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 불교란 무엇인가 】신도수행 안내 - 제4절 참선(參禪) - 4. 간화선(看話禪), 5. 참선수행의 유의점

문성식 2016. 12. 3.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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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도수행 안내】
      제4절 참선(參禪) 4. 간화선(看話禪)
        인도불교가 중국불교로 이어지면서 수행체계에서도 하나의 변화가 있었다. 그것이 이른바 화두(話頭)나 공안(公案)인데 이는 하나의 문제를 깊이 참구하여 그것의 본래 의미를 확실히 깨닫는 간화선으로의 전개인 것이다. 이 수행법은 공안이나 화두를 통해서 수행자로 하여금 큰 의심을 일으키게 하고 스스로 그 의심을 해결하여 깨달음을 얻게 하는 수행법이다. 인도불교의 선정법은 사성제, 팔정도, 12연기 등의 교리의 의미를 수행자가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 데 반해, 중국의 선종에서는 언어보다는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근본 내용의 정확한 의미를 곧바로 찾아 들어가 확인하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따라서 참선은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하여 경전의 가르침에 매이지 말고 그 밖에 길이 있음을 강조한다. 달마대사를 중국선종의 초조(初祖)로 삼아 6조 혜능대사에 이르기까지 선종은 중국에서 번창하였다. 초조 달마스님과 2조 혜가스님과의 만남 이야기는 극적이다. 마음이 괴로워 찾아온 혜가스님에게 달마스님은 “아픈 마음을 가져오라. 그러면 내가 치료해 주겠다”고 일갈한다. 특히 선종에서는 극단적인 모순으로 보이는 말도 서슴지 않고 한다. 중국의 조주스님은 어떤 스님이 와서 물어보기를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니 “있다”고 하였고 다른 스님이 와서 물으면 “없다”고 하여 앞뒤가 다른 대답을 하기도 하였는데, 이런 말이 1,700여 개나 정리되어 공안이나 화두로서 후대 수행자들이 풀어야 할 문제로 남아 있다.
      5. 참선수행의 유의점
        참선수행을 하면서 수행이 제대로 되어지고 있는지 스스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굳이 선지식에게 묻지 않아도 점검이 어느 정도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우선 스스로 마음이 점차 너그러워지고 있는지 좁아지고 있는지 확인하면 된다. 시간이 갈수록 세간사에 담담해지고 공부에 재미가 나면 제대로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점차 남의 허물이 눈에 더욱 잘 보이고 세간사의 시비에 관심이 끊이지 않는다면 점검해 볼 여지가 있다. 또한 배우자나 아이들에게서 우리 남편, 부인 혹은 어머니가 절에 다니더니 사람이 많이 달라졌다는 소리를 들으면 좋다. 그래서 주위의 다른 이에게도 우리 배우자 혹은 어머니처럼 절에 보내라고 추천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더욱 좋다. 절에 다니면 생활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 5년을 다니거나 10년을 다니는데도 전혀 변화의 조짐이 없거나, 주위에서 변화를 느끼지 못한다면 돌이켜 반성할 여지가 있다. 참선을 하는 것은 ‘나’를 없애는 연습이다. ‘작은 나’를 없애고 ‘큰 나’의 입장에서 살아가는 연습인 것이다. 그리하여 부처님 앞에서 겸허해지고 공경심을 갖듯이, 집이나 직장에서 겸허함과 공경심으로 모든 이들을 대할 수 있다면 제대로 수행하는 것이 된다. 궁극적으로 남편이나 직장 상사를 부처님이나 스님 대하듯이 더욱 공경하는 마음으로 대하게 되고, 아랫사람에게 겸허한 태도를 가질 수 있다면 참으로 절에 다니는 보람이요, 진정한 수행이 된다. 이렇게 얘기하면, 상대방이 그럴 만한 자격을 못 갖추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자격과 조건이 되는 이를 공경하기는 쉽다.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일정한 조건을 아직 갖추지 못한 이에게 공경심과 겸허함으로 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야말로 결국 남이 아닌 자기 스스로를 존중하는 귀한 마음가짐으로서, 일상에서 선을 닦는 마음가짐인 것이다. 한편 참선을 제대로 닦는 이라면 복 짓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복에는 유위(有爲)의 복과 무위(無爲)의 복이 있어서, 참선은 무위의 복을 짓는 최상의 수행방법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참선이야말로 무엇보다도 선지식과의 만남을 필수로 하며, 선지식과의 만남은 복 짓는 일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충분히 인식해야 한다. 선지식은 그저 찾아다닌다고 해서 만나지는 것이 아니다. 유위의 복이든 무위의 복이든 열심히 짓다보면 저절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저 자신이 복을 지은 만큼 나타나게 되어 있다. 무한한 복을 지은 이에게는 무한한 선지식이 다가오며, 자그마한 복을 지은 이에게는 자그마한 선지식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선지식이 없다고 탓할 일이 아니라, 자신의 복이 부족함을 인식하고 꾸준히 복을 지어나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