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일드 해섬 - 인상파 화가를 만나 본 적이 없는 인상파의 대가
미국에 인상파를 소개한 화가들은 대개 파리에서 인상파에 흠뻑 젖어 귀국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공식적인 교육도 별로 받은 편이 못 되고 또 인상파 화가들과는 일면식도 없는 화가가 인상파의 대가가 된 일이 있습니다. 미국의 프레데릭 차일드 해섬(Frederick Childe Hassam, 1859-1935)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누적된 관찰이 순간에 사람을 바꿀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니 사막의 오후 하늘 Afternoon Sky, Harney Desert, 51.12x76.52cm, 1908
하니는 숲도 있지만 사막도 있는 미국 오리건 주에서 가장 큰 카운티라고 합니다. 계절은 가을 초입이겠지요. 햇빛 속에 노란색으로 물든 대지 위, 툭툭 찍어 바른 듯한 구름이 걸려 있습니다. 계절이 바뀔 때쯤이면 구름이 떼를 지어 다니죠. 아스라히 보이는 붉은색 땅이 사막인가요?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디엔가 샘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던가요. 글쎄요, 제 생각에는 그리움과 외로움을 키우기 때문 아닐까요...
화가의 이름 이야기를 먼저 해야겠습니다. 가운데 이름과 마지막 이름은 미국인들도 헛갈리는지 발음기호가 달려 있습니다. 해섬의 선조는 1600년대 매사추세츠 주에 도착한 초기 정착인이었습니다. 가운데 이름 차일드는 고대 영어에서 방패나 기사를 뜻하는 것이었고, 아랍 이름처럼 보이는 해섬은 영국의 Horsham이라는 이름에서 온 것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그를 아랍 계통의 화가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Frederick은 아버지가, Childe는 삼촌이 지어준 것이고 , Hassam은 조상이 물려준 것이니까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겠지만 웬일인지 나중에 아버지가 붙여준 이름을 제외한 차일드 해섬이라는 이름을 씁니다. 이유가 뭐였을까요? 아버지가 싫었을까요?
에스파냐 계단의 교회 행렬 Church Procession, Spanish Steps, 1883
제목을 에스파냐 계단이라고 했지만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로마에 가면 오드리 헵번 때문에 유명한 에스파냐 계단이 있거든요. 그곳 계단은 이렇게 좁지도 않았고 또 계단 옆에 건물도 있었습니다. 물론 계단 끝에 교회가 있는 것은 같습니다. 교회 앞에 있는 계단을 오르는 것 자체가 신의 나라로 올라가는 상징이죠. 올려다본 교회는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에서 흰색으로 빛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파란 하늘을 그림에서 본 적이 있으신지요? 천국의 하늘은 이런 색일까요?
해섬은 보스턴 교외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칼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죠. 어려서부터 미술에 관심을 보였던 그는 공립학교에 입학, 드로잉과 수채화 수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림에 소질이 있었던 것을 정작 부모는 몰랐습니다. 해섬이 열세 살 되던 해, 보스턴 상가 지역에 엄청난 화재가 발생, 수많은 상가가 불에 탔는데 해섬 아버지의 가게도 피해를 입습니다. 훗날 그의 인생에서 이때를 돌아보면 가족에게는 불행이었지만 그에게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시골길 A Back Road, 79.38x63.5cm, 1884
시골 언덕길을 마차가 오르고 있습니다. 얼마 전 비가 내렸는지 마차가 만들어 놓은 고랑에는 물이 고였습니다. 그림에서 길을 만나면 기분이 좋습니다. 끝이 없이 이어진 길이면 더욱 마음이 두근거립니다. 산다는 것은 길을 걷는 것과 같습니다. 두 발로 대지를 밀며 걷다보면 보이는 것이 많습니다. 요즘은 자동차를 타고 가는 것을 꿈꾸는 사람들이 많죠. 얼마만큼 멀리 가는가를 따지기보다는 길에서 무엇을 보았느냐가 중요한 것 아닐까요? 느릿한 마차의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뒤를 따라 걷는 길, 저 언덕 너머에는 또 어떤 길이 있을까 궁금해집니다.
