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헨리 버튼
다재다능했던 화가
재주 많은 사람을 보면 부럽습니다. 그림도 잘 그리고 글도 잘 쓰고 노래도 잘 부르고 인간성까지 좋다면 무엇이 부러울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한 가지 분야에서 남보다 뛰어난 사람도 부럽지만 진득하지 못한 저의 천성 때문에 저는 깊이보다 넓이가 더 좋습니다. 화가이자 수필가였고 여행기 작가이자 삽화가였으며 친절하고 다정한 성격에 질투나 원한 같은 감정과는 거리가 멀었던, 재주 많은 사람 미국의 조지 헨리 버튼(George Henry Boughton, 1833-1905)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어서 오세요 Welcome, 70.5x 131.5cm, oil on canvas
한 바구니 가득 꽃을 준비한 소녀가 꽃송이를 내밀고 있습니다. 여기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건네주는 꽃송이를 받아 얼른 가슴에 달았습니다. 계절을 상징하는 꽃들인 것 같은데, 고운 아가씨에게 꽃 이름을 물어봤다가는 한 소리 들을 것 같습니다. 나이가 몇인데 꽃 이름도 모르세요? 그래서 혼자 가을꽃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여인이 서 있는 곳 뒤편으로 들어가면 그곳에는 방금 도착한 가을이 짐을 풀고 있을 거라고 단정지었습니다. 저도 한 마디 해야겠지요. 또 만나서 반갑습니다!
버튼은 런던의 북서쪽에 위치한 노리치라는 곳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가 세 살이 되던 해, 그의 가족들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뉴욕 주의 알바니라는 곳에 정착합니다. 공식적으로 미술 수업을 받아본 적이 없는 버튼은 열아홉 살에 자신의 그림을 판매하게 됩니다. 독학과 재능이 만든 쾌거였지요. 풍경화가로 대중들에게 인식되기 시작한 버튼은 자신의 화실도 장만하게 됩니다.
해풍 The Sea Breeze, 50.8x30.5cm, oil on panel
부드러운 바람이 모자를 묶은 머플러를 가볍게 흔들며 지나갔습니다. 순간 마음도 덩달아 흔들렸습니다. 손에 쥔 꽃 한 송이, 꼭 다문 입술,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나올 것 같은 여인의 표정입니다. 바람은 끝없이 잔물결을 만들고 있고 그것을 바라보는 여인의 가슴에도 꼭 그만큼의 물결이 일겠다 싶습니다. 여름이 지나간 바닷가는 고요합니다. 가을 바닷가에 가거든 모래밭을 뒤져볼 일입니다. 귀를 기울여보면 바람과 물에 씻기고 남은 맑은 이야기들이 곳곳에 묻혀 있거든요. 바람이 불면 더욱 좋겠지요.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여인이 꽃송이를 바다 위로 던지는 순간을 기다려야겠습니다.
버튼은 미국미술가동맹이 ‘나그네 The Wayfarer’라는 제목의 작품을 구입해주면서 생긴 자금을 가지고 런던으로 떠납니다. 영국에 머무는 동안은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지역으로의 스케치 여행이 대부분이었습니다. 19세기 미술가들이 스무 살 무렵만 되면 목표를 정하고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명확하지 않은 미래와 암담한 현실 속에 몸을 저당 잡히고 술을 마셨던 저의 20대가 자주 떠오릅니다.
질투심 많은 구혼자 The Jealous Suitor, oil on canvas
나무에 몸을 기대고 데이트 중인 여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남자가 있습니다. 여인에게 마음이 가 있는 모양인데 정작 여인은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습니다. 고개를 살짝 기울인 모습이나 다소곳한 자세를 보면 여인도 붉은 옷의 남자가 싫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뒤에서 턱에 손을 대고 고민 중인 남자는 ‘물 먹은 것’이 됩니다. 이쯤 해서 뒤에 있는 남자는 돌아서야 합니다. 마음에 든다고 계속 뒤를 따르는 것은 창피한 일이지요. 뒤를 쫓을 시간이 있으면 차라리 여자가 다시 돌아오게 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훨씬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저는 방법을 찾지 못해서 저를 떠난 여인들을 다시는 찾지 못했지만요. 갑자기 아내의 서늘한 눈빛이 떠오릅니다.
