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제874호 이충원 호성공신교서(李忠元 扈聖功臣敎書)
종 목 |
보물 제874호 |
명 칭 |
이충원 호성공신교서(李忠元 扈聖功臣敎書) |
분 류 |
기록유산 / 문서류/ 국왕문서/ 교령류 |
수량/면적 |
1축 |
지정(등록)일 |
1986.10.15 |
소 재 지 |
경기 성남시 |
시 대 |
조선시대 |
소유자(소유단체) |
이용선 |
관리자(관리단체) |
한국학중앙연구원 |
선조 37년(1604) 10월에 이충원에게 상장과 훈장을 내린 교서이다. 명주에 두꺼운 선지를 포개 붙여 만든 것으로 가로 230cm, 세로 36cm의 두루마리이며, 앞뒤 공백인 부분까지의 길이는 총 298.3cm이다. 임진왜란 평정에 큰 공훈을 세운 사람들에게 내려진 훈호는 호성(扈聖) ·선무(宣武) 두 가지로 나누고 있는데, 임진왜란 당시 서울에서 의주까지 시종 왕을 호종한 사람을 호성공신으로, 왜병을 정벌한 장수들과 원병과 양곡 요청을 위해 명나라에 왕래한 사신을 선무공신으로 책봉하였다. 이충원의 공적 사례, 공신에 대한 포상과 특전, 공신의 명단, 사실증명 등을 차례로 적고 있는데, 이충원은 2등 12번째로 기록되어 있다. 이 교서는 이충원 개인의 전기적 자료로서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이며, 조선 전기 4대 명필의 한사람인 한석봉의 글씨로 쓰여졌다는 점에서 예술적 가치 또한 높이 평가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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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설명 |
선조 37년(1604) 10월에 이충원에게 상장과 훈장을 내린 교서이다. 명주에 두꺼운 선지를 포개 붙여 만든 것으로 가로 230cm, 세로 36cm의 두루마리이며, 앞뒤 공백인 부분까지의 길이는 총 298.3cm이다.
임진왜란 평정에 큰 공훈을 세운 사람들에게 내려진 훈호는 호성(扈聖) ·선무(宣武) 두 가지로 나누고 있는데, 임진왜란 당시 서울에서 의주까지 시종 왕을 호종한 사람을 호성공신으로, 왜병을 정벌한 장수들과 원병과 양곡 요청을 위해 명나라에 왕래한 사신을 선무공신으로 책봉하였다.
이충원의 공적 사례, 공신에 대한 포상과 특전, 공신의 명단, 사실증명 등을 차례로 적고 있는데, 이충원은 2등 12번째로 기록되어 있다.
이 교서는 이충원 개인의 전기적 자료로서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이며, 조선 전기 4대 명필의 한사람인 한석봉의 글씨로 쓰여졌다는 점에서 예술적 가치 또한 높이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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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설명 |
선조 37년(1604) 10월에 이충원에게 상장과 훈장을 내린 교서이다. 명주에 두꺼운 선지를 포개 붙여 만든 것으로 가로 230cm, 세로 36cm의 두루마리이며, 앞뒤 공백인 부분까지의 길이는 총 298.3cm이다.
임진왜란 평정에 큰 공훈을 세운 사람들에게 내려진 훈호는 호성(扈聖) ·선무(宣武) 두 가지로 나누고 있는데, 임진왜란 당시 서울에서 의주까지 시종 왕을 호종한 사람을 호성공신으로, 왜병을 정벌한 장수들과 원병과 양곡 요청을 위해 명나라에 왕래한 사신을 선무공신으로 책봉하였다.
이충원의 공적 사례, 공신에 대한 포상과 특전, 공신의 명단, 사실증명 등을 차례로 적고 있는데, 이충원은 2등 12번째로 기록되어 있다.
이 교서는 이충원 개인의 전기적 자료로서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이며, 조선 전기 4대 명필의 한사람인 한석봉의 글씨로 쓰여졌다는 점에서 예술적 가치 또한 높이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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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운 선지(鮮紙)에 명주(明紬)를 접착하여 만든 폭(幅)(세로) 36㎝, 길이(가로) 230㎝의 두루마리이다. 전부(前部)와 후미(後尾)의 공백된 부분을 포함한 길이는 총 298.8㎝인데, 그 중에 전부(前部) 36.4㎝, 후미(後尾) 22㎝ 가량은 감색(藍色)이며 후미(後尾)에는 목재(木材)로 만든 길이 43.6㎝, 지름 2.4㎝의 축(軸)이 있다. 전곽(全郭)이 주사란(朱絲欄)으로 상하(上下)는 34.4㎝이고 매간(每間)은 2.5㎝이다. 해서(楷書)로 총 60행(行)에 걸쳐 묵서(墨書)되어 있고 자수(字數)는 일정치 않다. 말미(末尾) 년(年). 월(月). 일(日)위에 정방형(正方形)의「시명지보(施命之寶)」란 어보(御寶)가 찍혀 있다. 배면(背面) 우측하부(右側下部)에 세로 8.9㎝, 가로 3.4㎝ 크기의 양질저지(良質楮紙)를 붙이고 '이정혐(혐)제(製), 한호(韓濩) 서(書)'라고 두 줄로 병서하여, 이 공신교서(功臣敎書)의 제진자(製進者)와 필사자(筆寫者)를 밝히고 있다.
