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의 은혜, 생명의 신비
내가 며칠 전에 겪은 일입니다. 나는 다른 일도 그렇지만 농사 일도 서툰 편입니다. 채마밭(채소밭)이 있어서 이것저것 심었는데 밖에 나갔다 돌아왔더니 봄에 뿌린 씨앗들이 다들 시원치가 않고 고추와 케일과 해바라기, 이 세 가지만 아주 건강하게 자라 있었습니다.
묵은 밭이라 풀매기도 번거롭고 하여, 내가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에 갔을 때 고흐 미술관에서 구해 온 해바라기 씨앗을 그곳에 뿌려 놓았습니다. 그래서 요즘 해바라기가 가득 피어 있어서 풍경이 볼 만하게 되었습니다.
고추는 처음 장에서 모종을 사다 심었는데 갑자기 냉해가 닥쳐 얼어 죽었습니다. 내가 사는 곳이 해발 약 800미터쯤 되는 곳이라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다시 스무 포기 정도를 사다 심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고추를 따면서 새삼 느낀 점이 있습니다. 내가 고추를 돌본 것은 단지 모종을 두 번 심어 주었고 풀 조금 매주었고, 지난 여름 몹시 가물었을 때 장에서 비닐 호스를 사다가 물 준 일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모른 체했는데 고추밭에 가보니까 고추가 그토록 많이 열려 있었습니다. 스무 포기에서 한 자루가 넘는 고추를 따냈지요.
그래서 고추 보기가 참 부끄러웠습니다. 전혀 손질도 안 해주고 모른 체했는데, 단지 내가 해준 거라곤 가뭄에 물 좀 주었고 김 좀 매주었을 뿐인데 이렇게 많은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 것입니다. 이것이 흙의 은혜입니다. 또 생명의 신비입니다.
옛날에 농경 사회에서 살던 사람들은 이런 일들을 수시로 경험했기 때문에 자연의 질서와 도리를 삶의 원리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요즘 우리는 시장에 가서 편리하게 사다 먹으니까 생명의 신비와 자연의 순리로부터 자꾸만 멀어져 갑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서운한 일입니다.
= 법정 스님의 참 맑은 이야기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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