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18] 교장신부 시절과 1950년대 후반 한국교회
자상한 아버지, 때론 짓궂은 친구같은 '인자하신 콧님'
<사진설명>
김천 성의여자상업고등학교 제1회 졸업생들. 나는 젊은 교장이었지만 자상한 아버지, 때로는 짓궂은 장난을 거는 친구처럼 학생들을 대했다.
김천 성의중고교 제자들 가운데 김윤선이란 학생을 특별히 떠올리는 이유는 그가 뭇남성들의 구애를 뿌리치고, 또 내 예상을 뒤엎고 수녀원(예수성심시녀회)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내게서 세례를 받은 윤선이는 미모가 빼어난 데다 여학교 대대장을 맡았을 만큼 똘똘했다. 들리는 얘기로는 남학생들의 연애편지가 툭하면 집에 날아와 곤혹을 치르고, 동네 부잣집에서도 며느리 삼고 싶어 안달했다고 한다.
어느날 윤선이 친구가 내게 "교장신부님, 윤선이 같은 애가 수녀되면 참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수녀가 되면 좋지"라고 맞장구를 쳤지만 나뿐 아니라 어느 누구도 윤선이가 수녀원에 가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독일 유학을 앞두고 성당 유치원 보조교사로 일하는 윤선이를 잠깐 만났는데 그때 뜬금없이 "제가 수녀원에 가면 잘 살 수 있을까요?"라고 물어왔다. 나는 "물론 잘 살 수 있지. 그런데 네 부모님이 허락하시겠냐?"라며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후 교구장님 대신 예수성심시녀회 종신서원 수녀들을 면담하러 간 적이 있다. 그곳에서 수녀가 된 윤선이를 만났다. 제자 수녀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부활신앙에 대한 믿음이 무척 강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윤선이 동기 중에 박희순이란 학생이 있었는데 희순이는 훨씬 앞서 그 수녀회에 입회했다. 박희순(마리요왕) 수녀는 70년대에, 김윤선(마리요셉) 수녀는 80년대 중반에 수녀회 총원장까지 지냈다. 내게는 지금도 꿈많고 웃음많은 여고생들처럼 보이는데 수녀원에서는 벌써 원로 축에 드니 세월이 빠르긴 참 빠르다.
1년 남짓 교장을 맡는 동안 학생들과 격의없이 가깝게 지냈다. 권위를 앞세우지 않고 아버지처럼 자상하게 대하고, 때로는 친구처럼 장난도 걸어서 그랬는지 학생들이 내게 '인자하신 콧님'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내가 웃을 때면 코가 벌렁거린다나….
30대 중반의 젊은 교장이었지만 선생님들과도 별 어려움없이 학교를 꾸려 나갔다. 하지만 가난한 농촌이라 수업료를 제때 못내는 학생들이 많아 난감했다. 학교운영 책임자로서 선생님들을 통해 수업료 납부를 독촉한 적도 있지만 내 속 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오죽하면 자식 학비를 대지 못할까'라는 생각에서 가난한 학생들에게 나름대로 관심을 기울였다.
더 힘들었던 것은 이따금 인근 학교 교장 선생님들과 모임을 갖는 자리였다. 학교와 지역사회에서 존경받는 교장 선생님들이 둘러앉아 음담패설을 주고받는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이분들이 정말 교육자인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실망스러웠다.
한국교회에 소위 '밀가루 신자'라는 말이 생긴 것은 이 무렵이다. 전후 미국 주교회의 원조기구인 가톨릭구제회(NCWC)는 엄청난 구호물자를 배에 실어 한국에 보내주었다.
우리가 전후 폐허 속에서 굶주림의 고통을 그나마 덜 수 있었던 데는 가톨릭구제회 한국사무소 책임자로 와 계시는 안제오르지오 주교님(메리놀외방전교회)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알고 있다. 밀가루·분유·의류품 같은 구호물자는 교구를 거쳐 각 본당에 배급됐는데 내가 사목했던 안동본당과 김천본당에도 이따끔 구호품이 한트럭씩 배달됐다.
성당에서 그런 구호품을 신자, 비신자 가려 나눠준다는 게 우스운 얘기지만 아무래도 성당에 나오는 신자들에게 먼저 돌아간 것은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구호품을 더 탈 요량으로 믿음도 없이 입교해서 신자가 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리 없었다. '밀가루 신자'라는 말은 그래서 생겨났다.
또 이 무렵에 한국교회는 어떤 의미로 소외를 당했다. 기세높은 일본인들이 제2차 세계대전 패망후 정신적 공허와 가난에 시달리자 교황청은 이때를 일본 복음화의 호기로 삼고 인적, 물적 선교자원을 집중 투자했다. 일본 복음화가 아시아 복음화의 단초라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비오 12세 교황님은 세계적 선교회와 수도회에 서한을 띄워 일본에 진출할 것을 권고했을 정도이다.
그 바람에 선교회와 수도회들이 일본에 엄청난 수의 선교사를 파견하느라 한국은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실제로 내가 교구장님을 대신해 어느 수도회에 한국 진출을 요청한 일이 있었는데 "아시아에 새 선교지를 정해 놓아 한국 진출은 곤란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그때 섭섭한 마음과 함께 '한국교회는 스스로 일어서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소외는 오히려 한국교회에 축복이 됐다. 예나 지금이나 일본 교세는 정체돼 있고, 자국 신부보다 외국 수도회 신부가 더 많다. 반대로 한국교회는 한국 신부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으며, 역동적 성장력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이 또한 하느님께서 한국교회에 내려주신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그때까지도 단란한 가정에 대한 향수가 애련히 남아 있었다. 자동차나 기차를 타고 가다 굴뚝에서 저녁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초가가 눈에 띄면 가슴이 설레고, 더러는 부럽기까지 했다.
'오두막 같은 저 집에서 일가족이 화목하게 살고 있겠지. 가족을 위해 하루 종일 땀흘리고 돌아온 아버지는 우물가에서 세수를 하고, 부인은 부엌에서 달그락 달그락거리면서 저녁상을 차리고, 아이들은 마당에서 깔깔대며 뛰어놀고…. 저 집 가장은 얼마나 행복할까.'
사제직을 저버리고 환속(還俗)할 생각을 한 것은 아니다. 석양에 물들어가는 초가, 그곳에서 오순도순 살아가는 가족의 모습은 어린 시절부터 동경(憧憬)한 풍경이다. 내 어릴 적 꿈은 읍내에 가게를 차려서 돈을 번 후 25살쯤 장가를 가서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었다. 그 꿈도 그런 동경에서 비롯된 것인지 모르겠다.
김천본당을 떠나 1956년 독일 유학길에 올랐다. 한국교회가 성장하려면 신부들이 그리스도교 전통이 깊은 나라에 가서 하나라도 더 배워와야 한다는 생각에서 교구장님께 청했더니 흔쾌히 허락해주셨다. 학교는 성베네딕도 왜관수도회에서 맡아주기로 한 덕분에 자유롭게 떠날 수 있었다.
배움에 대한 열정과 여비만 갖고 도착한 독일. 그곳엔 또다른 세계가 기다리고 있었다.
[평화신문, 제741호(2003년 9월 28일), 정리=김원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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