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화

프란체스코 아예스 - 낭만주의의 관능

문성식 2016. 2. 23. 19:49

 

프란체스코 아예스(Francesco Hayez, 1791-1882)

 

인상주의와 사실주의를 거슬러 올라가면 낭만주의를 만나게 됩니다. 저의 경우 무슨 주의, 무슨 파 하는 것이 그림을 읽는 데 도움이 되기보다는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는 사냥꾼 같아 여간 껄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시대와 연결되어 있으니 피할 수는 없습니다. 낭만주의 그림들의 주요 주제는 역사나 신화가 많아서 보기에는 좋으나 그림 속 이야기를 모르면 이것 또한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탈리아의 낭만파 화가 프란체스코 아예스(Francesco Hayez, 1791-1882)의 그림 속 이야기를 읽어보겠습니다. (화가의 이름에 대해 우리나라 번역서에는 아예스와 아예츠로 된 것이 있는데 아예스를 따르기로 했습니다.)

키스 The Kiss, 1859

아예스의 작품 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입니다. 중세 복장을 한 연인들의 감미로운 키스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연극이나 오페라의 한 장면 같기도 합니다. 계단을 향해 남자는 한 발을 올려놓았습니다. 이별의 길을 가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밀회가 끝나고 같이 나가기 전, 마지막 키스를 하는 것인지 현장에 없었으니 알 도리가 없지만 그 달콤함은 충분히 느껴집니다. 개인적으로는 키스가 참 좋습니다.. 서로의 영혼을 주고받는 느낌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작품이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강한 동맹관계를 상징하는 것이라는 해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키스는 서로를 감시하는 키스가 되는데, 그건 키스가 아니죠.

아예스는 프랑스인 아버지와 베네치아 근처 무라노 섬 출신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다섯 아이 중 막내였는데 집안은 가난했습니다. 1950~60년대 가난했던 시절의 우리가 잘사는 친척집에 아이를 맡겼듯이 아예스도 이모 집에서 자랐습니다. 이모부는 배를 가지고 있었고 예술품을 수집하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리날도와 아르미다 Rinaldo and Armida, 1812~1813

그림 속 남자의 이름은 리날도, 여인은 아르미다입니다.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의 한 장면이죠. 십자군의 장수였던 리날도는 그의 연인 알미레나가 아르미다에게 납치당하자 그를 유혹하기 위한 함정인 줄 알았지만 그녀를 구하기 위해 길을 나섭니다. 그러나 리날도를 죽여야 하는 아르미다는 그에게 반하고 맙니다. 유혹은 실패로 끝났고 아르미다는 알미레나로 변신하여 다시 접근합니다. 이 그림은 바로 그 장면입니다. 물론 리날도는 아르미다가 알미레나로 변신한 것을 알게 되지만 그것은 조금 후의 일이죠. 모든 무장을 해제하고 달콤한 사랑을 나누는 두 남녀 건너 숲 속에 병사가 눈을 부릅뜨고 있습니다. 리날도를 살해할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이겠지요. 그렇게 보면 이 사랑은 치명적입니다.

아예스가 처음 그림 공부를 시작한 것은 일곱 살 때라고 하니까 미술에 대한 재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그런 재능을 눈여겨보았던 것인지 이모부는 그림을 복원하는 장인 밑의 견습생으로 일을 하게 합니다. 그 후 프란체스코 마조토 밑에서 3년간 그림 공부를 합니다. 열다섯 살이 되던 해 밀라노에 있는 아카데미에 입학, 마테니의 지도를 받습니다.

