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제일선원 경남하동 지리산 칠불사
동국제일 선원 칠불사 운상선원 입니다.
지리산 깊고 깊은 반야봉 및 산자락에 위치한 칠불사 해발 800미터 이상에 위치하여 운해가 드리울때면 구름위에 있는 선원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 운상선원입니다.
김수로왕의 일곱왕자가 수도하여 성불하여 붙여진 이름 지리산 칠불사 입니다.
문수보살이 상주하는 곳이라고 하는 문수보살 기도처로도 유명한 칠불사입니다.
不是一番寒徹骨(불시일번한철골·차가움이 한번 뼈속을 사무치지 않았다면)
爭得梅花撲鼻香(쟁득매화박비향·어찌 매화꽃이 코 찌르는 짙은 향기 얻으리)
得樹攀枝未足貴(득수반지미족귀·나뭇가지에 매달리는 것 귀한 일 아니니)
懸崖撒手丈夫兒(현애살수장부아·천길 벼랑에 매달린 손을 놓아야 대장부라 하리)
칠불사
칠불사(七佛寺)는 가야불교의 발상지이며,
문수보살의 상주도량이며, 동국제일선원이다.
또한 해동계맥을 수립한 율 도량이고, 동다를 증흥한 차도량미여,
거문고를 전승한 현악의 도량이기도 하다.
칠불사는 지리산의 중심봉인 반야봉(1,732m)의 남쪽 800m 고지에 위치하고 있다. 신라말 도선국사가 지은『옥룡자결』(玉龍子訣)에 의하면 지리산 칠불사는 와우형(臥牛形)의 명당으로, 제일의 양택이라고 했다. 임진란에 퇴락한 가람을 서산대사와 부휴대사가 중수하였다. 그 후 1800년에 큰 화재가 나서 보광전, 약사전, 미타전, 벽안당(亞字房), 칠불각, 설선당, 보설루, 요사 등 10여 동의 건물이 전소되었는데 대은율사와 금담율사에 의해 모두 복구되었다. 그러나 6·25전란으로 인해 1951년 1월경에 전소되었다. 27년간 폐허로 남아 있던 것을 제월통광(霽月通光) 스님이 1978년부터 15여년에 걸쳐 대웅전, 문수전, 아자방, 운상원, 설선당, 보설루, 원음각, 요사, 영지, 일주문 등을 복원 중창했고, 이 외에 선다원, 사적비, 다신탑비 등을 세웠다.
가야불교의 발상지
칠불사는 1세기경에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그들의 외숙인 범승(梵僧) 장유보옥(長遊寶玉) 화상(和尙)을 따라와 이곳에서 동시 성불한 것을 기념하여 김수로(金首露) 왕이 국력으로 창건한 사찰로서, 가야불교의 발상지이다. 『삼국유사』가락국기에 의하면 수로왕은 서기 42년에 화생(化生)하였으며, 남해바다를 통해 가락국에 온 인도 황하 상류의 태양왕조인 아유다국 허황옥 공주를 왕비로 맞아 10남 2녀를 두었다. 그 중 장남은 왕위를 계승하였고, 둘째와 셋째 왕자는 어머니의 성을 이어 받아 김해 허씨(許氏)의 시조가 되었으며, 그 나머지 일곱 왕자는 외숙인 장유화상을 따라 출가하였다. 그들은 장유화상의 가르침을 받으며 가야산에서 3년간 수도하다가 의령 수도산과 사천 와룡산 등을 거쳐 서기 101년에 이곳 지리산 반야봉 아래에 운상원(雲上院)을 짓고 정진한지 2년 만에 모두 성불하였다. 칠불의 명호는 금왕광불(金王光佛), 금왕당불(金王幢佛), 금왕상불(金王相佛), 금왕행불(金王行佛), 금왕향불(金王香佛), 금왕성불(金王性佛), 금왕공불(金王空佛)이다. 이 칠왕자의 성불로 인하여 칠불사라 하였다. 이 외에 칠불사 경내에 있는 영지(影池)와 칠불사 인근 지역에 남아있는 명칭 등을 통해서도 칠불사가 가야불교의 성지임을 알 수 있다. 칠불사의 영지는 칠왕자의 그림자가 나타났다는 연못이다. 수로왕 부부가 출가한 일곱 왕자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와서 왕자를 보려 하자 장유화상은 “왕자들은 이미 출가하여 수도하는 몸이라 결코 상면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꼭 보고 싶으면 절 밑에 연못을 만들어 물 속을 보면 왕자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장유화상의 말에 따라 김수로왕 부부는 연못을 만들어 놓고 그 연못을 보니 과연 일곱 왕자들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를 보고 수로왕 부부는 환희심을 느끼고 돌아갔다고 한다. 그로 인하여 이 연못을 영지라 부르게 되었다. 또 칠불사 인근 마을의 명칭인 범왕(凡王)마을과 대비마을도 칠불사가 가야불교의 성지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범왕리라는 명칭은 김수로왕이 칠왕자를 만나기 위하여 임시 궁궐을 짓고 머무른 데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또 화개면 정금리의 대비마을(大妃洞)은 허황후가 아들을 만나기 위하여 머물렀다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해동 계맥의 발상지
해동계맥은 조선 순조 26년(1826) 병술(丙戌)에 대은낭오(大隱朗悟) 선사가 지리산 칠불사에서 『범망경』에 의하여 서상수계(瑞祥受戒)한 계맥이다. 『범망경』에 의하면 천리 안에 계를 줄 스승이 없으면 부처님께 기도하여 서상을 받으면 계체가 성립되어 부처님께 계를 받은 것이 된다고 했다. 전라남도 영암 도갑사에서 주석하던 대은선사가 서상계(瑞祥戒)를 받기 위하여 스승인 금담(錦潭)스님과 함께 칠불사로 와서 『범망경』에 의지하여 용맹 기도를 하는데, 대웅전에 모셔놓은 부처님 미간 백호로부터 한 줄기 상서러운 광명이 나와 대은스님의 정수리에 비추었다. 이렇게 해서 서상계를 받고, 스승인 금담스님은 제자인 대은스님으로부터 그 서상계를 전해 받았다. 그 계맥은 대은낭오(大隱朗悟), 금담보명(金潭普明), 초의의순(草衣意恂), 범해각안(梵海覺岸), 선곡율사(禪谷律師), 용성진종(龍城震鐘) 등으로 전해졌다.
