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부터 떠나는가
사람들은 곧잘 내게 '왜 스님이 됐는가?' 하고 묻는다.
신부들과 수녀들도 곧잘 이런 질문을 받을 것이다.
그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세상이 무상해서, 중생을 구하기 위해서,
생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고 결코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뜻에서 출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나대로 살고 싶어서, 내식대로 살고 싶어서 출가를 했다.
자기식대로 사는 것, 나대로 사는 것을 위해서다.
그것이 세상의 윤리권 밖에서 제멋대로 사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만큼 무거운 짐이 내게 주어진 것이다.
어떤 출가의 경우라도 그것은 스스로 선택한 길이다.
선택당한 길이 아니고 선택한 길이다.
적어도 자살에 비길 만큼 철저한 자기 부정을 거쳐 선택한 길이다.
무엇에 대한 부정인가.
비본질적인 것에 대한 부정이다.
철저한 부정 없이 긍정에 도달하기는 어렵다.
철저한 절망을 통해서,
자기 부정을 통해서 인간은 거듭날 수 있고 삶을 재구성할 수 있다.
따라서 종교적 세계에서는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일 수가 없다.
오히려 절망은 거듭날 수 있는 계기이고,
자기 인생을 재구성하기 위한 진통이다.
종교적 체험은 자기 부정을 통해서 얻어지는 대 긍정에 그 의미가 있다.
떠난다는 것은 소극적인 도피가 아니라,
보다 높은 이상을 위한 적극적인 추구이다.
떠난다는 것은 곧 새롭게 만난다는 뜻이기도 하다.
만남이 없다면 떠남도 무의미하다.
출가는 빈 손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크게 버림으로써 크게 얻을 수 있다.
크게 버리지 않고는 결코 크게 얻을 수 없다.
적게 버리면 적게 얻을 수밖에 없다.
어중간하게 버리면 어중간하게 얻는다.
이것이 소유의 법칙이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을 때 온 세상은 다 차지할 수 있다.
무엇인가를 가졌을 때 가진 것만큼 속박을 당한다.
가끔은 자기가 살던 곳을 떠나 볼 일이다.
떠나 보면 평소에 내가 어떻게 살았는가를 객관적인 시각에서 볼 수 있다.
새삼스럽게 자기 존재의 무게를 헤아릴 수 있다.
떠나는 것을 불교적인 용어로 출가(出家) 또는 출진(出塵)이라고 한다.
출가는 집에서 나온다는 뜻이고,
출진은 티끌에서 벗어난다는 것,
곧 욕심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어디로부터 떠나는가.
속박의 굴레에서 떠나고, 무뎌진 타성의 늪에서 떠나고,
집착하는 마음으로부터 떠난다.
모든 인간의 보편적인 출가는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탐욕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자기 그릇 밖의 욕망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둘째는 미움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후세 역사가들이 오늘의 시대를 뭐라고 표현할 것인가.
아마도 증오의 시대라고 기록할 것이다.
서로 믿지 못하고 서로 미워하지 않는가.
어떤 것이 진정한 인간의 조건인가.
그것은 증오가 아니라 사랑이다.
사랑이 충만할 때 그는 비로소 사람이며,
사랑이 메마르고 증오로 가득 찰 때는 그는 사람이 아니다.
셋째는 무지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를 불교적인 용어로 바꾸면 무명이다.
밝음이 없다는 뜻이다.
어떤 이유와 인연으로 출가한 구도자가 되었든,
가장 중요한 것은 순간순간을 사는 일이다.
현재의 이 시간 속에 자신을 불태우는 것, 그것이 곧 출가의 자세이다.
사람이 불행하다는 것은 다른 의미가 아니다.
마지못한 삶,
순간순간을 무의미하게 흘려 버리는 삶,
그것이 불행한 삶이다.
꽃처럼 거듭거듭 피어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늘 새롭게 피어날 수 있어야 한다.
즐겁게 살되 아무렇게나 살지 말아야 한다.
한 개인의 삶은 그 자신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날마다 죽으면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
만약 죽음이 없다면 삶 또한 무의미해질 것이다.
삶의 배후에 죽음이 받쳐주고 있기 때문에 삶이 빛날 수 있다.
우리는 순간순간 다시 죽어가면서 다시 태어난다.
그러니 살 때는 삶에 전력을 기울여 뻐근하게 살아야 하고,
일단 삶이 다하면 미련없이 선뜻 버리고 떠나야 한다.
우리는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 나그네인지
시시로 살펴보아야 한다.
= 법정 스님 글 중에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