알키노오스 궁정의 율리시즈 Ulysses at the court of Alcinous, 381x535cm, 1813~1815

포세이돈의 저주를 받아 지중해를 떠돌던 율리시즈는 ‘파이아케스인들의 나라’ 해변에서 의식을 잃고 있다가 이 나라의 나우시카 공주에게 발견됩니다. 당시 율리시즈는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그 나라 왕 알키노오스는 율리시즈에게 당신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느냐고 묻습니다. 대답을 못하는 율리시즈 앞에 눈먼 음유시인 데모도코스가 등장합니다. 데모도코스는 율리시즈가 지난날 승리했던 트로이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노래로 부릅니다. 그로 인해 기억을 되찾은 율리시즈는 눈물을 흘립니다. 알키노오스 왕은 데모도코스의 노래가 끝나자, 율리시즈에게 우는 이유를 묻습니다. 내가 바로 저 데모도코스가 노래하는 바로 그 율리시즈입니다. 가운데 붉은 옷을 걸치고 손에 얼굴을 파묻은 남자, 그 남자가 율리시즈입니다. 자신의 정체를 다시 알게 되었는데 울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3년 뒤, 아예스는 베네치아 아카데미가 주최하는 대회에서 우승합니다. 우승자에게는 1년간 로마에 있는 성 루카 아카데미에 유학을 할 수 있는 부상이 주어졌습니다. 그의 유학은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치코나라 공작의 지원에 의해 연장이 됩니다. 치코나라 공작은 그 후에도 아예스의 든든한 후원자였습니다. 로마에서 유학을 하는 동안 그는 나사렛파(The Nazarenes) 화가들을 만납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마지막 키스 The Last Kiss of Romeo and Juliet, 291x 201.8cm, 1823

추방령을 받은 로미오를 줄리엣은 한 번만이라도 만나고 싶어 합니다. 줄리엣의 유모가 로미오에게 이 말을 전하자 로미오가 밤에 찾아옵니다. 집안의 강요에 못 이겨 3일 뒤 팰리스 백작과 결혼을 해야 하는 줄리엣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됩니다. 한 손과 발은 돌아가야만 하는 길을 향하고 있지만 몸의 반은 줄리엣을 향하고 있는 로미오의 절박감이 줄리엣의 허리를 두르고 있습니다. 이때까지도 두 사람은 이것이 이생의 마지막 키스인 줄 몰랐지요. 돌아보면 마지막이 될 줄 모르고 인사를 나눴던 사람이 한둘일까요?

나사렛파 화가들은, 1809년 독일의 젊은 화가들이 주동이 되어서 모든 미술은 종교적이거나 윤리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펴며 신고전주의에 반대하던 그룹이었습니다. 때문에 성서에서 그 주제를 가져온 작품들을 주로 그렸고 머리 모양이나 옷차림도 그와 같이 하는 바람에 사람들이 조롱하는 의미로 나사렛파라고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그리고 아예스보다 3년 먼저 로마에 와 있던 프랑스 화가 앵그르를 만나 친분을 맺습니다.

밧세바 Bathsheba ,149.9x115.6cm , 1827

제가 예전에 장 제롬의 작품 <바세바>를 소개했던 내용을 잠깐 옮겨보겠습니다. 목욕을 하고 있는 여인의 이름은 밧세바입니다. 훗날 솔로몬 왕을 낳는 여인이죠. 이 장면은 상당히 에로틱한 장면이지만 비극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탑 위에서 여자를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의 이름은 골리앗을 쓰러뜨린 다윗입니다. 다윗은 전쟁 중이었는데 왕궁의 망루에 올라 전쟁 상황을 보다가 옥상에서 목욕하는 밧세바를 발견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풍습에 여인들은 옥상에서 목욕을 했다고 합니다. 밧세바에게 혹한 다윗은 그녀를 불러 동침을 합니다. 왕이니까…. 그녀의 남편은 다윗 군대의 장군인 우리야였습니다. 밧세바가 탐난 다윗은 우리야를 가장 험한 변방으로 파견하고 우리야는 그곳에서 전사합니다. 밧세바가 다윗의 아이를 낳았지만 하느님의 벌을 받아 아이가 죽자 다윗은 회개합니다. 그 후에 밧세바에게서 얻은 두 번째 아이가 솔로몬입니다. 목욕 한 번 잘못해서 두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진짜 혼나야 할 사람은 다윗입니다. 이 작품에서 다윗은 목까지만 묘사되어 있습니다. 혹시 아예스도 저와 같은 기분이었을까요?