문수기도도량
지리산은 예로부터 문수보살이 일만 권속을 거느리고 상주하는 곳이다. 지리산이라는 이름도 문수보살의 갖춘 이름인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師利菩薩)에서 ‘지(智)’자와 ‘리(利)’자를 각각 따온 것이다. 지리산은 상봉인 천왕봉과 주봉인 반야봉으로 연결되는데, 반야봉은 곧 문수보살의 대지혜를 상징한다. 이와같이 지리산은 문수도량인데, 특히 칠불사는 생문수(生文殊) 도량으로서, 칠불사에서 참선을 하거나 기도를 하면 문수보살이 근기에 맞추어 화현하여 기도를 성취시켜 주고, 또한 공부인을 보살펴서 견성오도케 하는 영험있는 도량이다.
동국제일선원
지리산 칠불사는 아자방 선원과 운상선원이 있어 무수한 도승을 배출한 동국제일선원이다.
아자방은 신라 효공왕 당시 담공(曇空)선사가 축조한 선원으로서, 방안 네 귀퉁이에 50cm씩 높은 곳은 좌선처이고 가운데 십자 모양의 낮은 곳은 경행처이다. 담공선사의 축조 당시에는 한번 불을 지피면 100일간 따뜻하였으므로 신비한 온돌방이라 하여 세계 건축사에 기록되었으며, 현재는 경남유형문화재 제144호로 지정되어 있다. 운상선원은 옥보대라고도 하는데, 장유보옥선사의 이름을 따서 옥보대라고 한다는 설과 거문고 전승자인 옥보고의 이름을 따랐다는 설이 있다. 현재는 운상선원을 대중 선방으로 사용하고 있다. 칠불사의 아자방과 운상선원에서 고려시대의 정명선사, 조선시대의 서산대사(1520-1604), 부휴대사(1543-1615), 초의선사(1786-1866), 이외에 백암, 무가, 인허, 월송선사 등 선승들이 주석하며 수선안거했다. 근현대에는 용성선사, 금오선사, 서암선사 등 큰스님들이 수선안거 했다. 칠불사 경내에는 임진란으로 인해 퇴락한 전각을 중수한 부휴 선수 대사의 부도탑비가 있다. 그리고 서산대사(西山大師, 1520∼1604)께서 임진란으로 퇴락한 칠불암을 중수하고 지은 칠불암개와낙성시(七佛庵盖瓦落成詩)가 있다.
(『淸虛集 』권6)이 외에도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이신 용성선사는 아자방에서 선승들을 지도하는 여가에 『귀원정종』(歸源正宗)을 저술하여 불교의 종지를 드러냈으며, 금오선사는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서암선사 등 선승들을 모아 결사정진을 하였다.
거문고의 전승지
신라 사찬 공영의 아들 옥보고(玉寶高)가 지리산 운상원에 들어가 50년 동안 현금을 연구하여 새로운 곡조 30곡을 지었다. 이 곡조를 속명득(續命得)에게 전하고, 속명득은 귀금(貴金)선생에게 전하였다. 귀금선생이 운상원에서 나오지 않자 신라왕은 금도(琴道)가 끊어질까 염려하여 이찬 윤흥(允興)에게 그 음률을 전수 받게 했다. 이에 윤흥은 안장(安長)과 청장(淸長)을 지리산으로 보내 귀금선생이 비장(秘藏)한 음률을 배워 오게 하니 귀금선생은 표풍(飄風) 등 세 곡을 안장과 청장에게 전했다. 안장은 그의 아들 극상(克相)과 극종(克宗)에게 전했다.(『삼국사기』, 권32. 樂) 칠불사가 위치한 화개면에 정금(井琴)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다. 그 이름은 옥보고 선생이 칠불사의 옥보대인 운상원에서 거문고를 연주하면 이 마을의 우물에서 거문고 소리가 들렸다 하여 우물 정(井) 자, 거문고 금(琴) 자를 사용하여 정금이라고 명명했다는 것이다.
다도의 중흥지
신라 흥덕왕(興德王) 3년(828)에 사신으로 당나라에 간 대렴공(大廉公)이 차 종자를 가져와 왕명으로 지리산 화개동에 처음으로 심었다. 조선 순조(純祖) 28년(1828)에 초의선사가 차의 시배지인 화개동에 위치한 이 곳 칠불사 아자방에서 참선하는 여가에 청나라 모환문(毛煥文)이 지은 『만보전서』(萬寶全書)의 다경채요(茶經採要)에서 다신전(茶神傳)을 초록하였다. 이 다신전을 기초로 하여 후일에 동다송(東茶頌)을 저술하였다. 동다송은 4구를 1송(頌)으로 하여 모두 17송이고, 백파거사가 초의선사를 찬탄한 1송을 더하면 동다송은 모두 18송이다.
화개동이 다도(茶)道의 성지임을 기리고 나아가 다선일여(茶禪一如)의 풍류가 더욱 진작되어 불국정토(佛國淨土)가 이룩되기를 염원하여 통광스님이 칠불사 경내에 다신탑비(茶神塔碑)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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