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정스님 어록

산방한담(山房閑談) / 맑은 기쁨

문성식 2016. 1. 4. 10:09

 
      맑은 기쁨 저녁 예불을 마치고 앞마루로 나가다가 이제 막 떠오르는 열나흘 달을 보았다. 구름 한점 없이 맑게 개인 하늘가, 앞산 마루 위로 떠오르는 둥근달을 보고 너무 반가와서 월광보살(月光菩薩)을 뇌이면서 두 손을 마주 모았다. 여름날 해거름에 더욱 부드럽고 아련하게 보이는 앞산 능선 위로 떠오르는 달은 사뭇 환상적이다. 우리네 고전적인 표현에 달덩이같이 예쁜 얼굴이란 말이 있는데, 소박하면서도 적절한 묘사인 것 같다. 오랜만에 떠오르는 달을 바라보니 그저 고맙고 기쁘다. 뒷숲에서 소쩍새가 운다. 쭉쭉쭉쭉 머슴새도 운다. 산은 한층 이슥해진다. 이럴 때 나는 홀로 있음에 맑은 기쁨을 누린다. 억지소리 같지만, 홀로이기 때문에 많은 이웃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다. 어디 사람만이 이웃이랴. 청청한 나무들과 선한 새와 짐승들, 그리고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는 맑은 바람과 저 아래 골짝에서 울려오는 시냇물 소리가 정다운 내 이웃일 수 있다. 나는 이런 이웃들로 인해 살아가는 기쁨과 고마움을 누릴 때가 많다. 물론 사람에 따라 살아가는 기쁨도 여러가지 일 것이다. 몇억 불의 수익으로 삶의 보람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 이삼백 장의 연탄을 들여놓고도 행복을 누리는 욕심없는 어진 사람들이 있다. 시골 우체국 집배원으로 만족하면서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한 나라의 통치권력을 한 손에 쥐고 흔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우리처럼 산골에 묻혀서 사는 덜된 사람들은 둘레의 지극히 사소한 일들 속에서 삶의 잔잔한 기쁨을 찾는 수가 있다. 이를테면, 고무줄로 된 허리띠가 탄력을 잃고 느슨해져서 자꾸만 바지가 흘러내리는 바람에 성을 가셔 하다가, 어느 날 새 허리띠로 갈아낀 다음의 그 든든함. 이것도 조그만 행복일 수 있다. 부엌문을 여닫을 때마다 삐이그덕 거리는 그 소리에 신경이 곤두서곤 했는데 어느날 문득 생각이 떠올라 초토막을 녹여서 돌쩌귀에 바른 뒤부터는, 아무 소리 없이 부드럽게 여닫히는 걸 보고 빙그레 회심의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일 또한 내 조그마한 행복이다. 장마가 개인 뒤 무성하게 자란 풀을 낫으로 베다가 풀섶에 가려진 커다란 호박을 보았을 때, 그야말로 이거 웬 호박이냐는 경우도 살아가는 기쁨이다. 산너머에서 우르렁 거리는 천둥소리를 듣고 뜰에 나가 비설겆이를 하고나자, 금새 까맣게 소낙비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느긎해진다. 소나기가 지나간 뒤 생기에 차서 너울거리는 나뭇잎을 바라보는 일 또한 즐겁다. 복더위에 극성을 떠는 요즘 점심공양 끝에 한소끔씩 낮잠을 잔다. 경기도 광주 곤지암에 있는 보원요(寶元窯)의 김기철님이 나를 위해 만들어준 도침(陶枕)을 베고 누워 있으면 맑은 솔바람 소리가 들린다. 처음에는 딱딱해서 자꾸만 뒤척거렸는데 길이 드니 시원한 그 맛에 푹신한 베개가 도리어 답답해졌다. 처음 박물관에서 도자기로 된 베개를 보고 옛사람들의 생활의 운치를 기리면서 부러워했는데, 시절인연이 도래하여 조그만 그 소원이 내게도 이루어졌다. 도침에서 깨어나면 머리가 씻은 듯이 맑다. 