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교구 > 혜화동 성당
간략설명 | 서울교구의 세 번째 본당으로 근대적 건축미를 간직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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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번주소 | 서울시 종로구 혜화동 58-2 |
도로주소 | 서울시 종로구 창경궁로 288 |
전화번호 | (02)764-0221 |
팩스번호 | (02)3672-1197 |
홈페이지 | http://www.hyehwa.org |
문화정보 |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230호 |
혜화동 본당이 설립되기 전 동소문(東小門) 지역의 신자들은 1909년 백동(柏洞, 현 혜화동)에 정착한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의 성당 주일미사에 참례하거나, 1918년경에 설정된 동소문 밖 공소의 공소예절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27년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이 함경남도 덕원(德源)으로 이전하게 되자 서울 대목구장 뮈텔(G.-C.-M. Mutel, 閔德孝) 주교는 코친차이나(월남 지역) 교구의 르 쿠브르(Le Couvre) 신부가 희사한 돈으로 백동의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 건물을 매입하여 본당 설립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1927년 4월 29일 시잘레(P. Chizallet, 池士元) 베드로 신부가 초대주임으로 임명되면서, 서울 대목구의 세 번째 본당인 백동 본당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베네딕도회가 아직 완전하게 철수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시잘레 신부는 서울 대목구 주교관에 머물다가 10월 18일에야 본당에 부임할 수 있었다. 그는 성당을 따로 건립하지 않고 옛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 성당을 사용하였으며, 사제관은 사우어(B. Sauer, 辛上院) 주교가 사용하던 거실을 활용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1929년 초에는 남자 신자 20여 명이 모여 ‘혜화동 청년 친우회’를 창설하고 자선 사업과 전교 사업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이 혜화동 본당의 기반이 확고해지면서 4대 주임 생제(P. Singer, 成載德) 베드로 신부 재임기인 1942년 5월에는 첫 번째 자본당(子本堂)인 제기동 본당이 설립 · 분할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유아 영세를 받은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철저히 주입시키기 위해 주일학교 상급 학년을 대상으로 영세 허원 재신식(再新式)을 실시하였고, 1943년 12월에는 ‘성가 소비녀회’를 설립하였다. 이어 1945년 5월에는 두 번째 자본당인 미아리(현 길음동) 본당을 분할하였고, 1946년 6월에는 제1회 성체 거동 행사를 거행하였으며, 12월에는 청년회를 지도하던 조창희(趙昌熙, 베네딕도) 보좌 신부가 본당 청년들의 사목을 위해 “청년 미사”를 편찬하였다. 1947년경에는 본당을 보다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자문 기구인 ‘본당 유지 위원회’를 조직하였고, 같은 해에 신자 의사들의 친목 단체인 ‘가톨릭 의사회’를 발족하여 전교뿐만 아니라 생명이 위독한 환자들에게 대세를 주는 등의 봉사 활동을 전개하였다.
1950년 9월 서울이 수복된 후 11월에 7대 주임으로 정원진(鄭元鎭) 루카 신부가 부임하면서 한국인 신부들이 본당 사목을 맡기 시작하였다. 1952년 4월에는 전쟁으로 폐쇄되었던 혜화유치원을 다시 개원하였고, 본당 설립 25주년 은경축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성당 건물이 낡고 협소하여 많은 신자들을 수용할 수 없게 되자, 1954년 3월에는 ‘신축 성당 건립 기성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으로 성당 신축 계획을 추진하였다.
이후 1955년 4월에 종로 본당이 설립되어 종로 3가 지역을 이관하였고, 10월에는 세 번째 자본당인 돈암동 본당을 분할하였으며, 1956년 6월에는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도봉리 산 66의 1번지 임야를 매입하여 본당 묘원으로 조성하였다. 그리고 1958년 6월에 성당 신축 정초식을 거행하면서 본당 주보성인을 기존의 ‘성 베네딕도’와 더불어 ‘성녀 소화 데레사’로 정하였고, 1959년 2월에는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방학리 산 65의 1번지를 매입한 뒤 묘원 사용 인가를 받았다.
이어 9대 주임 류수철(柳秀徹) 도미니코 신부 재임기인 1963년 5월에는 회장단을 구성하였다가 이듬해 3월 운영 위원회로 개칭하였고, 1965년 8월에는 경기도 포천군 소흘면 이동교리 산 14-1 야산에 묘원을 조성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에는 유치원 본당(3층)을 신축하였고, 11월에는 수녀원(2층)을 완공하였으며, 사제관도 2층으로 증축하였다.
