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화

윌리엄 헨리 마겟슨

문성식 2019. 2. 5. 15:23


윌리엄 헨리 마겟슨

예쁜 여인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그림 속 여인들은 대부분 곱고 화려합니다. 물론 귀스타브 쿠르베의 ‘목욕하는 사람’이라는 작품처럼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여인들도 있지요. (그 여인들의 모습이 제가 알고 있는 실제 여인들의 모습에 훨씬 가깝기는 합니다.) 하나같이 미인대회에 나가도 손색이 없을 만한 여인들을 자주 접하다 보니 여인을 보는 눈만 높아진 것은 아닌지 걱정입니다. 영국의 윌리엄 헨리 마겟슨(William Henry Margetson, 1861-1940)의 여인들이 제 눈높이를 또 올려놓았습니다.




해변 The Seashore, 1900

해가 진 저녁 해변은 적막합니다. 앞서 지나간 많은 사람들의 흔적들은 들락거리는 바닷물 따라 먼 바다로 흘러갔습니다. 그래서 여름 바다에 귀를 기울이면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웃음과 눈물 그리고 환호와 탄식이 물이 밀려들 때마다 터져 나오는 것이지요. 뒷짐을 지고 천천히 모래밭을 거니는 여인의 몸짓이 한없이 여유로워 보입니다. 여름 저녁의 바다가 주는 느긋함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쓸쓸하기도 합니다. 머릿속을 맴도는 무수한 상념들 때문이겠지요. 붉게 달아 오른 얼굴로 바다를 바라보는 여인의 시선이 아련합니다.

런던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마겟슨은 사우스 캔싱턴 학교에서 미술 공부를 시작합니다. 이후 로열 아카데미로 진학해 그림 공부를 계속하는데, 1885년 스물네 살이 되던 해부터 로열 아카데미에 작품을 전시했다고 하니까 그렇게 늦은 나이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 마겟슨의 명성과 작품에 비하면 그에 대한 자료는 많지 않습니다.



아침 산책  The Morning Walk

오가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길거리에 예쁜 여인이 나타났습니다. 제목을 보니 아침 산책을 나온 것 같은데, 나무 그림자로 봐서는 한낮입니다. 뭐,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림 속 소녀가 어찌나 맑은지요. 여인이라고 보기에는 아직 소녀의 느낌이 너무 많습니다. 검은 숄을 어깨에 둘러 성숙한 느낌을 주고 싶었겠지만, 제 눈에는 그것마저도 소녀의 귀여움을 더해주는 소품입니다. 아내가 알면 한 마디 하겠지만, 아침에 혹시라도 이런 소녀를 만난다면 하루가 아주 유쾌할 것 같습니다. 정말입니다.

마겟슨은 화가로도 활동을 했지만 처음에는 삽화 쪽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흑백으로 제작된 그의 삽화는 당시 영국의 여러 잡지에 실렸습니다. 나중에는 색채가 포함된 삽화도 추가되었지요. 그의 삽화를 두고 타고난 재능보다는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라고 말하는 평가가 있습니다. 노력은 사람의 몫이지만 재능은 신의 영역이죠.



주부  The lady of the house

어디선가 낮은 콧노래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주방에서 들리는 소리였군요. 큰 접시에 샐러드를 만드는 중인가요? 하얀 식탁보와 여인의 푸른색 옷이 어울려 아주 상큼합니다. 살짝 벌어진 입으로 봐서는 요리를 하며 노래를 시작한 것 같습니다. 기분 좋게 만드는 요리이니 맛은 확인할 필요도 없습니다. 음식의 맛은 손맛이고, 손맛은 결국 마음의 맛이거든요. 종류별로 선반 위에 올려놓은 접시가 깔끔한 여인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작은 화분의 붉은 꽃, 식탁 위를 힐끔거리고 있습니다.

삽화가로 활동하면서 마겟슨은 아내가 될 여인을 만납니다. 공동으로 삽화 작업을 하던 헬렌이라는 여인은 그보다 한 살이 많았는데 그녀의 아버지는 잡지의 편집장이었습니다. 둘은 결혼을 하고 딸 둘과 아들을 하나 낳습니다. 딸 중 한 명은 나중에 삽화가가 되었으니까 부모의 피를 제대로 이어받았던 모양입니다.



수선화  Daffodils

창가에 세워놓은 수선화 화병에 물을 따르는 여인의 표정이 환합니다. 봄을 닮았습니다. 수선화를 보면 늘 떠오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양희은 씨가 번안가요로 부른 ‘일곱 송이 수선화’도 좋지만 브라더즈 포가 부른 원곡이 제게 먼저였지요.

I may not have a mansion. I haven't any land.

Not even a paper dollar to crinkle in my hand.

But I can show you morning on a thousand hills.

And kiss you and give you seven daffodils.

집도 땅도 없습니다.

그리고 손 안에 바스락거리는 지폐 한 장조차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수많은 언덕 위의 아침을 보여드릴 수도 있고

당신에게 키스를 할 수도, 일곱 송이 수선화를 드릴 수도 있습니다.

까까머리였던 저의 가슴을 흔들었던 낭만적인 가사였지요. 살면서 언덕 위의 아침보다는 부스럭거리는 지폐가 필요했던 적이 더 많았습니다. 나이 들면서 다시 언덕 위의 아침이 더 소중해지고 있는데 일곱 송이 수선화를 주어여 할 사람은 있지만 아직 수선화 일곱 송이 모두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언제고 모두 준비할 수 있겠지요.



