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 불교란 무엇인가 】불교의 역사 - 제1절 인도불교 - 2. 초기불교(2)

문성식 2016. 11. 26.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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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의 역사】
      제1절 인도불교 2. 초기불교(2)
        3) 경전의 결집 붓다의 가르침은 그로부터 직접 설법을 들었던 제자들에 의해서 구두로 전해졌다. “나는 이렇게 들었노라(evamㆍmaya- srutam. 如是我聞).” 이와 같은 서두로 그들은 전법을 시작했다. 본래 붓다는 모든 가르침을 구술로 전달했다. 그의 전 생애 동안 자신이 글로 써서 남긴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그의 설법을 들었던 수많은 제자와 신자들은 그의 가르침을 오래도록 보존할 수 있기를 원했으며, 그러한 소망의 결과가 바로 경전으로 남게 된 것이다. 경전편찬은 ‘결집’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결집은 합송(合誦), 합주(合奏), 집회(集會)라고도 한다. 결집의 원어인 상기티(samㆍgI-ti)는 제자들이 한데 모여서 기억하고 있는 가르침을 일제히 읊는 것으로, 이의가 없음을 표시하여 불설(佛說)을 확정하였던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뜻에서 결집은 ‘성전의 편집’을 의미하게 되었다. 요컨대, 경전편찬을 위한 집회가 결집이다. 경전은 바구니에 담아서 보관하던 관습에 따라 세 종류의 바구니, 즉 삼장(三藏)이라 부른다. 삼장은 경장, 율장, 논장으로 구성되는데, 이러한 삼장의 형식으로 불교경전이 완성되기까지는 긴 세월이 걸렸다. 기본적인 경전은 서기 250년경까지 그 대부분이 완성되었는데, 무엇보다도 불교경전은 크리스트교의 바이블이나 이슬람교의 코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양이 방대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제1차 결집 가장 최초의 결집은 붓다의 열반 직후에 이루어졌다. 붓다가 입멸하자 몇 가지 우려가 있었다. 즉 그의 가르침이 차츰 없어진다든가, 잘못 전해진다든가, 이론(異論)이 제기된다든가 하는 등의 일이다. 그래서 이를 방지하기 위해, 또 교단의 권위를 확립하기 위해, 불제자들이 모여 각기 구전으로 기억하고 있던 교법을 함께 합창하여 서로 확인하고 가르침을 정리할 회의, 즉 결집이 이루어졌다. 제1차 결집은 라자그리하에서 500명의 제자들이 모여서 경장과 율장을 편찬하였다. 그래서 ‘500결집’이라고도 한다. 1차 결집은 라자그리하의 교외에 있던 칠엽굴(七葉窟)에서 이루어졌는데, 마하카쉬야파(maha-ka-syapa)의 주도 아래 아난다(a-nanda)가 경장을 암송하였고, 우팔리(Upa-li)가 율장을 암송하였다고 전한다. 이 때 편찬된 내용은 후대 불교사의 지침이 되는 근본 경전으로서 가장 중요시되었다. 경전을 보면, 붓다는 그 당시 귀족층이 사용하던 고급언어였던 산스크리트어뿐 아니라 베다어까지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민중을 상대로 한 교화 설법에서는 주로 속어였던 마가다어를 사용했으리라고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최초의 경전 결집, 즉 제1차 결집 당시에 사용된 언어 또한 마가다어라는 것이 합리적인 귀결일 것이다. 하지만 그에 따른 근거는 현재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초기 경전 언어로서 기록이 남아 있는 팔리(pa-li)어 속에 몇몇 잔형이 남아 있을 뿐이다. 제2차 결집 기원전 383년경 제2차 결집이 이루어졌다. 바이샬리(Vaisa-lI-)결집 또는 700결집이라고도 불린다. 붓다의 입멸 후 100년경, 아난다의 제자였던 야사(Yasa, 耶舍) 비구는 바이샬리의 브리지족 출신의 비구들이 계율에 위반되는 10가지를 실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700명의 비구들을 바이샬리에 소집하여 그러한 10가지에 대해 심의했다. 그 때 회의에서는 10가지의 사안, 즉 ‘10사(事)’가 옳지 않은 일이고, 그것을 행하는 자는 이단이라고 간주하였다. 하지만 팔리 율장에서는 10사를 심의했다는 기록만 남아 있을 뿐이다. 스리랑카의 왕통사(王統史)인 『디파방사(DI-pavamsa)』와 『마하방사(Maha-vamsa)』에는 이 심의 다음에 성전의 결집을 행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이때의 일을 제2차 결집이라고 부른다. 그 당시에 논의되었던 10사는 다음과 같다.