미국으로 돌아온 버튼은 워싱턴과 뉴욕 디자인 아카데미에 작품을 전시하면서 화가로서의 경력을 쌓아갑니다. 스물여섯 살이 되던 해 버튼은 다시 대서양을 건널 결심을 합니다. 이번 목적지는 파리였습니다. 2년간 파리에 머물면서 에두아르 프레르와 에드워드 메이의 지도 아래 그림 공부를 합니다. 독학으로 시작해 뒤늦게 정식교육을 받는 특이한 경우였지요.
미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19세기 중반 브르타뉴 Returning from mass, Brittany, Mid 19century
간밤에 눈이 내렸습니다. 미끄러운 길, 미사를 빠질 만도 한데 할머니는 지팡이를 짚고 손녀를 의지해 미사를 모시고 돌아가는 길입니다. 할머니는 편안 얼굴입니다. 일주일 동안 영혼에 혹시 끼어 있을 지저분한 것들을 모두 고백했으니 마음의 짐을 덜었기 때문이겠지요. 손녀는 좀 따분한 듯한 얼굴이지만 이것도 하늘에서 다 헤아리고 계시니까 그런 표정을 지을 것은 아닙니다. 제례의식보다는 자신의 마음가짐이 먼저라고 늘 생각하지만 빠지지 않고 의식에 참여하는 것도 생각해보면 마음가짐에서 시작되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파리에서의 공부를 끝낸 버튼이 자리를 잡은 곳은 뉴욕이 아니라 런던이었습니다. 런던에 자신의 화실을 마련한 그는 다음 해 British Institution에 작품을 전시하면서 영국에서 화가로서의 경력을 다시 시작합니다. 한편으로는 런던에 평생 살 집을 마련합니다. 이민을 갔지만 그의 마음을 당긴 곳은 태어난 곳이었던 모양입니다. 1863년 로열 아카데미에 작품 두 점을 출품하는데 이후 42년간 총 87점의 작품을 전시하게 됩니다.
작별인사 The Two Farewells, 52.7x81.9cm, oil on canvas
점점 멀어지는 배를 향해 여인들은 끝없이 손수건을 흔들고 있습니다. 배에서 이 모습이 보이는가 보이지 않는가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수평선 너머로 배가 사라질 때까지는 자신들의 안타까움이 닿을 것이라는 생각뿐이죠. 이별이 슬픈 것은 다시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떠나는 뒷모습은 눈 부릅뜨고 끝까지 보아야 합니다. 육교를 오르는 모습을 보고 그냥 돌아서서 온 뒤로 다시 못 만난 사람도 있습니다. 가끔 그 순간이 떠오르면 끝까지 서 있지 못했던 자신이 여전히 밉습니다.
영국에서 버튼은 일종의 틈새시장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작품 주제로 미국이 영국 식민지 시절이었던 모습과 청교도들의 생활 그리고 사실적인 인물화로 정했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관객들로부터 인기를 얻었고 결과는 성공이었죠. 1865년, 서른두 살의 버튼은 스물 살의 캐서린과 결혼을 합니다. 열두 살 차이라... 요즘 하도 나이 차가 많은 부부를 봐서 그런지 그리 문제될 것은 없었겠군요.
쓸쓸한 생각 A Wintry Contemplation, 117.5x66cm, oil on canvas, 1872
서서히 해는 저물고 있고 숲에서부터 시작된 어스름이 조금씩 여인을 향해 다가오고 있지만 생각의 끝은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여인의 발자국이 어지럽습니다. 오래 서성거리셨군요. 날씨가 조금씩 차가워지면, 그림자가 길어지면 그만큼 생각도 많아집니다. 보이는 것 모두에게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것도 이쯤의 일이고 가슴을 심하게 울렁거리게 하는 것들이 느닷없이 찾아오는 것도 이 무렵입니다. 올 가을, 쓸쓸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1874년 로열 아카데미 연례 전시회에 젊은 화가 한 사람이 작품 구경을 왔습니다. 그는 버튼의 종교적인 내용이 담긴 작품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버튼의 작품을 모사하고 연구했고 그의 동생에게 보낸 여러 통의 편지에서 버튼에 대한 그의 존경심을 표현했지요. 그 젊은 화가의 이름은 빈센트 반 고흐였습니다. 두 사람이 만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고흐의 성격을 생각하면 버튼을 찾아가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회상 Memories, oil on canvas
짙은 그림자 속에 묻힌 여인은 바다 위에 떠 있는 배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쉬지 않고 밀려드는 파도에 이제 깎이고 깎여 희미한 흔적만 남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먼 바다를 향해 떠나는 배의 모습에서 그 흔적들이 견디기 힘든 기억들로 되살아나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그 기억들이 때때로 푸석거리는 우리의 삶에 습기를 주곤 합니다. 며칠 전 ‘필명상순’님 댁에 갔다가 전비담 시인의 ‘꽃의 체온’이라는 시를 만났습니다. (중략)/건물 뒤편에서/시신을 말리는 냉각팬이/쉴 새 없이 돌아간다/누가 저걸/죽은 꽃들의 누적된/향이 앓는 소리라 했나/ (중략) 시 전편을 읽다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시를 따라 올라 오는 수많은 생각들 때문이었죠. 당분간 촉촉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버튼은 삽화가로도 유명했습니다.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글씨>와 롱펠로우 시집의 삽화 작업을 포함해서 다양한 작가들의 책을 위해 삽화를 제작했습니다. 런던의 비평가들은 “투박한 인물에 자연스러운 감정을 넣을 줄 아는 화가”라고 그를 평가했습니다. 또한 네덜란드를 여행한 다음에는 <네덜란드에서의 스케치 산책>이라는 책을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당대에 가장 재능 많은 화가 중 한 사람’이라는 평가가 뒤따르는 것도 당연합니다.
