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정스님 어록

산방한담(山房閑談) / 시들지 않는 꽃

문성식 2016. 1. 4. 09:58

 
      시들지 않는 꽃 종단에 행사가 있어 어떤 거사(居士)가 한 노스님 옷깃에 꽃을 달아드리려고 했다. 노스님께서 거사에게 물었다. "이것은 무슨 꽃인고?" "시들지 않는 꽃입니다." "그래? 어디 그 꽃씨 나 좀 주어." 이 물음에 거사는 대답이 없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각기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 목소리와 눈빛이 다르고 식성이며 취미며 기능과 성격을 달리하면서 자신의 특성을 드러내고 있다. 전화번호부에는 똑같은 이름이 무수히 박혀 있지만, 그 이름의 주인은 저마다 다르다. 만약 똑같은 사람이 여럿 있다면 큰 혼란이 일어날 텐데 그러지 않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서로가 지은 업(業)이 다르기 때문에 각기 다른 모습을 띠고 있다고 보면 그만이지만, 개인의 존재 의미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각각 다른 개성과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자기의 특성을 일깨우면서 자기답게 살라는 뜻이 아닐까. 자기답게 삶으로써 개인의 존재 의미를 구현하고 나아가 우주적인 조화(調和)를 이룰 수 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의 여러 가지 환경은 개인의 특성이 펼쳐지기 어렵도록 되어가고 있다. 범속한 동질화(同質化) 현상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TV프로를 보면서 비슷비슷한 흥미와 관심을 갖는다. 슈퍼마켓에서 파는 비슷비슷한 그릇과 식료품을 사용하면서 서로가 닮아간다. 출퇴근 시간의 만원버스 안에서 시달리면서 한결같이 표정이 없는 굳은 얼굴로 변해 간다. 아파트라는 획일적인 주택 공간 안에 살면서 비슷비슷한 생태들을 익히게 된다. 이와 같이 오늘 우리들은 개인의 특성을 펼쳐보지 못한 채 선택을 당하면서 주택단지의 집들처럼 서로가 닮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양한 통일로 이루어질 조화를 잃고 있다. 조화란 가장 건전한 상태를 말한다. 신체적인 조화는 화락한 가정을, 사회적인 조화는 건전한 사회를 이루는 법이다. 조화가 깨뜨려지면 개인의 존재 의미도 무력해지게 마련이다. 식물의 세계를 유심히 관찰해 본 사람이면 알 것이다. 나무들은 자기의 특성을 뿜어내면서 울창하고 싱싱한 숲을 이루고 있다. 꽃들은 저마다 자기 빛깔과 향기와 모양을 지니면서 아름다운 화단을 이루고 있다. 결코 닮으려고 하지 않는다. 닮으려고 하면 이내 시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인 우리는 어째서 자기 특성을 접어둔 채 서로가 닮으려고만 하는가. 창조적인 노력 없이는 대하(大河)처럼 도도히 흐르는 획일(劃一)과 범속(凡俗)의 강물에 휩쓸리지 않을 수 없는 오늘이다. 선가(禪家)에 전해지는 것으로 다음 같은 글이 있다. 丈夫自有衝天志 장부자유충천지 不向如來行處行 불향여래행처행 '사람은 저마다 하늘이라도 찌를 기상이 있는데 어째서 남을 닮으려고 하느냐'는 꾸짖음이다. 그것이 설사 부처님이나 조사라 할지라도 그 길을 따르지 말고 너 자신의 길을 가라는 것. 그래야 비로소 대장부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임제(臨濟) 스님은 이렇게 사자후(獅子喉)를 토한다. "그대가 바른 견해를 얻으려면 남한테 붙잡히지 말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나 나한(羅漢)을 만나면 조사나 나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척이나 권속을 만나거든 친척과 권속을 죽여라. 그래야만 비로소 해탈을 하여 그 어떤 것에도 구애를 받지 않고 자유자재하리라." 타인을 닮으려고 하거나 남에게 의존하면 그에게 붙잡혀서 자기 자신이 지닌 특성을 잃는다. 어디에도 거리낌 없이 철저한 자유인(無位眞人)이고자 한 임제 선사는 전총이나 스승까지도 극복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존재 의미를 확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진정한 수행이란 따로 보태고 덜고 할 것 없이 자신이 지닌 본래의 건강을 회복하는 일이다. 그러기 대문에 그는 부처로써 구경(究竟)을 삼지 말라고 했다. 부처나 조사라 할지라도 그들은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 부처를 목적시하면 거기에 결박당해 자신이 지닌 특성(佛性)을 일깨울 수 없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부처를 구한다면 그는 부처를 잃을 것이다. 누가 도를 구한다면 그는 도를 잃을 것이다. 누가 조사를 구한다면 그는 조사를 잃을 것이다." 그가 바란 것은 진정한 견해, 즉 정견(正見)이다. 그는 견성도 화두도 말하지 않았다. 부처나 조사를 내세우지도 않았다 . 오직 바른 견해만을 강조했을 뿐이다. 바른 견해야말로 시들지 않고 영원히 필 수 있는 꽃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든 노스님과 거사의 말은 효봉 스님과 김한천 거사가 주고받은 문답이다. 물론 시들지 않는 그 꽃씨가 아니다. 우리들이 본래부터 스스로 지니고 있는 원천(源泉)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단순한 생물적인 생활로만 그칠 수 없다. 저마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그 꽃씨를 피움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끝없이 확대하고 심화시켜야 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에게 부여된 그 특성을 일상(日常)에 오염됨이 없이 가꾸어 꽃피울 수 있어야 한다. 이일은 범속한 동질화의 시류(時流)를 거부하고, 창조적인 노력을 통해 자기답게 사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뜰이다. 시들지 않는 그 꽃이 여기저기서 피어날 때 세상은 오늘처럼 막막하지 않고 환하게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월간 맑고 향기롭게 1995년 08월 ㅡ 법정 스님<산방한담(山房閑談> 중에서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