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창조(아담의 창조)>>
미켈란젤로 (Michelangelo Buonarroti
1475.3.6∼1564.2.18)
이탈리아의 화가·조각가·건축가·시인. 카프레세 출생. 어려서부터 그림에 뛰어나, 양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13세 때에 기를란다요(Ghirlandaio)에게 입문하였고, 이듬해 조각가 베르톨도(Bertoldo di
Giovanni:1420?∼91)에게로 옮겨 도나텔로의 작품을 배우면서, 메디치가(家)의 고대 조각을 연구하였다. 그 때 로렌초 일
마니피코(Lorenzo il Magnifico:1449∼92)에게 인정받아, 그의 집에서 체류하게 되어, 인문 학자들과도 접촉, 고전문학이나
신구약 성서를 탐독함과 동시에, 조각을 위한 인체 해부에도 전념하였다. 블랑카치 성당 마사치오의 벽화 앞에서 토레지아니와 논쟁하다가 코뼈가
부러진 것도 그 때의 일이며, 이때의 작품으로는 피렌체의 카사 보나로티에 남아 있는 도나텔로풍의 [스칼라의 성모]와 고전적 격조를 보인
[켄타우르스족과 라피타이족의 싸움]의 부조(浮彫)가 있다. 1492년 메디치 가의 로렌초가 죽은 후, 프랑스군이 침입하자 볼로냐로 피난, 거기서
J.d.퀘르치아의 조각도 배웠다. 96년 로마로 나올 기회를 얻어 고전 예술에 접촉, 조상 [바쿠스](피렌체 바르젤로 미술관 소장)를 제작,
바티칸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에 있는 [피에타:Pieta]를 프랑스 추기경의 의뢰로 완성한 것은 99년경이다. 1501년 피렌체로 돌아와,
시청으로부터 [다비드]의 대리석상을 부탁 받아 1504년에 완성하였다. 이 거상은 시청 문 앞에 놓여 피렌체 자치 도시를 지키는 상징으로
간직되었다(현재는 아카데미아미술관 소장). 이 무렵의 작품으로 성모자(聖母子)를 다룬 2개의 원형 부조(런던 왕립 미술아카데미와 바르젤로 미술관
소장)와 원형화 [성가족](우피치미술관)이 있다. 1504년 피렌체 시청에 [카시나의 싸움:Battle of Cascina]의 벽화를 의뢰
받아, 건너편 벽면에 [안기리의 기마전]을 그리게 되어 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경쟁하였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이듬해 율리우스 2세에게 불려
로마로 가서, 그 기념 묘비를 만들게 되었다. 그런데 브라만테가 산 피에트로 대성당의 개축에 착수한 이래, 율리우스 2세가 냉담해지자, 이에
성이 난 그는 피렌체로 돌아와 다시 [카시나의 싸움] 제작에 전념하였다. 1506년 레오나르도도 화고(畵稿)를 완성, 벽화를 착수하였으나, 쌍방
모두 진전이 없던 중에 중단되고 말았다. 지금은 화고도 없어지고, 모사화(模寫畵)가 남아 있을 뿐이다. 1506년 말 미켈란젤로는 다시 율리우스
2세에게 불려가, 볼로냐에서 화해하고, 1508년 시스티나 대성당의 천장화(天障畵)를 위촉받았다. 벽화에는 경험이 없다고 사퇴하였으나, 허용되지
않아 적대자 브라만테의 간계를 물리치면서 제작을 시작하였다. 일은 진척되지 않고, 보수도 지불되지 않고, 형제들로부터는 금전을 강요당하고,
교황과도 충돌하는 악조건 하에서 12년에 마침내 완성하였다. [천지 창조],[인간의 타락],[노아 이야기]의 3장 9화면을 구약 내용의 순서와는
반대로 그리기 시작, 그 화면 사이에 예언자나 천사(天使)나 역사(力士)를 배치하고, 복잡한 모습을 부여하여, 묘사된 대리석상 같은 인간군상을
부각하였다. 천정화 완성의 다음해에 율리우스 2세가 사망하였기 때문에, 현안의 묘비를 실현시키게 되어, 13∼18년에 묘비의 중심조상(彫像)이
될 [모세 Moses]의 거상(巨像)과 부속 인물인 [노예]를 만들었으나, 메디치가 출신의 교황 레오 10세가 새로이 피렌체의 산 로렌초성당의
파사드의 건축을 강요하였기 때문에, 그 후 율리우스 2세의 묘비는 중단되었다. 교황이 갈릴 때마다 계약이 수정되어 마침내 42년의 제5회 째의
계약에서는 최초의 거대한 구상과는 달리, 앞서 말한 [모세]를 중심으로 새로이 만든 [레아]와 [라헬]의 두 협시(脇侍)가 산 피에트로 인
빈코리성당의 쓸쓸한 묘비를 구성하고 있을 뿐이다. 1520년 피렌체의 메디치가 묘묘(廟墓)의 제작을 의뢰 받아, 24년에 착수, 10년간이나
걸렸으나 끝내 미완성으로 끝났다. 그러나 이 묘묘를 구성하는 로렌초와 줄리아노의 조상과 그 각각의 아래의 관(棺)에 누워 있는
[아침],[저녁],[낮],[밤]의 네 우의상(寓意像), 그 중 [저녁]과 [낮]의 두 남성상(미완성)과 [성모자상](미완성)은 르네상스 조각의
걸작으로 꼽힌다. 그 사이 산 로렌초성당 부속의 라우렌치아나 도서관의 건축에 종사하였고, 29년에는 독일의 칼 5세군(軍)의 피렌체 포위를
맞아, 방위위원으로서 축성에도 임하였다. 그 후 메디치가(家)의 전제군주 알렉산드로와 반목하여, 메디치가 묘묘를 미완성의 상태로 둔 채 34년에
피렌체와 영원히 결별하여 로마로 옮겼다. 그 해 새 교황 바오로 3세로부터 시스티나 성당의 안쪽 벽을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고 다음 해부터 혼자
착수, 고생 끝에 6년 후인 41년에 [최후의 심판:Last Judgment]을 완성하였다. 그리스도가 ‘성난 그리스도’로서 거인처럼 군림하여,
천국에 오르는 자와 지옥으로 떨어지는 자가 좌우로 크게 회전하는 군상을 지배하고 있다. 그 구도(構圖)와 동적 표현은 르네상스의 고전 양식을