10대 주임 이계중(李啓重) 세례자 요한 신부 재임기인 1970년에는 강당(2층)을 증축하였고, 1972년에는 성모상 건립 및 조경 공사를 완료하는 등 성당 주변 환경을 단장하였다. 그리고 11대 주임 박귀훈(朴貴勳) 요한 신부 재임기인 1973년 8월에는 기존의 운영 위원회를 ‘사목 위원회’로 개편하였고, 1975년 5월에는 네 번째 자본당인 성북동 본당을 설립 · 분할하였다. 12대 주임 박희봉(朴喜奉) 이시도로 신부 재임기인 1975년 12월에는 새 사제관(2층)의 축복식을 거행한 뒤 ‘순교 복자 79위 시복 50주년 기념 사제관’으로 명명하였고, 1976년 11월에는 본당 설립 50주년을 기념하여 자축 기념 음악회를 개최하였다. 이어 1977년 1월에는 본당의 역사를 담은 “백동 반세기”를 간행하였고, 7월에는 ‘103위 순교 복자 성화’를 제작하였다. 또한 1979년 7월에는 성당 제대 후면 벽을 도자(陶磁)로 장식하였으며, 1980년 3월에는 성당 오른쪽 유리창을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하였다.
한편 1982년 서울시의 지하철 4호선 공사 계획에 따라 본당의 대지 일부가 수용되어 부득이 성서 · 성물 보급소, 숙직실 등이 철거되자, 본당에서는 교육관을 신축하기로 결정하고 동성중고등학교에서 필요한 대지 일부를 확보하였다. 교육관 공사는 9월의 기공식을 거쳐, 1983년 5월에 김수환(金壽煥, 스테파노) 추기경의 집전으로 ‘준공 감사 미사’를 봉헌하였다.
14대 주임 이상훈(李相勳) 리노 신부 재임기인 1985년 10월에는 동성중고등학교 운동장에서 체육 대회와 백일장을 겸한 ‘백동제’(柏洞祭)를 개최하여 주일학교 학생들 간의 친교와 일치를 도모하였고, 청년 연합회 주최로 제1회 ‘백동 문화제’(柏洞文化祭)를 개최하여 청년들의 공동체 형성과 의식 계발 및 청년 문화 개발에도 노력하였다. 1987년 10월에는 본당 설립 60주년을 기념하여 6월에 설치된 파이프 오르간 축성식과 기념 미사 등을 거행하였고, “백동 60년사” 발간 및 60주년 기념 자축 음악제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1989년 11월에는 소규모의 전례 행사, 교리 강좌 등을 위해서 지하 성당(현 소화 성당)을 완공하였고, 1991년에는 성당 왼쪽 유리창을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하였다.
16대 주임 염수의(廉洙義) 요셉 신부 재임기인 1996년 4월에는 소화 성당 성체 안치소에 ‘게쎄마니의 기도’라는 설치 미술 작품을 완성하였고, 11월에는 성당 앞 계단에 새로 한국인 성모상과 요셉상을 제작하여 안치하였으며, 12월에는 본당 소장의 성미술을 도록으로 엮은 “우리와 함께 머무소서”를 제작하였다. 1997년 3월에는 정문 오른쪽에 성물 보급소(2층)를 완공하여 ‘분도의 집’으로 명명하였고, 9월에는 “백동 70년사”를 간행하였으며, 10월에는 본당 설립 70주년을 기념하여 기념 미사, 체육 대회, 연주회 등 다채로운 행사를 개최하였다.
2006년 3월 2일에 서울에서 첫 번째로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230호로 지정된 혜화동 성당은 본당 설립 당시 성당이 아니라, 1960년 5월에 새로 지은 건물이다. 문화재청은 아직 50살도 되지 않은 혜화동 성당을 등록문화재로 지정한 배경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붉은 벽돌조 종탑의 대비를 통한 균형미, 비대칭 입면구성 등은 당시 고딕 양식으로 정형화되어 있던 성당 건축의 틀을 깨는 것이다. 1960년대 이후 건축되는 근대적 성당 건축의 모형이 되는 기념비적 건물이다. 또한 조각가 김세중의 부조 작품으로도 유명하며, 종교사적ㆍ건축사적ㆍ미술사적 가치가 있다.”
한마디로 한국교회 건축사에 새로운 획을 긋는 기념비적 성당이라는 설명이다. 오늘날 세워지고 있는 다른 성당들과 비교해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근대적 건축미를 자랑하는 혜화동 성당이 1960년에 세워진 건물이라고 하면 다들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성당 건립은 1950년대 후반 서울대학교 미대 학장으로 재직 중이던 장발 루도비코(張勃, 1901-2001년, 장면 전 국무총리의 동생) 화백의 지휘로 이뤄졌다. 설계를 맡은 건축가는 이희태 요한(李喜泰, 1925-1981년) 씨로 ‘절두산 순교 기념관’의 설계자이기도 하다. 그는 기존 성당의 개념을 거부하고 자신의 개성을 살려나간 독창적인 건축가였다.
성당을 정면에서 바라볼 때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현관 위에 있는 ‘최후의 심판도’ 화강석 부조이다. 1961년 김세중 프란치스코(金世中, 1928-1986년) 서울대 교수가 원도를 작성하고 장기은(張基殷, 1922-1961년) 교수와 함께 조각한 이 부조에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로라”(요한 14,6), “천지는 변하려니와 내 말은 변치 아니하리라”(루카 21,33)는 성경 구절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4명의 복음서 저자 상징이 좌우에 자리 잡고 있다.
