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43.jpg 1402년(태종 2)에 성석린(成石璘)에게 내려진 왕지(王旨).

 

고려 후기부터 조선 전기까지 문신을 지낸 성석린(1338∼1423)에게 내려진 왕지이다. 성석린은 공민왕 6년(1357)에 과거에 급제하여, 국자학유, 사관 등을 거쳐 조선시대에는 성균관사성, 제학, 영의정 등의 벼슬을 했다. 태조 이성계의 옛 친구로 태조와 태종 이방원을 화해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이 교지는 태종 2년(1401) 제 2차 왕자의 난(방간의 난) 때 난을 평정하고 태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 공로로 익대좌명공신 3등에 봉해지면서 받은 왕지이다. 이 왕지에 쓰인 관직명을 보면 고려말 조선초에 관직이 함께 같이 쓰이고 있으며, 그 위에는 발급한 년월일과 ‘조선국왕지인’이라는 옥새(임금의 도장)가 찍혀있다. 명나라로부터 보내온 금인(金印)으로 추정된다. 판체는 초서체이며, 종이질은 장지(壯紙:우리나라에서 만든 두껍고 질긴 큰 종이)이고, 가로 61.1㎝, 세로 32㎝ 정도의 크기이다.

 

성석린은 1401년에 왕자 방간(芳幹)의 난을 평정하고 태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 공로로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 3등에 녹훈되어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에 봉해졌다. 1402년 10월에는 영의정부사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11월 17일에는 영의정부사겸판개성유후사사(領議政府事兼判開城留後司事)로 임명되었는데, 이 왕지는 바로 이에 대한 사령장이며 다음날인 18일자로 수여된 것이다.

 

전문(全文)은 다음과 같다. 왕지(王旨)성석린위수충동덕익대좌명공신대광보국숭록대부영의정부사겸판개성유후사유후사수문전대제학영춘추관사창녕부원군자(成石璘爲輸忠同德翊戴佐明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領義政府使兼判開城留後司留後事修文殿大提學領春秋館事昌寧府院君者)홍무삼십오년십일월십팔일(洪武三十五年十一月十八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