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정스님 어록

대나무 옮겨 심은 날 / 법정 스님

문성식 2011. 2. 10. 21:39

    

 

 

대나무 옮겨 심은 날
                                                    / 법정 스님

여기저기에서 꽃 소식이 묻어오는 이 봄철에
내 오두막에서는 일손이 바빴다.
대지가 살아서 꿈틀거리는 이때
내 안에서도 ‘살아있음’의 싹이 움튼다.
잠시 내가 기대고 산 집과 터전이지만
떠나기 전에 무엇인가 심고 가꾸려는 생각의 싹이
내 안에서 움트고 있다.

집 뒤 언덕이 밋밋해서 가시덤불을 걷어내고
30년생 소나무 다섯 그루를 심었다.
바닷가에서 해풍에 시달리며 자란 나무라
수형이 매끄럽지 않고 굴곡이 많아
언덕에 어울린다.
이 소나무들이 크게 자라면 솔바람 소리를 일으킬 것이고,
새들이 날아와 보금자리를 틀고 쉬어갈 것이다.

우리산천에는 소나무가 잘 어울린다.
수백 년 묵은 낙락장송은 나무의 기상도 볼 만하지만
어떤 신령스런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세월의 갖은 풍상을 겪으며
대지에 우람하게 서 있는 고목나무 아래에서
치성을 드리던 우리 선인들의 소박하고 경건한 그 마음씨가
이제는 다 어디로 갔는가.

오두막 둘레가 너무 황량하고 허해서
대나무를 옮겨 심었다.
동해안에 드물지 않게 자생하는 오죽인데
서너 해 지나면 운치 있는 대숲울타리가 될 것이다.
댓잎에 푸슬푸슬 싸락눈이 내리는 소리도 들을 만하지만,
스치고 지나가는 소소한 대나무 바람소리에 귀를 기우리고 있으면
욕심 부릴 일이 없어진다.

대나무를 옮겨 심은 다음날 새벽,
서쪽으로 난 창문에 웬 그림자가 어른거려 문을 열었더니
열사흘 새벽달이 대나무 사이에 걸려 있었다.

산중 개울가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옮겨온 후 가장 뻑뻑한 것은
흐르는 개울 물소리가 없음이다.
소리와 빛 가운데 마음의 평안도 따르게 마련인데,
흐르는 소리가 없으니
어디에 갇힌 듯 답답하기 그지없다.

산 너머 아는 집에서 돌 수각 하나를 실어왔다.
뒤꼍 옹달샘에서 넘치는 물을
대나무 홈대로 끌어 돌 수각위에
한 자쯤 높이로 올려놓았더니,
돌 수각에 물 떨어지는 소리가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수각 가에 나가
홈대에서 졸졸졸 떨어지는 물소리에
귀와 눈을 맡기고 있다.
밤에도 수각 가를 맴돌면서 흐르는 물소리로
내 속뜰을 씻어내고 있다.

너무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은 알맞은 이 흐름을 지켜보면
이런 흐름이야말로 우주의 호흡이며 맥박이 아니겠는가 싶었다.

20세기가 저물면서
인류는 초고속 장치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다.
컴퓨터가 토해내는 초고속정보 앞에서
삶의 양식이 크게 바뀌고 있다.

근대 과학의 모토는 스피드였다.
‘빠르게, 더 빠르게, 좀 더 빠르게’
그 결과가 바로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생활의 모습이다.
온갖 통신수단과 운송수단들은
좀더 빠르게를 맹신하고 있다.
우리는 편리해진 것만큼 잃는 것도 많다.
속도에 휩쓸린 나머지
무엇보다도 차분히 생각하면서 음미하고 누리는
여유가 사라졌다.

그러나 인류가 발명한 연장들이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을 위한 것이라면
좀 더 빠르게 대신
‘안전하게, 더 안전하게, 좀더 안전하게’가 되어야 한다.
도시와 시골을 가릴 것 없이 빠른 것 앞에서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무참히 희생되고 있는가.

곰곰이 생각해보라.
어째서, 무엇을 위해 우리가 이렇게 빠르게 쫓겨 가야 하는가를,
수단과 목적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생명을 최고 가치로 여기는 문화는 유용한 것이지만,
생명을 한낱 수단으로 다루는 것은
문화가 아니라 재앙이다.

올림픽 슬로건은 ‘더 높이, 더 멀리, 더 빨리’라고 한다.
얼핏 들으면 그럴듯하지만
이런 구호야말로 얼마나 비인간적인 것인가를 직시해야 한다.

더 높이, 더 멀리, 더 빨리를 위해
멀쩡한 젊음들이 피를 말리고 뼈를 깎으면서 환호하고 좌절한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해야 하는지,
사람이 참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묻게 한다.

묵은 기록을 깨뜨리고
오로지 새로운 기록을 세우기 위한 그와 같은 행위가
과연 스포츠 정신에 합당한 것인가.
그 ‘높이’와 ‘멀리’와 ‘빨리’ 때문에
인간이 보다 빨리 망가지는 것은 아닐까.

사람은 쇠붙이로 된 기계가 아니다.
감성과 이성이 있고
아름다움과 가치를 추구하는 독특한 생물이다.
이와 같은 사람이
어떻게 더 높이, 더 멀리, 더 빨리만 뛸 수 있단 말인가.

너무 뛰지 말라.
조급히 서두르지 말라.
우리가 가야 할 곳은 그 어디도 아닌
우리들 자신의 자리다.
시작도 자기 자신으로부터 내디뎠듯이
우리가 마침내 도달해야 할 곳도 자기 자신의 자리다.

나는 요즘에 와서 나 자신의 성급한 버릇을 다스리기 위해
좀 더 느긋하고 느슨한 쪽으로
생활습관을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덩달아 시류에 쫓기지 않고
주어진 여건 아래서 느긋하게 삶을 즐기려고 한다.

그래서 가능한 한,
더 높이는 더 낮게로,
더 멀리는 더 가까이로,
더 빨리는 더 천천히 로 바꾸려고 한다.

어느 날 시속 백 킬로미터 구간에서
백 25킬로미터로 과속했다고 딱지가 날아왔다.
고속도로에 설치된 카메라가 찍은 것이다.
나는 이 통지서를 받고 순간 당황했지만
내 생활 개선을 위해 친절한 충고로 받아들였다.

고속도로와 국도 상에서 이 나라의 교통경찰관이
총(스피드 건)을 겨누고 과속을 단속하는
살벌하고 야비한 단속 태도에 견주면
교통안전과 그 질서를 위해
무인카메라 쪽에 훨씬 신뢰감이 간다.

‘절대감속’이란 명령조의 표지판을 보고는
선뜻 속도를 줄이려 하지 않던 운전자도
‘제발 좀 천천히’라고 달래듯 써 놓은 표지판 앞에서는
속도를 줄이지 않을 수 없다.
이성보다 감성이
인간행동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증거일까.

새로 옮겨 심은 소나무에 아침부터 박새들이 찾아와
이 가지 저 가지로 폴폴 날아다니고 있다.
바다 갈매기 한 쌍이 내 작업에 준공검사라도 왔는지
돌 수각 위를 맴돌다가 날아갔다.
댓잎에는 아침 이슬이 구슬처럼 맺혀 있다.

 

 

     

 

     

 
         

     一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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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촌 불 원문보기   글쓴이 : 목우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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