 수 있을 수 있으니 피부 반응 검사를 받아보기로 했다. 실제로 알레르기를 유발시켜 검증한다니 아찔했지만, 생각만큼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등에 약 50개의 물질을 바른 후 바늘로 피부를 살짝 긁는데, 여드름 짜는 것보다 덜 아픈 정도랄까? 이때 알레르기 유발 물질인 히스타민으로도 피부 반응을 유도한단다. 조금 지나면 등이 가렵기 시작한다. 15분 정도 후에 붉게 부풀어오른 부위의 크기를 측정해 시약 부위가 히스타민 반응 부위보다 더 크게 부풀 경우 해당 원인 물질에 대해 양성으로 판정한다. 그런데 피부 반응 검사를 마친 후 박정수 원장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혈액 검사를 해보자고 제안하는 게 아닌가? 며칠 후 나온 검사 결과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내용인즉, 피부 반응 검사에서는 집먼지진드기와 크롬에 양성 반응이 나오고 견과류에 대한 혈액 검사에서는 음성 반응이 나온 것. 그렇다면 지금껏 피부색이 점점 붉게 변하고, 참을 수 없이 간지러웠던 건 나만의 착각이었단 말인가? 다행히도 병명이 있었다. 원인을 알 수 없이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나는 ‘비특이성 알레르기’가 그것.
면역계, 강하게 더 강하게! 당연한 이야기지만, 알레르기 질환에 시달리지 않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알레르겐을 피하는 것이다. 메밀을 먹으면 호흡이 곤란해지고, 고양이 근처에 가면 재채기가 나오며, 특정 화장품을 발랐을 때 피부가 부어오른다면 문제되는 원인 물질을 피하면 그만일 터. 하지만 먼지, 진드기처럼 항상 주위에 있어서 피하기 어려운 경우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진드기 방제 업체의 도움을 빌린 데도 ‘100% 박멸’이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데 한 번 더 생각해보자. 굳이 진드기를 박멸할 필요가 있을지, 먼지를 완벽하게 제거한 무균실에서 살아야 할지?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은 먼지, 진드기와 함께 살아왔다. 다만 우리의 면역력이 약해진 것이다. 과민 반응을 일으키는 원인 물질이나 요인을 찾을 수 없는 ‘비특이성 알레르기’나 ‘아토피성 피부’도 마찬가지. 모든 것이 면역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선진국으로 진입할수록 알레르기 질환이 급증한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자라면서 키가 크고, 몸무게가 늘듯 면역 기능도 성장합니다. 그 과정에서 세균이나 바이러스의 침입을 받아가면서 ‘진짜 적’을 구별하는 능력을 기르게 되지요. 그런데 사회가 발전하면서 우리는 지나치게 청결한 환경에서 생활하게 됐습니다. 의학 기술의 발전으로 항생제도 남용합니다. 그 결과 세균이나 바이러스에 노출될 기회가 적어져 면역계에 혼란이 일어난 것이지요. 선진국에 일찍 진입한 국가일수록 알레르기 환자 비율이 높고, 형제자매가 많거나 탁아 시설에서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며 자란 사람의 경우 발병률이 낮다는 연구가 이를 증명하지요.” 하늘마을바이오 노지영 팀장의 말이다.
알레르기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알레르기 치료의 핵심 목표는 ‘과민한 면역계’, 즉 ‘약하고 어리숙한 면역계’를 똑똑하고 튼튼하게 만드는 것이다. “알레르기로 인해 생활에 불편을 느낀다면 면역 치료를 받아보세요. 호흡기나 소화기를 통해 유발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폐와 비위의 면역력을 튼튼하게 해서 유발 요인에 노출되더라도 가볍게 지나갈 수 있도록 돕는 치료입니다.” 규림한의원 주숙현 원장의 말이다. 단점이 있다면 한 달이 걸릴지, 1년이 걸릴지 알 수 없다는 것. 알레르겐을 피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생각은 어리석다. 우리 몸의 면역 체계는 평생 한 가지에만 알레르기 반응을 나타낸다고 장담할 수 없으며 또 알레르겐을 평생 완벽하게 차단하고 살아가는 것도 불가능하기 때문. 또 하나 기억해야 할 사실은 동일한 자극일지라도 몸 상태에 따라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인다는 점이다. 체력이 좋아서 이겨낼 수 있을 정도라면 같은 자극에 가볍게 반응하지만, 컨디션이 나쁠 때는 일상생활에 불편함을 겪을 정도로 괴롭다. 즉, 알레르기가 두렵다는 핑계로 삶에 한계를 긋지 않되, 올바른 식습관과 꾸준한 운동으로 건강 관리에 힘쓰는 것이야말로 알레르기에 대처하는 가장 현명한 자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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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인성 알레르기의 경우 생활 관리가 매우 중요하다
집먼지진드기 & 애완동물
● 소파 커버를 가죽으로, 양탄자를 나무 바닥으로 바꾸는 등 실내 패브릭을 최소화한다. ● 먼지가 잘 붙는 물건은 문이 달린 찬장에 넣어 둔다. ● 이불이나 침구류는 섬유 청정제로 자주 세탁한다. ● 이중 필터가 내장된 진공청소기를 사용한다.
바퀴벌레 & 곰팡이 ● 주기적으로 실내를 소독하고 구석구석에 바퀴벌레 살충제를 놓아둔다. ● 실내 습도를 낮춘다. ● 음식 찌꺼기가 많은 부엌, 습도가 높은 욕실은 청결에 특별히 주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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