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역사】
제1절 인도불교
4. 대승불교 (2)
3) 대승경전
대승불교의 발전과정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붓다의 가르침을 재정비하여 다양한 경전들을 성립시키고
그에 대한 수많은 논서를 편찬했다는 점이다.
대승을 신봉하는 이들은 이러한 경전과 논서를 중심으로
사상을 정립하고 흐름을 확대해 나갔다.
대승경전은 거의 7, 8세기경까지 오랜 시일에 걸쳐서 편찬되었기 때문에
그 수를 헤아리기도 쉽지 않다.
일반적으로 현재 전해지는 한역(漢譯) 경전을 중심으로 볼 때 약 1,200부에 이르며,
티베트어 번역본으로는 약 1,900부에 이를 만큼 방대하다.
대부분의 대승경전은 프라크리트어를 포함한 광의의 산스크리트어로 이루어졌지만,
그 중 대다수의 경전이 현재는 전하지 않으며, 그 일부만 원전이 전해지고 있다.
오랜 기간에 걸쳐서 형성된 다양한 대승경전을 시대적으로 구분할 때
다음과 같이 세 시기로 구분한다. 초기 : 1세기경까지로서, 용수(龍樹) 이전에 해당한다.
중기 : 용수 이후 세친(世親)까지, 2~5세기경까지를 말한다.
후기 : 세친 이후, 6세기부터 밀교, 즉 금강승의 성립기인 7세기경까지를 말한다.
이러한 세 단계의 발전을 거치면서 수많은 경전과 논서를 통해서
대승의 사상은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대승의 경전들을 내용면에서 구분해 보면,
반야부, 법화부, 화엄부, 보적부, 열반부, 대집부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그 주요 내용으로는 붓다와 보살의 지혜를 찬탄하고,
삼매의 수행과 가치를 강조하며, 대보살과 불제자, 재가 불자들의 실천수행,
법공(法空)과 법신진여사상 등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경전의 편찬에서 그치지 않고,
논서를 통해서 그에 대한 치밀한 논의를 펼침으로써 각자의 논지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대승경전이 아함부 경전과 다른 특징 중 하나는
아함부에서 고타마 붓다의 권위를 빌어서 경전을 서술했던 것과는 달리,
법사들 스스로 대승의 교리를 체계화하는 데 치중했으며
붓다의 권위에만 전적으로 기대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대승이 부파불교 또는 원시불교와는 독립적으로
그 사상을 정립하게 된 계기를 만든 것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4) 대승교단의 성쇠
대승불교가 널리 퍼지게 되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주인공들은
바로 설법사(說法師)들이었다.
대승의 시대에 법사들은 스스로 보살도를 수행하면서 대중을 향해 법을 설하고,
대중들은 그 법문을 베껴 쓰고 외우며 널리 펴는 것이 공덕을 쌓는 길이었다.
법사들은 일반적으로 보살이라 불렸으며,
그들은 정법의 수호자이자 교법의 정통적인 전수자로서 그 역할을 다하였다.
1세기경부터 불교 전법사들은 힌두쿠쉬와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포교하기 시작했지만,
인도불교교단은 굽타 왕조의 성립 이후에는 차츰 쇠퇴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하였다.
굽타 왕조는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확립하고
사회질서의 토대가 되는 브라만교를 국교로 정하였다.
그에 따라 브라만교, 즉 힌두교는 급속히 세력을 펼쳐 갔으며,
동시에 불교의 사회적 기반은 약화되었다.
불교교단에서는 중관, 유식학파와 불교논리학파 등의 학문적 성과는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민중들 사이에서는 힌두교가 중심 신앙으로 자리 잡았다.
힌두교의 지배적 위치는 불교를 비롯한 다른 인도 종교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그로 인하여 대승불교교단도 변화를 피할 수 없었다.
더구나 대승을 따르던 재가자들도 인도 일반의 민간신앙과 힌두교의 영향을 받아서
다라니와 무드라, 만다라 등을 신앙방식으로 채용하여
여러 의식을 통해서 실천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양상은 인도불교의 또 다른 발전 양상, 즉 밀교를 성립시키기에 이른다.
인도불교가 국경을 넘어서 드넓게 포교되었던 것과 반비례하여
인도 내에서는 그 세력이 약화되었고
내용면에서도 변용될 수밖에 없었던 연유에 대해서 갖가지 요인들이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가장 첫째로 꼽는 이유는 대승의 교의가 발전을 거듭할수록
보살 수행보다는 불법(佛法)에 대한 논의 자체에 치중하는 경향을 보임으로써
재가자 중심에서 다시 출가자 중심으로 전환되었고,
또한 전문화됨으로써 사실상 민중의 생활과 괴리되고 말았다는 점이다.
인도국경을 넘어 전파된 대승의 교의는
각 나라의 사상과 결합하여 발전적 수용을 가져왔으나,
정작 인도에서는 소승불교가 그러했던 것처럼
대승불교 또한 쇠멸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