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역사】
제2절 중국불교
2. 불교의 전래 (1)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계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 중에서도, 한나라의 명제(明帝, 58~75년 재위)와 관련된 설화가
가장 널리 전해져 오고 있다.
어느 날 명제가 꿈속에서 금인(金人)의 모습을 한 성인을 만났다.
명제는 그 사람이 붓다라고 불리는 외국의 신(神)임이 틀림없다는 말을 듣고서
인도에 특사를 파견하였다.
몇 년이 지나서 그 특사는 한 사람(일설에서는 두 사람)의 인도인 승려를 대동하고서
한 필의 백마와 『사십이장경』을 가지고 돌아왔다.
황제는 이들을 극진히 환대하고 수도인 낙양 근처에 백마사(白馬寺)를 건립하였다.
하지만 여러 학자들은 불교가 이 설화에서처럼
인도로부터 직접 중국으로 전해졌다는 사실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다.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직접 전해진 것이 아니라,
쿠샤나 제국과 파르티아, 중앙아시아 등지로부터 전래되었으며,
실크로드의 동쪽을 계속 거쳐 오면서 점차 여과되었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앞의 전설에는 역사적 증거를 통해 확신할 만한 약간의 정보를 내포하고 있다.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불교에 대해 언급한 것으로서 신뢰할 만한 최초의 것은
서기 65년에 황태자가 취한 불교신앙에 대한 법령이다.
이 기록은 1세기 중엽의 중국에는 불교식의 어떤 의식(儀式)이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며,
더욱이 명제 치하에서 황실의 일부에서는 불교를 알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또한 『사십이장경』이 알려진 것은 오로지 후대의 개정판 덕분이지만,
그 내용의 일부를 통해서 원래의 판본은 매우 오래된 것이며,
그 연대도 아마 명제의 시대와 같은 시기였을 것임을 알 수 있다.
현재의 백마사 건물은 훨씬 후대에 건립된 것이기는 하지만,
중국에서는 아직까지도 불교의 요람으로서 방문객들에게 안내되고 있으며,
적어도 3세기의 문헌에서는 그 존재가 언급되고 있다.
서기 65년 황태자의 불교활동을 다루는 부분 이외에도
후한(後漢)시대의 사서(史書)에서는 한나라 황실과 관련된 불교에 대해서는
종종 산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 언급들은 모두 성스러운 존재로서의 붓다에 대한 의식이
종교적인 도교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도교에서는 육신을 불멸하게 한다는 도술(道術)을 연구하고 실천하며,
그러한 불멸성을 획득하여 이제는 자신들이 거주하는 천국과 같은 장소에서
신자들의 운명을 인도한다고 믿어지는 어떤 신적 존재들에 대해서 의식을 행하는데,
이러한 점들이 불교와 유사하다고 본 것이다.
도교는 영감을 너무 강조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의존하는 다양한 의식은 도교의 외래적 변형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몇 가지 흥미 있는 고고학적 자료가 그러한 결론을 확신하게 한다.
한나라의 부조물에는 불상이 엄니를 가진 코끼리에 둘러싸여 있는 장면이 있다.
코끼리는 붓다의 전기에 등장하는 동물로서 불교예술에서는 매우 대중화된 소재이다.
그런데 이들 속에는 중국의 신화에서 유래하는 다른 초자연적 생물들도 있다.
불교의 몇몇 관념들이 중국에 맨 처음 출현하게 된 데에는
도교의 종교적 입장이 매개체로서 작용하였다.
관념과 실천에 있어서 불교와 도교 사이에는 표면상 많은 유사점이 있다는 점에서
그러한 결합이 결코 부자연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중국에서 일찍이 성립된 불교문헌들은
불교의 관념을 표현하는 경우에 흔히 도교의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불교에 대한 오해를 깊게 할 뿐이었다.
때로는 두 종교의 창시자가 동일인이라고 볼 정도로 혼동되기도 하였다.
한나라 때의 문헌에서는 ‘노자화호설(老子化胡說)’이라는 이론을 최초로 언급하고 있다.
그 내용은 노자가 서역으로 떠나서 인도 노예들의 낮은 지적 수준을 채택하여
그 자신이 만든 원래의 교의로 그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스스로 붓다의 모습으로 그들 사이에 화현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화는 두 종교 사이에 닮아 보이는 것을 설명하려던 의도에서
비롯되었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이론은 불교적 요소를 도교에 편입시키는 것을 정당화하였고,
또 ‘외국에 있는 도교의 지파’로서 불교를 중국에 전파하는 것을 정당화시켰다.
그러나 몇 세기가 지나서 불교와 도교가 서로 경쟁 상대가 되자,
이 이론은 불교의 전파를 반대하는 근본 쟁점들 중의 하나가 되는 가운데,
노자가 서역에서 화현했다는 설화는 계속 확대되어 갔다.
이러한 대립은 천년 이상 지속되었고,
결국 13세기에 불교 측의 입장을 지지하는 것으로 해결되었다.