이 또한 조촐한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불일(佛日, 스님이 홀로 지내시던 송광사 뒤 쪽에 자리한 조그만 암자 불일암)의 지붕에는 많은 새들이 나와 함께 산다. 7년 전 이 암자를 다시 지을 때 연함(椽檻) 때문에 속이 좀 상했었다. 연함이란, 서까래 끝의 평교대 위에 기왓골을 받치기 위해, 암키와가 놓일 만하게 반달 모양으로 에어낸 나무를 말한다. 이 연함을 두고 목수와 와공(瓦工)이 서로 자기 할 일이 아니라고 미루다가 결국 연장을 가진 목수가 파게 되었는데, 목재를 잘못 골라 기와와 연함 사이가 골마다 틈이 생기게 되었다. 이 틈에 산새들이 들어와 살게 된 것이다. 주로 할미새와 비비새가 산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군불을 지피러 부엌에 들어가려다가 새 새끼가 한 마리 땅에 떨어져 오들오들 떨고 있는 것을 보았다. 솜털이 보얀 비비새 새끼였다. 새집에서 굴러 떨어졌거나 아니면 너무 서둘러 나는 연습을 하다가 떨어졌는지도 모른다. 안스러워 손으로 만지려고 하니 입을 벌려 짹짹거리면서 비실비실 피했다. 그 소리를 듣고 어느새 어미새 두 마리가 가까이 날아와 나를 경계했다. 군불을 지피고 나서도 어린 생의 일에 마음이 쓰여 한쪽에 돌아서서 유심히 살펴보았다. 어미새가 이따금씩 날벌레를 물어와 새끼에게 먹이는데 바로 먹이지 않고 몇차례씩 입에 넣었다가 빼었다 하면서 조금씩 나는 연습을 시켰다. 두 마리 새가 번갈아 가면서 이렇게 하기를 꼬박 이틀을 하더니 마침내 비상(飛翔). 새끼새가 제 힘으로 날아가게 되었다. 이 광경을 지켜본 나도 어깨를 활짝 펴고 숨을 크게 쉴 수가 있었다. 새들의 지극한 모성애에 소리없는 박수를 보내주었다. 꾀꼬리, 뻐꾸기, 소쩍새, 밀화부리 같은 철새들이 제철에 이르러 첫인사를 보내올 때, 그 설레는 반가움은 산에서 사는 사람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내 수첩에는 이런 일이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해마다 5월 초에 꾀꼬리와 뻐꾸기는 하루 이틀 사이를 두고 찾아온다. 그런데 금년에는 뻐꾸기가 한 주일이나 늦게 오는 바람에 무슨 일인가 하고 몹시 궁금했다. 5월 11일 차밭에서 차를 따다가 뻐꾸기의 첫인사를 받고서야 마음이 놓였다.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는 목청으로 밀화부리가 노래할 때 나는 곧잘 휘파람으로 화답을 해준다. 꾀꼬리도 휘파람으로 소리해주면 제 친구인가 해서 자꾸만 가까이 날아오면서 노래를 한다. 이 또한 살아가는 기쁨이 아닌가. 요즘에는 토끼가 대숲과 모란밭 사이를 자주 뛰어다닌다. 토끼를 보면 <옹달샘> 노래가 내 귓전에 아직도 들린다. 재작년 어느 여름날 아침, 큰절에서 수련중인 순천여상 학생들이 올라와, 아침 이슬 같은 영롱한 목소리로 합창을 하고 간 노래가 이 옹달샘이다. 깊은 산속 올담샘 누가 와서 먹나요 새벽에 토끼가 눈 비비고 일어나 세수하러 왔다가 물만 먹고 가지요. 그렇다. 이 노래처럼 샘으로 물 마시러 오는 토끼를 볼 때가 더러 있다. 세수도 하는지 물만 먹고 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런 무심한 짐승들과 같은 산속에서 산다는 것은 조촐한 복이 아닐 수 없다. 지금 밖에는 휘영청 밝은 달이 처마 끝에 외등처럼 걸려 있다. 잠든 숲에 시낸물 소리만 깨어 있다. 밤 시냇물 소리, 그것은 쉬지 않고 흐르는 세월의 소리인가. 달하 노피곰 도다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ㅡ 산방한담(山房閑談) 월간 맑고 향기롭게 1995년 09월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