어려워진 집안 형편으로 더 이상 공부를 할 수 없게 되자 해섬의 아버지는 그를 출판사의 회계 일을 하는 자리에 취직을 시킵니다. 그러나 아들은 전혀 회계 일에 소질이 없었습니다. 뒤늦게 상업용 판화를 제작하는 곳에 취직을 시켰는데 곧바로 해섬은 소질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조건만 갖춰지면 숨어 있던 자질은 언제든 활짝 기지개를 켜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법이죠. 문득 아직 내 안에 숨어 있는 자질은 무엇일까 궁금합니다. 숨어 있기나 한지...
봄비 April Showers, 1885
이거 참 심란한 일입니다. 마차를 모는 마부나 지붕에 올라앉은 승객이나 내리는 비를 우산으로 가려보지만 편한 모습이 아닙니다. 더구나 마차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은 아마 마차에 오르려는 사람들 같은데, 다 올라 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화면 속 인물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림 전체는 촉촉한 봄비에 흠뻑 젖었습니다. 봄비― 가을비였어도 좋을 뻔했습니다.
스무 살이 되면서 해섬은 처음으로 유화에 손을 댑니다. 그러나 주로 그렸던 작품은 야외풍경의 수채화였죠. 열심히 일을 하고 능력을 인정받았는지 스물세 살이 되던 해, 해섬은 프리랜서로 활동을 시작합니다. 자신의 화실도 장만한 그는 Harper’s Weekly 같은 몇 개 잡지에서 활약하는데 특히 어린이 이야기 삽화의 전문가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내친 김에 수채화로 처음 전시회도 개최했습니다. 독학으로 이룬 쾌거라고 할 수 있죠.
헛간 마당 The Barnyard, 1885
헛간 마당에 쌓여 있는 건초더미에서 건초를 덜어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키보다 더 큰 건초 앞에서 허리가 구부정해졌습니다. 간단치 않은 농촌의 생활이 오랜 시간 그의 몸을 만들었겠지요. 세월은 얼굴에도 나타나지만 몸에도 나타납니다. 그래서 저렇게 노동으로 한 세월을 보낸 몸은 정직합니다. 그렇다면 내 몸은 얼마나 정직한 걸까요.
겨울 저녁 공원을 가로질러 Across the Common on a Winter Evening, c.1885~1886
눈이 내린 겨울 저녁, 가로등이 켜 있는 공원을 건너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조심스럽습니다. 사람들과 나무는 어둠 속에서 검은색으로 서 있고 켜 놓은 등은 하늘에 떠 있는 듯합니다. 꿈속의 세계를 보는 기분이 드는데, 생각해보면 눈이 쌓인 길을 저렇게 줄을 지어 걸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참 대단합니다. 앞서의 작품을 그린 화가의 것으로 믿기지 않을 만큼 화풍의 변화가 심하거든요.
그러나 공식적인 미술 공부를 거의 받지 못했다는 것이 가슴에 걸렸을까요? 친구였던 개럿(E. Garret)이 해외로 그림 여행을 떠나자고 했을 때 해섬은 동행을 결심합니다. 스물세 살의 해섬은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이탈리아, 스위스, 스페인을 여행합니다. 여행 중에 해섬은 대가들의 작품에 매료되었는데, 특히 영국 터너의 수채화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귀국 후 여행 중 작업 한 67점의 수채화로 1884년에 해섬은 두 번째 전시회를 개최합니다.
아침식사 후 After Breakfast, 73.03x100.65cm, 1887
아침식사가 끝나고 어머니는 신문을 펼쳤고 딸은 나무에 물을 주고 있습니다. 딸의 얼굴은 해섬의 작품 중에 자주 등장하는 여인인데 혹시 그의 아내가 아닌가 싶습니다. 모델을 자주 섰거든요. 숲 사이를 뚫고 길게 들어온 햇빛이 마당을 기웃거리고 있습니다. 떨어진 붉은 꽃잎들과 흰 치마의 대비가 더해지면서 상큼한 아침 기운이 가득합니다. 아쉬운 것은 남자의 부재이군요. 남자가 들어가면 그림이 이상해질까요?