앉아 있는 두 여인  Two Young Women Seated, c.1900

아주 멋쟁이 여인들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여인들이지만 옷차림이나 머리 스타일이 지금의 모습이라고 해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어 보입니다. 민소매 차림이나 짧은 머리가 지금 어디엘 가도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얼굴을 보니 닮았습니다. 자매 사이인가요? 고개를 들고 있는 여인과 숙인 여인의 성격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림 속 여인들을 자주 보게 되더니 이제 관상도 보게 되는 모양입니다.

마겟슨의 작품은 몇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작품의 크기가 컸고 대개 아름다운 여인을 한 명 배치했죠. 여인의 머리는 짧은 편이고 모자를 들고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모습은 당시에는 현대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20세기에 들어서서 마겟슨은 삽화보다는 유화에 좀 더 집중하게 됩니다. 아내 헬렌 역시 인물화에 능통했는데 마흔넷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마겟슨이 아내의 사후에 재혼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혼자 살아가기에는 긴 시간이었습니다. 마겟슨은 곧 아름다운 여인들이 주제가 되는 인물화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합니다. 몇 점의 종교화가 있지만 그의 주 종목은 아니었습니다.



순간의 생각  A Moment's Reflection, 1909

외출 준비를 하려고 장갑을 끼는 순간 멈칫했습니다. 언제였더라, 이 장갑을 끼고 그 사람을 만났던 것이… 좋은 것이었든 나쁜 것이었든 순간 몸을 정지시키는 기억들이 있습니다. 그런 기억들은 골목길을 나설 때, 계단을 오를 때 불쑥 불쑥 튀어나와서 기억의 시계를 그때로 돌려놓곤 합니다. 할 수 있다면 바로잡고 싶은 순간들도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사는 것이 역동적인 것이겠지요. 자, 이제 출발하시죠, 아가씨!

마겟슨의 작품을 후기 빅토리아 시대부터 에드워드 시대의 후기 인상파에 걸친 것이라고 보는 평가도 있습니다. 후기에 올수록 그의 붓 터치는 느슨해졌는데, 아마추어 눈으로는 잡아내기 어렵지만 라파엘 전파의 영향도 있다고 합니다.



제때의 한 땀  A Stitch in Time, 1915

외출 준비를 끝냈는데 옷단이 터진 것을 알았습니다. 옷을 갈아입을 수도 있고 큰 문제가 아니라면 그냥 나갈 수도 있지만 여인은 소파에 앉아 바느질을 시작했습니다. 지금의 한 땀이 나중에 더 큰 일을 막을 수가 있는 것이겠지요. 그때 바로 하지 못했던 일이 나중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일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지금쯤은 아무 일이 없어야 할 것 같은데 급하지 않으면 뒤로 미루는 버릇은 여전합니다. 감당할 자신도 없으면서 말입니다. 바느질하는 여인에게서 또 한 수 배웠습니다.



애프터눈 티  Afternoon Tea

차 한 잔 하시죠? 애프터눈 티를 마시는 자리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시간은 오후3시가 넘었고 창에는 꽃무늬가 크게 자리를 잡은 커튼이 오후의 햇빛을 부드럽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모자 챙 밑으로 그녀의 눈빛이 반짝였고 뺨은 살짝 붉게 달아올랐습니다. 몇 번의 모임에서 가벼운 눈인사를 나누었는데 애프터눈 티에 초대한 것을 보니 제게 관심이 있다는 뜻일 겁니다. 무슨 말로 감사의 표시를 해야 할지 쭉 생각을 했었는데, 입에 살짝 걸린 여인의 미소를 보는 순간 갑자기 머릿속이 헝클어졌습니다. 큰일입니다!

마겟슨은 좀 특이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림을 그리다가 여유가 생기면 취미로 이런저런 일을 했던 모양인데 정원사와 무용수 그리고 실력 있는 항해사로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항해사나 정원사는 그런대로 이해가 가는데, 남자 무용수... 쉽지 않은 종목 아닌가요?



신데렐라와 요정 대모  Cinderella and the Fairy Godmother

무도회장에 갈 수 있는 황금 호박마차를 요정 대모가 만들어 주었는데… 이거 어떻게 타고 가죠? 아니 시간이 지나면 점점 더 커지는 건가요? 이제까지 제 상상 속의 황금마차는 요정의 지팡이가 움직이는 순간 제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이었는데 마겟슨의 상상은 또 다른 것이었습니다. 재투성이 아가씨의 성공담은 언제 들어도 기분 좋은 것이지만 그 성공담이 실제로 이루어질 확률은 거의 없죠. 그렇다면 믿을 것은 자신의 의지뿐입니다. 바닥에 깔린 대리석 묘사가 눈에 익는다 싶었더니 마겟슨이 알마 타데마의 영향도 받았다는 기록이 있었군요.



새로운 하루  A New Day, oil on canvas, 1930, 76x51cm

조심스럽게 꽃이 가득 담긴 접시를 창가에 올려놓았습니다. 아침의 옅은 빛이 꽃잎에 닿아 색이 더욱 선명해졌습니다. 그윽한 여인의 시선도 꽃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여인도 꽃을 닮았습니다. 여인을 감싼 동양풍의 옷에 그려진 화사한 꽃무늬는 또 하나의 꽃입니다. 마치 새로운 하루를 위한 제단에 꽃을 올리는 경건함 같은 것도 느껴집니다. 생각해보면 새로운 하루를 맞는 마음은 그림 속 여인과 같아야 할 것 같습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순간들이 다시 열리는 것이니까요.

마겟슨은 일흔아홉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자료가 부족해서 더 이상 그에 대한 이야기를 찾기가 어려웠지만 마겟슨 덕분에 아름다운 여인들을 만났던 것으로 아쉬움을 대신 하기로 했습니다. 그림을 보는데 아내가 한 마디 하더군요. 이번 여인들은 왜 이렇게 예뻐? 미인 특집으로 꾸며 봤어.

고맙습니다. 마겟슨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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