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75.jpg 조선 중기의 의병장 최문병이 사용하였던 안장. 길이 56cm, 너비 39cm, 높이 34cm.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최문병(崔文炳)이 사용하던 안장(鞍裝)으로서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등자(등子)·배띠·고드개 등 부속품들을 모두 갖추었다.

 

최문병(崔文炳)은 ?∼1599(선조 32). 조선 중기의 의병장.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일장(日章). 호는 성재(省齋).

자인에 살면서 학문에 힘쓰다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리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천장산(千丈山)에서 적의 침입을 격퇴하였으며, 다시 청도의 의병장 박경전(朴慶傳)과 합세하여 두곡(杜谷)·선암(仙巖)·가지현(佳旨縣) 등지에서 적을 무찔렀다.

이어 다시 권응수(權應銖)와 합세하여 영천의 적을 물리친 공으로 1593년에는 동지중추부사 박진(朴晋)의 상주로 인하여 감목관(監牧官)이 되었다. 뒤에 한성부우윤에 추증되었고, 자인의 충현사(忠賢祠)에 제향되었다.

 

앞뒤 안교(鞍橋)는 나무로 윤곽을 잡고, 가는 골제(骨製)로 복륜(覆輪)을 붙였으며 쇠로 고정시켰다. 앞뒤 안교의 바깥쪽에는 고슴도치 가죽을 씌우고 세 곳에 역시 골편(骨片)으로 꽃모양 장식을 만들어 붙였다.

안교의 아래쪽은 둥글려서 파내고 그 테두리에도 골편을 붙였으며, 말다래가 달린 안장자리는 가죽으로 만들었는데, 안장자리의 크기는 가로 105cm, 세로 26cm가 된다. 등자는 철제이고 발디딤은 둥근 모양으로 되었다. 그리고 배띠와 고들개는 마포(麻布)와 면직(綿織)으로 되었다.

이 안장금구들은 비교적 완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희귀한 마구(馬具)로서, 괴목제(槐木製)의 책상과 저지(楮紙)로 만든 지함(紙函)이 함께 전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