스물다섯 되던 해, 해섬은 캐서린 도안과 결혼합니다. 도안은 평생을 주부로, 그의 빈번한 여행 계획자로, 그리고 많은 가정사를 돌보는 ‘양처’로 그와 함께 50년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헌신적인 그녀의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습니다. 혹시 ‘우렁각시’ 같은 여인이었을까요? 해외 그림 여행도 다녀왔고 가정도 이룬 해섬은 여러 단체에 가입, 화가들과 교류를 쌓아 갑니다. 친구들은 해섬을 활력이 넘치고 외향적이며 겸손하고 사려 깊은 행동을 하지만 그에게 반대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논쟁하기를 좋아했고 신랄했던 사람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까칠한 구석이 어디엔가 있어야 사람 맛이 납니다.
센 강을 따라 Along the Seine, 20.32x30.16cm, 1887
파리에 눈이 내렸습니다. 센 강을 따라 달리는 길 위로 마차가 나타났습니다. 모자에 눈이 쌓인 걸 보니 비가 와도 눈이 와도 마부는 참 죽을 맛이겠습니다. 낮은 구름으로 가득한 하늘 밑, 거친 말의 숨소리와 함께 차가운 바람이 불어옵니다. 혹시 작품 오른쪽 하단에 해섬의 서명이 보이는지요? 이름 앞에 초승달 모양의 기호가 있죠. 1883년부터 이름 앞에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그 의미는 모른다고 합니다. 왜 그가 살아 있을 때 물어보지 않았을까요. 관심이 있는 제가 이상한가요?
해섬은 바르비종 화가들처럼 자연을 보고 직접 그려야 한다는 윌리엄 헌터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 이유로 ‘풍경화는 대기와 빛이 중요하다’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죠. 1880년대 중반부터 해섬은 도시의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일부 비평가들은 그의 작품을 보고 ‘매우 즐거운 주제이지만 미술은 아니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산과 강이 있는 것만 풍경화라고 인식하는 사람은 충분히 할 수 있는 평이죠. 꾸준히 유화 실력도 늘었지만 해섬은 아내와 함께 파리로 건너갈 계획을 세웁니다.
화분을 든 소년 Boy with Flower Pots, 45.7x37.5cm, 1888
화분을 나르는 아이의 표정에 심통이 있는걸 보니 빈 화분을 나르는 일이 못마땅한 모양입니다. 혹시 깨질까봐 가슴에 안았는데 아직도 날라야 할 화분이 꽤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키에 비해서 얼굴은 좀 나이가 들어 보입니다. 뭔가 인체 비례도 안 어울린다고 했더니 아내가 한 번 보겠다고 나섰습니다. “어렸을 때 딱 당신 모습 같은데. 미국에도 ‘대갈장군’이 있었네!” 머리 크기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아내는 신이 나는 모양입니다.
삽화가로 일하면서 모은 돈으로 파리의 예술가들이 모여 사는 곳에 집을 얻고 하녀를 둘 정도였으니까 해섬의 파리 생활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파리에 거주하는 동안 해섬은 미국에서 온 화가들을 거의 만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런저런 상상은 할 수 있지만 그의 속내를 알기는 어렵습니다. 아카데미 줄리앙에 입학, 블랑제와 르페브르 밑에서 공식적인 드로잉 수업을 들었지만 곧 그만두고 다시 독학의 길을 걷게 됩니다. ‘줄리앙 아카데미는 판에 박힌 것만 가르쳐서 개인의 자라나는 모든 개성을 파괴한다’라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역시 까칠한 면이 있습니다. 멋있었군요, 해섬 선생님!
찰스 강과 베이컨 힐 Charles River and Bacon Hill, 47.94x53.02cm, c.1890~1892
그림 속 찰스 강은 아마 보스턴을 지나 흐르는 그 강인 것 같습니다. 우중충한 하늘 밑, 한 사내가 우두커니 강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흐르는 강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평온해집니다. 아마 걱정도 회한도 슬픔도 강물에 던져버리기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강은 무엇을 던지느냐에 따라 새로운 생명을 주기도 하지만 생명을 앗아가는 곳이 되기도 합니다. 멀리 황금색 지붕은 우울한 세상을 밝히는 불인가요?