혜화동 성당에서 꼼꼼하게 살펴봐야 할 성미술품은 한둘이 아니다. 일일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대작만 꼽아도 이남규 루카(李南圭, 1931-1993년) 교수의 유리화 29점이 있고, 권순형(權純亨) 프란치스코 교수가 ‘성사’라는 주제로 제작한 제대 뒤편 도자 벽화가 있다. 김세중 교수가 1958년에 청녹색 대리석으로 제작한 제대는 당시 본당 사목회장이었던 장면 요한(張勉, 1899-1966년) 전 국무총리가 본당에 기증한 작품이다.
성당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부활 성수대도 빼놓을 수 없다. 이종상(李鍾祥) 요셉 화백이 1994년에 제작한 성수대 위에 임영선(林永善) 교수가 제작한 예수 부활상을 얹은 합작품으로, 상반신 예수 그리스도가 가시관을 쓴 채 못 자국이 선명한 두 손을 포개 얹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밖에도 최종태(崔鍾泰) 요셉 교수, 최봉자 레지나 수녀 등 내로라하는 성미술 작가들의 작품이 즐비한 ‘교회 미술의 보물창고’가 혜화동 성당이다. 전문적 식견은 없더라도 차분한 마음과 여유로운 시간을 갖고 하나하나 음미한다면 작품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 숨결을 느끼는 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또한 혜화동 성당은 젊음과 문화의 거리인 대학로와 붙어있는 만큼 젊은이들과 함께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평화신문, 2007년 10월 14일, 남정률 기자의 기사를 중심으로 편집(최종수정 2011년 11월 24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모바일용 요약 설명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혜화동 본당 설립 전 동소문 지역의 신자들은 1909년 백동(현 혜화동)에 정착한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의 주일미사에 참례하거나, 1918년경 설정된 동소문 밖 공소의 공소예절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다가 1927년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이 함경남도 덕원으로 이전하게 되자 서울 대목구장 뮈텔 주교는 수도원 건물을 매입하여 1927년 4월 시잘레 신부를 초대주임으로 임명하고 서울 대목구의 세 번째 본당인 백동 본당(현 혜화동 본당)을 설립했습니다.
1929년 서기창 신부는 옛 수도원 성당을 백동으로 이전한 소신학교에 양보하고, 대신 수도원 부속 건물이던 목공소를 성당으로 개조하여 라리보 주교의 집전으로 봉헌식을 거행하고 주보를 ‘성 베네딕도’로 정했습니다. 1937년 오기선 신부는 ‘어린이들에게 우리 말과 글을 배우게 하여 민족의 얼을 심겠다’는 취지로 ‘혜화유치원’을 설립했습니다. 1950년 9월 서울 수복 후 부임한 정원진 신부는 1958년 성당 신축 정초식을 거행하면서 본당 주보성인을 기존의 ‘성 베네딕도’와 더불어 ‘성녀 소화 데레사’로 정했습니다. 본당 신축에 힘을 쏟은 혜화동 성당은 1960년 장금구 신부 때 성당과 사제관(1층)을 완공하여 노기남 주교의 집전으로 봉헌식을 거행했습니다.
1975년 박희봉 신부는 새 사제관(2층)의 축복식을 거행했고, 1977년 “백동 반세기”를 간행했으며, ‘103위 순교 복자 성화’도 제작했습니다. 1979년에는 성당 제대 뒤에 도자기 벽화를 제작했고, 이듬해 성당 오른쪽 유리창을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했습니다. 1982년 서울시의 지하철 4호선 공사 계획에 따라 본당의 대지 일부가 수용되어 몇몇 건물이 철거되자 교육관 신축을 결정하여 1983년 준공했습니다. 1989년 이상훈 신부는 소규모의 전례 행사와 교리 강좌 등을 위해 지하 성당(현 소화 성당)을 완공하였고, 1991년 성당 왼쪽 유리창을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했습니다.
1993년 박순재 신부는 종탑에 청동 십자가를 설치했고, 지하 성당을 보수하여 정식으로 ‘소화 성당’으로 명명했습니다. 1994년에는 강당을 2층에서 4층으로 증축하여 ‘백동관’으로 명명했습니다. 1996년 염수의 신부 때는 소화 성당 내에 ‘게쎄마니의 기도’라는 설치미술 작품을 완성했고, 성당 앞 계단에 새로 한국인 성모상과 요셉상을 제작하여 안치했으며, 본당 소장 성미술품 도록인 “우리와 함께 머무소서”를 제작했습니다. 1997년에는 정문 오른쪽에 성물 보급소(2층)를 완공하여 ‘분도의 집’으로 명명했고, 9월에는 “백동 70년사”를 간행했습니다.
2006년 3월 서울에서 첫 번째로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230호로 지정된 혜화동 성당은 1960년대 이후 건축되는 성당 건축의 모형으로서 근대적 건축미를 지닌 기념비적 건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또한 성당 건립을 위해 가톨릭 예술가들이 대거 참여하여 한국 교회미술 발전의 계기가 되었으며, ‘교회미술의 보물창고’라 할 만큼 다양한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젊음과 문화의 거리인 대학로와 붙어있는 혜화동 성당은 젊은이들과 함께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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