공신교서(功臣敎書)는 만력(萬曆)32년 즉 선조(宣祖)37년(1604) 10월에 국왕(國王)이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선조(宣祖)의 파천(播遷)에 호종(扈從)한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等)인 완양부원군(完陽府院君) 이충원(李忠元)(중종 32년, 1537∼선조 38년, 1605)에게 내린 교서(敎書)이다.
이충원(李忠元)의 자(字)는 원보(元甫), 호(號)는 송암(松庵) 또는 여수, 본관(本貫)은 전주(全州)이며, 덕천군(德泉君) 후생(厚生)(정종(定宗)의 10자(子))의 현손(玄孫)이다. 1566년(명종21)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壯元), 수찬(修撰) ·대간(臺諫) ·승지(承旨) 등을 지내고,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형조참의(刑曹參議)로 왕(王)을 호종(扈從)하고 돌아와 형조참판(刑曹參判)에 특진(特進)되었다. 그 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한성판윤(漢城判尹)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역임하고,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으로 완양부원군(完陽府院君)에 봉해졌다. 형판(形判)으로 있을 때 명(明)의 주사(主事) 정응태(丁應泰)가 우리나라를 명(明)에 무함(誣陷)할 때 이를 변명하는 정문(呈文)을 흠차감군(欽差監軍)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시호(諡號)는 충헌(忠憲)이며 영정(影幀)이 전한다.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이 공신교서(功臣敎書)는‘교(敎) 충근정량교절협책호성공신(忠勤貞亮效節協策扈聖功臣) …… 이충원서(李忠元書)’란 제하(題下)에 대략 5개 문단으로 구성되었다(이런 형태(形態)의 교서(敎書)는 이미 좌리공신교서(左理功臣敎書)(1471)에도 나타나고 있다).
첫째, 공신(功臣)의 공적사례(功績事例)로 이충원(李忠元)의 천품(天稟) ·자질(資質)과 탁월한 문예(文藝), 역관사실(歷官事實)을 서술하고, 다음에 임란(壬亂) 때 진충(盡忠)하여 국난을 회복한 공을 찬양하고 있다.
둘째, 공신(功臣)의 특전(特典)으로 호성(扈聖)2등(等)인 이충원(李忠元)에게 내려지는 특전(特典) 및 상사(賞賜)를 구체적으로 적고 있다. 상사중(賞賜中)‘표리일단(表裏一段)’은「선조실록(宣祖實錄)」의 상사예규(賞賜例規)에는 없는 것으로 규정(規定) 이외에 특별(特別)히 사급(賜給)한 것으로 여겨진다.
셋째, 공신(功臣)과의 맹서(盟誓)로 왕(王)이 공신(功臣)에게 국가(國家)의 존립(存立)과 함께 영원히 휴척(休戚)을 같이 할 것임을 맹세하고 있다.
네째, 공신(功臣)의 명단(名單)으로 1등에 이항복(李恒福) 등 2인(人), 2등에 신성군(信城君) 후(珝) 등 33인(人), 3등에 정탁(鄭琢) 등 53인(人), 총89명의 공신명단(功臣名單)을 3단으로 적고 있다. 이충원(李忠元)은 2등 12번째에 기록되어 있다.
다섯째, 사실증명(事實證明)으로‘만력삼십이년십월(萬曆三十二年十月) 일(日)’이라 하여 반급(頒給) 년월(年月)을 적고 그 위에 어보(御寶)를 찍어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평정(平定)에 큰 공훈을 세운 이들에게 내려진 훈호(勳號)는 호성(扈聖) ·선무(宣武) 두 가지로 나누고 있다. 당시 훈호(勳號) 심정시(審定時), 서울에서 의주(義州)까지 시종 왕(王)을 수종(隨從)한 사람을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정왜제장(征倭諸將) 및 원병(援兵)과 양곡(糧穀) 요청을 위해 명(明)에 왕래(往來)한 사신(使臣)을 선무공신(宣武功臣)에 책록(策錄)하고, 또 각 3등으로 나누어 훈호(勳號)와 상사(賞賜) 등을 다소 달리하였다. 이 봉공대상자(封功對象者)와 훈호(勳號)등은 선조(宣祖)37년 갑진(甲辰)(1604) 6월에 이미 결정되었으나 실제 공신교서(功臣敎書)를 각공신(各功臣)에게 반급(頒給)한 것은 4개월(個月) 뒤인 10월이다.
조선(朝鮮)이 개국한 이래 태조(太祖)1년(1392)의 개국공신(開國功臣)을 비롯하여 공신의 마지막인 영조(英祖)4년(1728)의 분무공신(奮武功臣)에 이르기까지 약 340년간에 무려 28개의 공신이 책록(策錄)되었는데, 그 중에 호성(扈聖) ·선무(宣武) 양공신(兩功臣)은 외(外)(왜(倭))적(敵)을 물리치고 국토를 회복하였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다른 공신(功臣)과는 달리, 오늘까지 특히 중요시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공신교서(功臣敎書)는 임란사연구(壬亂史硏究)의 사료인 동시에 이충원(李忠元)의 전기(傳記)이기도 하거니와, 특히 조선전기(朝鮮前期) 사대명필(四大名筆)의 한 사람인 석봉(石峯) 한호(韓濩)의 글씨란 점에서 그 예술적인 가치 또한 높이 평가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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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양부원군이충원호성공신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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