독학을 결심한 해섬은 파리의 거리 풍경을 그려 보스턴으로 보냅니다. 이전에 그렸던 작품들과 함께 팔리면서 그의 파리 생활 자금이 됩니다. 1887년, 파리에서 그림을 그리던 해섬의 작품에 변화가 왔습니다. 단 한 명의 인상파 화가도 만나지 않았는데, 인상파 화가들 작품처럼 터치는 부드러워졌고 빛이 묘사되었습니다. 미술관과 전시회에서 본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이 그에게 영향을 준 것이죠. 그가 유일하게 인상파와 연결된 것이라고는 르누아르가 쓰던 화실을 찾아서 그가 남긴 스케치를 본 것이 전부였습니다. 물론 해섬은 르누아르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참 신기합니다. 본 것이 쌓여 마음을 거쳐 몸으로 이어지다니요...
뉴욕 매디슨 스퀘어의 택시 정류장
Cab Stand at Night, Madison Square, New York, 20.96x34.93cm, 1891
눈이 내리는 저녁, 손님을 기다리는 택시들이 줄을 섰습니다. 모자에 눈이 쌓이는데도 남자들은 아직 이야기를 다 끝내지 못했습니다. 설마 2차 가자는 이야기는 아니겠지요. 파란색으로 남은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길을 건너왔습니다. 눈이 내리는 날 덕수궁에서 동대문까지 걸었던 적이 있습니다. 내리는 눈만큼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녹아 흔적도 없는 눈처럼 그때 이야기들도 다 사라졌습니다. 그날 했던 이야기들을 아직도 기억하시는지요... 혹시 다시 만나게 되면 물어보고 싶습니다. 신사 양반들, 이제 그만 집으로 빨리 돌아가세요.
유럽에 머무는 동안 해섬의 화풍은 인상파로 기울었습니다. 다른 인상파 화가들이 카바레나 오페라 극장, 뱃놀이 같은 주제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을 때 해섬은 거리 풍경을 주로 그렸습니다. 가끔은 아내를 모델로 꽃밭 속 소녀의 모습을 그리기도 했지요. 살롱에는 세 번이나 출품했지만 메달은 수상하지 못했습니다. 1889년, 귀국하던 해 만국박람회에 4점의 작품을 출품했는데 처음으로 동메달을 수상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전통을 따르지 않는 미국에서 온 진보적인 화가’라고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성공한 거지요?
즉흥 연주Improvisation, 1898
열어 놓은 창으로 미풍이 밀려드는 느낌입니다. 탁자 위에 놓은 꽃을 보다가 갑자기 떠오르는 곡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손은 건반 위에 있는데 눈은 꽃을 보고 있습니다. 꽃의 이야기가 여인의 눈과 손을 거쳐 소리로 피어나고 있습니다. 조용하고 부드러운 곡이겠지요. 잠시 아늑함에 취해 있는데 벽에 걸린 그림 속 여인과 눈이 맞았습니다. 뭘 봐! 좀 무섭군요.
귀국 후 뉴욕에 정착한 해섬은 마차와 전차가 다니는 뉴욕 거리를 화폭에 담기 시작했습니다. 완고한 인상파 화가들이 금기시했던 검은색과 갈색이 등장하는가 하면, 1890년에는 모네의 작품처럼 흰색이 두드러지기도 했습니다. 어찌 보면 틀에 얽매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쿠바를 여행하고 돌아온 해섬은 1896년 처음으로 자신의 작품에 대한 단독경매를 실시합니다. 200점이 넘는 작품이 경매에 나왔는데 인상주의 화풍이 극에 이르렀다는 평을 받았지만 그 해에 불어닥친 경기불황으로 판매가격은 작품 한 점당 50달러가 안 되었습니다. 우울한 결과를 뒤로 하고 해섬 부부는 다시 유럽으로 가는 배에 오릅니다.
이른 아침 국회의사당 House of Parliament, Early Evening, 33x41.9cm, 1898
아직 해가 뜨지 않은 템스 강이 조금씩 부산해지고 있습니다. 밤새 강에서 흔들거렸던 배들은 연기를 뿜어 새벽을 가르고 있고, 세상을 덮고 있던 안개도 자리를 뜰 준비를 끝냈습니다. 강 건너 의사당 건물이 짐승처럼 긴 몸을 꿈틀거리면서 새벽의 한쪽을 걷어내고 있습니다. 모든 것들이 다시 자신의 색을 찾는 새벽, 잔잔한 강물이 먼저 흰 비늘로 반짝입니다.