불교의 확대는 대규모의 번역활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런데 번역 작업에서 가장 큰 문제는 언어였다.
불교의 무수한 전문어에 상당하는 중국어를 새로 조성해 내야 했고,
또는 중국의 전통적 종교, 주로 도교의 용어로부터 차용해야 했다.
외국의 전법사들은 중국어에 거의 익숙하지 못했고,
산스크리트어나 인도의 방언인 프라크리트어를 아는 중국인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직접적인 번역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이 문제는 ‘역경원’을 구성하여 해결했다.
원어에 정통한 외국의 승려가 문헌을 암송하거나 저술하면,
대개 2개 국어를 사용하는 해석가의 도움으로 1차 번역이 완성되는데,
이것을 나중에 중국인 보조원이 다듬고 교정하여 한자로 기록하여 나갔다.
4세기 말엽까지는 외국의 전법사와 그 제자들에 의해 집단작업이 유지되고 있었으며,
전법사의 작업을 돕는 제자들은 승려와 속인들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불교가 황실과 고급 관료의 후원을 받게 된 5세기 초엽부터는
간혹 12명의 인원이 참여하는 대규모의 번역이 활성화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수세대에 걸쳐 대를 이어 번역활동에 노력하는 사람들이
등장함으로써 불교 번역가라는 특수한 부류가 형성되었다.
이들은 말하자면 중국인들로 구성된 단순 문필가였다.
이들의 번역에는 최초의 판본을 특징짓는 도교의 어휘들을 그대로 차용하는 등,
통속적인 요소들이 뒤섞여 있었다.
그러나 초기 판본의 그러한 어휘들은 점차 보다 정확하고 새롭게 바뀌어 갔다.
수천에 이르는 불교경전과 논서들이 이런 식으로 번역되었고 종종 재번역 되기도 했다.
이미 730년에는 그 수가 2,000종 이상의 문헌들로 증가하였으며,
이들 중의 일부는 네 차례 또는 다섯 차례나 연이어 번역되었다.
후한시대에 ‘낙양(洛陽)의 교단’에서 번역을 위해 선택한 문헌의 범위는
보다 한정되어 있었다.
많은 주의를 쏟았던 것은 선정(禪定)을 다루는 짤막한 문헌들이었다.
정신수행에 대한 고대의 불교적 체계는 명상과 호흡 조절에 있어서
도교의 정신적 육체적 기술과 외형상 뭔가 닮은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시대에는 대승경전에 대한 최초의 한역본도 있었다.
즉 여러 부처들과 보살들의 장엄함과 구제력을 다루는 신앙적 문헌들,
공(空)의 교의나 모든 현상의 보편적 비실재성을 설하는 경전들이었다.
이 중 후자는 후대에 꽃피울 중국불교의 철학에 무한한 영향을 끼치게 될
교의를 담고 있었다.
중국 땅에 형성된 초기불교교단의 실제 조직과 사회적 구성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낙양 교단’의 존재를 알리는 유일한 유물이
봉헌 비명(碑銘)으로서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데,
중국어가 아닌 중부 인도의 방언으로 새겨져 있다.
3세기 중엽 이전에는 율장(律藏)에 대한 번역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가장 근본적인 계율들은 구전되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한 가지 특기할 만한 국면은
중국불교의 특징을 유지하게 될 교의를 전파하는 데 있어서
재가 신도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이다.
한나라시대의 불교는
거의 같은 시기에 로마제국에 널리 퍼져 있던 동방화 된 종교들과 비교할 수 있는데,
그 교의상 다소 외래적이고 이질적인 종류의 문화였다.
하지만 전국적으로 몰아닥친 소요와 군벌주의로 인해 말세적 감정과
불확실성이 뒤섞여 있던 후한시대에 와서는
불교가 상당히 매력적인 종교로 다가왔다.
왜냐하면 불교가 강조한 것이 모든 사물이 무상하고, 모든 존재가 헛것이며,
온갖 위험과 슬픔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삶은 덧없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로써
정신적 수행과 정화를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제례의 의무를 중시하는 유교와
기괴한 술법을 중시하는 도교의 종교적 입장과 비교할 때,
불교가 제시하는 방법은 비교적 단순했고,
불교를 따르는 사람들은 강력하고 자애로운 초자연적 존재에 의해
자신이 보호된다고 믿었다.
아울러 승려들은 독신생활을 고수하면서 자신의 정신활동을 조절하고
점차 모든 형태의 집착을 제거하기 위해 요가와 같이 명상이나
정신집중의 기술을 실수(實修)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러한 내용은 수 세기 동안 중국의 불교적 종교생활의 기본 내용을 이루어 왔다.
교단 전반의 조직이 안정되고 포교가 일반화되기 시작한 것은 4세기 말엽으로,
이때가 되어서야 불교는 중국사회의 교양 있는 상위계급 속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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