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20] 독일 유학생 시절(下)
현지 체험들, 훗날 사목자로서 소임수행에 큰 도움
<사진설명>
한국에서 온 광부와 간호사, 수녀들이 나를 찾는 바람에 가뜩이나 힘든 공부가 자꾸 지연됐다. 독일 탄광촌에서.(뒷줄 가운데가 김 추기경)
다시 뮌스터대학으로 돌아와 공부하고 있을 무렵에 한국인들이 독일로 물밀듯 밀려왔다.
한국 정부가 서독으로부터 상업차관을 얻기 위해 간호사와 광부를 송출하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다. 제2차 세계대전의 폐허에서 '라인강의 기적'을 이룬 서독은 노동력이 부족해 광산·병원처럼 고된 사업장에는 외국 노동력을 수입해야 하는 실정이었다.
한국에 진출한 독일 계통의 분도회에서도 어학과 간호학을 공부시키느라 수녀와 수사들을 독일에 파견하기 시작했다.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의 한 독일인 신부님은 독일 가정에 입양시키기 위해 한국에서 고아들을 데려왔다. 그야말로 아이들을 여기저기에 던져놓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한국인 신부가 거의 없다 보니 이들이 툭하면 나를 찾는 것이었다. 고해성사와 미사는 물론이고 갑자기 어려운 일에 부닥치면 도움을 청할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공부를 한다고 해도 "도와달라", "꼭 와달라"는 동포의 간청을 어떻게 거절하겠는가.
한인들에게 '김수환 신부'가 입소문이 났던지 나를 부르는 전화와 편지가 끊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학업에 지장이 많았지만 어려운 사람을 보고 가만 있지 못하는 성격이라 웬만하면 요청에 응하려고 했다.
한국 여성이 세계 어느나라 여성보다 강인하다는 사실은 그때 새삼 깨달았다. 한국 간호사들의 헌신적이고 억척스런 일솜씨는 현지인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었다. 간호사들은 생활비를 거의 안쓰다시피하면서 월급을 고스란히 가족에게 송금했다. 그 중에는 대학에 진학해 의사나 문학박사가 된 사람도 있었다.
유학시절에 보고 겪은 여러가지 일들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65)였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가톨릭교회가 창문을 활짝 열어 새 바람을 맞아들이고, 쇄신을 통해 시대변화에 적응하려는 '희망의 대역사(大役事)'였다.
교황 요한 23세는 공의회를 소집하면서 시대적응이란 뜻의 '아죠르나멘토(aggiornamento)'라는 단어로 그 의미를 설명하셨는데 이는 순식간에 전세계 교회의 유행어가 됐다.
가톨릭교회에 변화와 쇄신의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감지했다. 비록 신문과 방송을 통해 공의회 진행소식을 접했지만 예전에 느껴보지 못한 강한 바람이었다. 그리고 독일 신부들과 공의회에 대해 토론하면서 많은 얘기를 주고 받았다. 그러한 체험은 내가 신부로서뿐만 아니라 훗날 주교와 추기경으로서 소임을 수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그 무렵 교황 요한 23세가 나를 울린 일은 잊을 수가 없다. 어느날 극장에 영화를 보러 갔는데 영화가 슬퍼서 운 것이 아니라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나오는 뉴스를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교황님이 추기경과 주교들을 이끌고 공의회장에 입장하는 장면이었다. 기도에 열중하고 계신 교황님 얼굴이 화면에 비친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루룩 흘렀다. 감동의 눈물이었다. 성령께서 새로운 도전에 나서는 교황님과 함께 하고 계시다는 것을 강하게 느꼈다.
극장에 가서 영화가 아니라 뉴스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하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1958년 요한 23세(원명 안젤로 주세페 론칼리)가 77세 고령에 교황직에 오르자 교계와 언론에서는 '과도기적 교황'이라고 표현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워낙 고령이다 보니 큰 기대를 거는 것 같지 않았다. 전임 교황 비오 12세가 수려한 귀족적 분위기였다면 이분은 털털한 시골 할아버지 같은 인상이었다. 돌아가시기 전에 후임교황 물망에 오를 만한 젊고 유능한 추기경들을 많이 임명해 주는 것 외에는 기대할 게 없다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요한 23세는 세상을 향해 문을 열고 변화와 쇄신, 그리스도교 일치, 세상 및 타종교와 대화하는 교회를 꾀하셨다. 어느 누구도 그러한 용단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과도기적 교황'이라는 신문 제목이 적중하기는 했다. 젊은 새 교황을 기다리면서 임시로 직책을 수행하는 교황이 아니라 전통과 관습을 뛰어넘어 새로운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교회를 이끈 교황이 되셨다는 말이다.
특히 요한 23세는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을 담은 룗지상의 평화룘, 룗어머니요 스승룘 등 8개 회칙을 발표하셨다. 이 두 회칙은 지금도 교회 안팎에서 '평화의 교과서'라고 불릴만큼 내용이 뛰어나다.
요한 23세는 공의회 회기 중인 1963년 운명하셨다. 교황님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은 후부터는 바티칸 방송에 주파수를 맞춰놓고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라디오를 틀곤했다. 내 마음은 로마에 가 있었다. 이탈리아 공산당 유력기관지조차도 그분의 부고(訃告)기사에 "세계의 목자 가시다"라는 제목을 달아 업적을 기렸다.
독일은 여러 면에서 흥미로운 나라이다. 내가 관찰한 독일 국민성은 질서, 근면, 철두철미다. 이는 일본 국민성과도 유사한데 한가지 특징을 더 말하라면 집단주의를 꼽고 싶다.
어느날 술에 흥건히 취한 사람들이 민요를 합창하면서 줄맞춰 걷는 모습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한 적이 있다. 맥주집에서 나온 취객들이 한치 흐트러짐도 없이 군가풍 민요에 발을 맞춰 걷는 질서의식과 집단의식을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이튿날 독일 신부에게 "독일인에게는 군국주의의 피가 흐르는 것 같다"고 말했더니 깜짝 놀라는 시늉을 했다.
가뜩이나 힘겨운 전공 공부는 요셉 회프너 지도교수님이 주교로 임명돼 뮌스터교구장으로 떠나시면서 난관에 부닥쳤다. 덧붙이면, 회프너 주교님은 1969년 나와 함께 추기경에 임명됐다. 더구나 내 임명순서가 조금 빨라 교황님께 먼저 임명장을 받았다. 그때 스승님께 고개를 숙이고 "정말 죄송합니다"라며 백배사죄(?)한 기억이 난다.
아무튼 후임 지도교수는 아무리 기다려도 배정되지 않았다. 신학과 사회학을 공부하면서 '한국 가족제도'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을 쓰는 것도 버거웠다. 난 고민에 빠졌다.
'이러다가는 10년이 넘어도 공부를 마칠 수 없겠는 걸. 무작정 책만 붙들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박사가 되는 것보다 하루라도 빨리 한국에 돌아가 일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마침내 '박사학위를 포기하고 가겠다'는 생각을 교구장님께 말씀드렸다.
[평화신문, 제743호(2003년 10월 12일), 정리=김원철 기자]
'김수환 추기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형수 최월갑과 희망원 (0) | 2011.02.11 |
---|---|
가톨릭시보사 사장 시절 (0) | 2011.02.11 |
독일 유학생 시절(上) (0) | 2011.02.11 |
교장신부 시절과 1950년대 후반 한국교회 (0) | 2011.02.11 |
내 무릎에 기대어 눈을 감으신 어머니 (0) | 2011.0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