해체하여 격정적인 바로크 양식에의 추이(推移)를 보였다. 그 제작 중, 독신이었던 그가 교양 높은 페스카라공(公) 미망인 비토리아 코론나를 알게
되어 영혼의 위로를 받게 된 것은 유명한 에피소드인데, 이 부인도 타계하여, 그는 다시 고독해졌다. 42년에는 바티칸궁의 파올리나성당의 장식도
위촉받아 [바울로의 개종]과 [베드로의 책형(刑)]을 50년에 완성하였다. 노령에도 불구하고 캄피돌리오 광장을 설계하기도 하고, 파라초
파르네제의 건축에 종사하기도 하는 등 끊임없이 활동하여, 47년에는 산 피에트로 대성당의 조영 주임이 되어 57년 대원개(大圓蓋)의 목제 모델을
완성하였다. 그 사이에도 [피에타:Pieta]의 군상을 3체(體)(피렌체 대성당, 팔레스토리나, 론다니니)나 만들었고, 어느 것이나 미완성으로
끝나기는 하였지만, 힘없이 쓰러지는 그리스도를 성모들이 슬피 부축하는 군상의 생생한 끌 자국에는 끝없는 고뇌의 영혼이 영원의 휴식을 추구하는 것
같은 그의 만년의 심경이 엿보여 비장하기까지 하다. 그 무렵 로마에도 동란이 일어나, 고향 피렌체에의 향수에 젖으면서, 병을 얻어 르네상스로부터
초기 바로크에 이르는 89세의 오랜 예술적 생애를 마쳤다. 메디치가(家)나 교황에의 봉사를 끝없이 요구 당하면서도 언제나 자유와 정의를 추구하여
싸운 그의 괴로운 심경은 남겨진 편지와 시에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예술은 모두 이와 같은 인생의 고뇌와 사회의 부정과 대결한 분개와 우울과
신앙의 미적 형상화이며, 더욱이 그것은 초인적인 억센 제작력에 의해 달성된 것이다
이야기 이탈리아사 中
미켈란젤로는
1474년 3월 피렌체 근교의 작은 마을인 카프레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미켈란젤로가 태어났을 때 이 도시의 장관을 역임하고 있었다. 공화국
중급관리인 그는 솔직하고 소심하면서 자존심만 높은 전형적인 공무원이었다. 어머니는 아직 어린 자식들을 다섯 명이나 남겨놓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생활은 풍족한 편은 아니었고 아버지의 임기가 끝난 뒤 일가는 피렌체로 돌아왔다. 차남인 미켈란젤로는 미술에 흥미를 느껴서 그림만 그리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한테서 가끔 꾸중을 듣기도 하고 얻어맞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천재성을 이해하기는커녕 화가와 페인트공, 조각가와 석공을
전혀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런 직업을 가지고 싶어하는 아들의 썩은 근성을 두들겨 패서라도 고치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너무 고집이 세서 아무리 야단을 치고 때려도 미술가가 되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너무 고집이 세서 아무리 야단을
치고 때려도 미술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아버지 쪽이 손을 들고 피렌체에서 제일 유명한 화가였던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공방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했다. 당시에는 공방에서 그림뿐 아니라 조각 건축에서부터 금은 세공과 도자기까지 분야를 가리지 않고 모든 종류를 다루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미켈란젤로도 여기에서 미술공예전반에 걸쳐서 기초능력을 익혔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스승과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던 데다가 조각에 더 마음이 끌렸기 때문에 미켈란젤로는 공방에 들어간지 12년도 채 되지 않아서 그곳을 나와 도나텔로의 제자이자 조각가인
베르톨로 밑에서 수업을 쌓게 되었다. 베르톨로가 이른바 '메디치 정원' 의 관리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소년은 그곳에서 마음이 내킬 때까지 고대의
조각상을 연구할 수가 있었고 거기에서 '위대한 사람' 의 눈에 띄게 되었던 것이다. 메디치 저택에서 호출을 받은 부오나로티의 집은 온통
야단법석이었다. 난 절대로 안간다. 누가 아들을 돌이나 깎는 사람으로 만들 줄 알고 하며 난리를 피워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골치 아프게 했던
미켈란젤로의 아버지도 공화국 최고의 권력자 앞에 서게 되자 싱거울 정도로 얌전하게 그의 뜻에 따랐다. 막상 아들이 메디치 가의 자식과 같은
대우를 받는다는 것과 자신에게 직장까지 마련해 준다는 것을 알게된 그는 잔뜩 흥분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갔다. 소년 미켈란젤로는 그날부터
메디치가의 사람이 되었다.
출처 :너와집 나그네 원문보기▶ 글쓴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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