겨울 아침 산책 Winter Morning Walk, 1864
얼마나 추운지 어린 꼬마의 얼굴이 굳었습니다. 양손을 옷 속에 넣고 잔뜩 웅크린 모습이 안쓰럽습니다. 도대체 이 겨울 아침,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요? 옆에 언니를 보니 치마에 푸른 나뭇가지를 담았군요. 가지에는 시든 꽃이 달려 있습니다. 한겨울에 피는 꽃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추운 날 꽃가지를 꺾어 오는 아이들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회색으로 가득 찬 겨울, 푸른색이 아이들을 유혹했을 수 도 있겠군요. 유혹에 넘어간 아이들, 대단합니다.
유머가 많았고 근사한 이야기를 좋아했으며 따뜻했고 너그러웠던 버튼은 쉽게 런던의 미술가들 모임에 녹아들었고 1896년, 로열 아카데미의 정회원이 됩니다. 그는 생애 전체를 통해 그리고 여행하고 전시를 했습니다. 단순해 보이지만 화가로서 이 이상 더 좋은 생활도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버튼의 주요 작품들은 풍경화와 인물화입니다. 아주 현실적인 색상 또는 반대로 흐릿한 색을 이용해서 인물을 묘사한 작품들을 남겼는데, 그래서일까요, 그를 ‘시인 화가’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었지요.
뉴암스테르담의 새해 첫날 New Year's Day in New Amsterdam, 101.6x162.6cm, oil on canvas, 1870
뉴암스테르담의 새해 첫날입니다. 친절하게도 건물 벽에는 올해가 1636년이라고 표시되어 있습니다. 코를 맞대고 새해 인사를 나누는 사람, 장난감을 사게 돈을 달라고 조르는 아이, 덕담을 건네는 사람들 모두 즐거운 모습들입니다. 한 해를 시작한다는 것은 다시 출발한다는 느낌 때문에 사람을 유쾌하게 만들죠. 할 수만 있다면 매일 새해 첫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영국이 네덜란드와의 전쟁에서 이기고 난 후 뉴암스테르담을 뉴욕이라는 이름으로 바꿨죠. 1674년의 일이니까 그림 속 시간보다는 한참 뒤의 일입니다.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화가인 번트가 소설에도 등장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영국의 대표적인 여류 소설가 바이올렛 헌트(Violet Hunt)는 당대의 수많은 예술가들과 염문을 뿌렸는데, 서머싯 몸도 연인 중 한 명이었죠. 버튼도 그녀의 연인이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바이올렛이 자신의 연인들을 소재로 소설을 썼는데 버튼의 이야기도 등장한다고 하는군요. 버튼의 입장에서 좋아해야 하는 건가요?
1901년, 아내 캐서린이 쉰여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리고 4년 뒤, 버튼은 런던에 있는 자신의 화실에서 심장병으로 일흔두 살의 생을 마감합니다. 재능이 많은 사람은 늘 신께서 빨리 불러올린다고 말하지만 다양한 재능을 가지고 있던 버튼은 나름대로 화가로서 한 생애를 누린 셈입니다. 부러운 삶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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