나폴리와 로마 피렌체를 거치면서 해섬은 대가들의 작품을 공부합니다. 파리를 거쳐 영국까지 여행을 하고 귀국한 그는 Ten에 가입하는데, Ten에서도 그는 가장 급진적인 편이었습니다. 첫 번째 전시회에 7점을 출품했지만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작품’이라는 평이 돌아왔습니다. 많은 관객들은 어떻게 그런 색을 사용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그림 속 주제가 시키는 대로 칠했을 뿐입니다.’ 우문에 현답인가요? 그래도 작품을 파는 재주가 있었는지 부정적인 비평가와 보수적인 구매자들에게도 작품을 팔았습니다. 한편으로 생계를 위해 그림 지도도 쉬지 않았습니다.
<공원을 가로질러 Across the Park, 70.5x62.9cm, 1904
어질어질한 봄입니다. 연두와 초록으로 덮인 세상은 사람의 혼을 빼놓습니다. 처음 세상은 붉고 검은 색만 있었다고 하지요. 이제 막 물이 오른 어린 연두는 새로운 세상을 여는 색이 됩니다. 하늘이 빙 돌아 내 앞에 펼쳐지는 것 같은 현기증에 몸살을 앓아본 적이 있으신지요. 공원 곳곳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잎들의 재잘거림이 멀리 있는 건물들을 흔들다가 하늘도 흔들고 있습니다.
세기가 바뀌고 파리에서 인상파전이 열린 지 30년이 지나자 뉴욕에서도 인상파가 주류로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주요 미술관에서는 해섬의 작품을 앞다투어 구매했고 그동안 줄기차게 화풍을 고집한 그의 노력에 수많은 수상이 뒤를 이었습니다. 고생 끝에 낙인가요? 1909년 그의 작품은 한 점당 6000달러였습니다. 10년 전에 50달러가 안 되었는데 말이죠.
프랑스의 차 정원 French Tea Garden, 88x102cm, 1910
참 곱군요. 하얀 식탁보에 정갈하게 차려진 그릇이 상큼합니다. 냅킨을 만지고 있는 여인의 손길에 정성이 가득한 것을 보니 좋은 사람을 차 마시는 곳으로 초대한 것 같습니다. 혹시 여인의 가슴이 뛰고 있을까요? 식탁 위에 붉은 꽃도 여인 뒤에 있는 노란 꽃들도 여인의 마음을 헤아리느라 고개를 여인 쪽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너희들도 궁금하지?
1913년 아모리쇼에 6점의 작품을 출품하면서 해섬은 인상파가 주류이지만 곧 입체파와 같은 신사조가 몰려온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모리쇼에 출품한 작가들 중 그는 위어(Weir)와 함께 가장 나이가 많은 화가였습니다. 그래서 붙여준 별명이 ‘맘모스와 마스토돈’이었는데, 두 동물 다 빙하기가 끝나고 멸종했죠. 그 후 에칭과 석판화에 새로운 관심을 가지고 400점이 넘는 작품을 제작했는데 예술적으로는 인정을 받았지만 관객의 반응은 그저 그랬습니다.
금붕어가 있는 어항 Bowl of Goldfish, 63.82x76.84cm, 1912
이 작품은 해섬의 ‘창문’ 연작 중의 한 점입니다. ‘창문’ 연작은 빛이 가득한 커튼이나 열린 창문 앞에 꽃무늬가 있는 기모노를 입은 여인의 모습을 묘사한 작품들이었는데 이런 작품들은 미술관에서 매우 인기가 좋았습니다. 때문에 작품이 그려지는 즉시 미술관에서 재빠르게 구입을 했다고 합니다. 이 무렵 해섬의 작품 제작은 대단했습니다. 친구인 위어가 한 계절에 6점 정도의 작품을 그렸을 때 해섬은 40점을 그렸다고 하니까 그 에너지에 그저 탄복할 뿐입니다.
1920년대 1차 대전이 끝나고 미술시장은 활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리얼리즘의 열기와 입체파, 추상주의의 열풍으로 시장의 흐름이 바뀌면서 해섬의 작품은 정체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에 대한 세상의 평가는 수많은 수상으로 이어졌고 틈틈이 그가 좋아하는 여행도 계속되었습니다. 메리 커셋과 함께 미국에 인상주의를 심은 화가로 평가되는 해섬은 75세로 세상을 떠납니다. 까칠했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을 지킬 수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