          첫째, 소금을 뿔 속에 담아서 지니는 것. 둘째, 정오가 지난 뒤 공양하는 것. 셋째, 한 마을에서 탁발을 한 뒤 다른 동네에서 탁발하는 것. 넷째, 한 구역에서 포살을 두 곳 이상 나누어서 하는 것. 다섯째, 어떤 일을 하고 나서 나중에 허가를 받는 것. 여섯째, 선사(先師)들의 행적을 관행으로 삼아 따르는 것. 일곱째, 공양 후에 발효된 우유를 마시는 것. 여덟째, 발효된 과즙을 마시는 것. 아홉째, 앉거나 눕는 자리 깔개를 사용하는 것. 열째, 금이나 은을 시주 받는 것.
        이상의 열 가지가 모두 정법(淨法)으로서 범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던 이들에 대해서, 결집을 통해서 모두 비법(非法)이라고 결의하였던 것이다. 다만 아난다의 직제자로서, 그 당시 법랍 120년에 이르던 최고의 장로 사르바카마는 9가지는 비법(非法)이지만, ‘선사(先師)들의 행적을 관행으로 삼아 따르는 것’은 경우에 따라 인정할 수도 있다고 판정하였다고 전한다. 이로써 그에 대한 논의가 얼마나 분분하였던가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하여 율에 대한 해석의 차이는 더욱 첨예한 대립을 낳았고, 분파를 야기시키는 큰 요인으로서 작용하게 되었다. 또한 제1차 결집은 단순히 경과 율의 결집이었으나, 제2차 결집은 율에 대한 해석이라는 점에서 그 성격상 차이가 난다. 제3차 결집 아쇼카 왕은 인도대륙 전역을 하나의 통치권 아래 지배했던 최초의 제왕으로 유명하다. 그는 강력한 무력 통치권을 기반으로 하여 인도대륙을 하나의 정치적 통합체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피비린내 나는 정복전쟁을 거듭하던 아쇼카 왕은 기원전 260년경 불교도로 전향했다고 알려져 있다. 불교에 귀의하기 전에 아쇼카 왕은 부왕이었던 빈두사라 왕이 그랬듯이, 아지비카 교도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불교에 귀의한 뒤, 불살생의 원리를 실천하고 공평무사한 정책을 통해서 만인의 인심을 얻은 아쇼카 왕이 불교를 위해 공헌한 일들은 지대하다. 수많은 불교승원과 기념탑을 세웠고, 불교도를 위해서 후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몸소 붓다의 유적을 찾아가서 참배하였다. 여러 왕비들이 낳은 자녀들은 출가하여 수행자가 되었는데, 그들을 곳곳에 전법사로 파견하였다. 이와 같이 불법을 널리 펴던 아쇼카 왕이 즉위 17년째 되던 해, 마가다국의 수도였던 파탈리푸트라(Pa-tㆍaliputra, 華氏城)에서 목갈리풋타팃사(Moggaliputtatissa)의 주도로 1,000명의 비구를 소집하여 결집을 행하였다. 이를 1,000결집, 화씨성 결집, 1,000집법(集法) 등으로 부른다. 제3차 결집에서는 인도 자체와 스리랑카 등의 외국에 정통 교의를 전하는 성전을 편찬했으며, 논서들을 논장(論藏)으로 집성함으로써 비로소 3장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이와 같이 3장을 편찬하는 데 총 9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특히 목갈리풋타팃사는 별도로 『카타밧투(Katha-vatthu, 論事)』를 지어서 그릇된 견해를 논박했다. 이러한 사실은 남전(南傳)의 율장(律藏)이나 『마하방사』와 『디파방사』 등에 기록되어 있다. 제4차 결집 서북 인도를 지배하던 카니슈카 왕(서기 73~103년 재위) 시대에 『아비달마대비바사론』을 편집했던 일을 가리켜 제4차 결집이라 말한다. 현장(玄斡) 스님이 번역한 『아비달마대비바사론』의 「발(跋)」에 의하면, 제4차 결집은 불멸 400년경에 카슈미르(KasmI-ra)의 환림사(環林寺)에서 이루어졌다. 파르슈와(Pa-rsva) 존자가 카니슈카 왕에게 건의하여 후원을 받아내서 3장에 정통한 500명의 비구들을 소집하여 결집을 행하였다. 그 때 집대성된 것이 총 30만 송(頌) 660만 언(言)에 달하는 대주석서 『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毗達磨大毘婆沙論)』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