앵그르와 만남은 아예스의 작품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때문에 그를 이탈리아 낭만주의 대표화가라고 말을 하지만 실제로 그가 다룬 주제는 신고전주의부터 나사렛파와 낭만주의 각 부문에 걸쳐 있습니다. 역사화와 신화, 종교화 그리고 정치적인 내용이 담긴 작품이 있는가 하면 정교한 초상화로도 유명했으니까 그럴 만도 합니다.

두 마리 비둘기와 노는 비너스 (발레리나 카를로타 샤베르의 초상화)

Venus Playing with Two Doves (Portrait of the Ballerina Carlotta Chabert), 183x137cm, 1830

비너스에게 헌정된 꽃은 장미입니다. 그리고 그녀가 좋아한 새는 백조와 비둘기입니다. 큐피드가 같이 있으면 알기 쉬운데 저렇게 덜렁 혼자 있고 작품 제목을 모르면 비너스인지 자신이 서지 않는데 다행히 비둘기가 확신을 주었습니다. 르네상스 이후 여인들의 누드는 이상적인 것에서 사실적인 묘사로 진행되고 있지만 그림 속 여인의 몸은 아주 당당한 여신의 느낌이 강합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눈에는 또 다른 관능이 숨어 있습니다. 그렇겠지요, 비너스인데….

로마에서의 유학이 끝난 1814년, 아예스에게 나폴레옹 밑에서 전설적인 용맹을 떨치던 장군 요아킴 뮈라 (Joachim Murat)로부터 작품 의뢰가 들어와 나폴리로 향합니다. 작품을 끝낸 아예스는 1817년에 다시 로마로 돌아와 바티칸에 프레스코화 작업을 맡게 됩니다. 이때도 치코나라 공작의 힘이 컸습니다. 훗날 밀라노에 있는 팔라초 레알레(Palazzo Reale di Milano)에도 프레스코화를 그렸지만 1943년 2차 세계대전 중에 파괴되고 맙니다.

참회하는 막달레나 The Penitent Magdalene, 118x151cm, 1833

참회하는 막달레나 마리아의 모습에는 늘 해골이 함께합니다. 인생의 무상함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죠.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둘 때도, 무덤에 묻히고 다시 부활하셨을 때도 마지막 또는 처음에 만난 사람이 막달레나였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창녀 출신 막달레나 ―지금은 사도 중의 사도로 격상되었지만― 뭔가 거대한 왜곡의 틀에 의해 변형된 모습으로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낭만주의 시대 많은 화가들은 그림을 통해서 관능을 표현하고자 했지요. 그러나 대놓고 할 수는 없었고, 신화나 성경이 좋은 소재가 되었습니다. 어떠신가요, 그림 속 막달레나는 참회하는 모습이라기보다는 관능이 넘치는 모습 아닌가요?

1820년과 그 다음 해 아예스는 밀라노를 방문합니다. 당시 밀라노는 이탈리아 낭만주의 문학의 중심지였죠. 1822년, 아예스는 밀라노에 정착,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곳에 머뭅니다. 1830년대 중반부터 밀라노 살롱에 참가하고 1850년, 밀라노에 있는 브레라 아카데미의 교수로 임명됩니다.

롯과 그의 딸들 Lot and His Daughters, 1833

성경을 주제로 한 그림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사람은 예수님을 제외하고 나면 혹시 롯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만큼 그와 연결된 이야기들이 매력적이기 때문입니다. 소돔을 탈출하다가 소금 기둥으로 변한 아내를 뒤로 하고 롯은 두 딸과 함께 산에서 삽니다. 그러나 세상 남자들의 씨가 말라 대가 끊기는 것을 걱정한 두 딸은 아버지에게 술을 먹여 정신을 잃게 한 후 하루씩 아버지와 동침을 합니다. 훗날 큰딸은 모압 족의 조상이 되는 아이를 낳고, 둘째 딸은 암몬 족의 조상을 낳게 됩니다. 보통 큰딸은 적색 옷을 입은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그렇다면 옷을 벗고 있는 여인은 둘째 딸이고, 둘째 날이겠지요. 술에 취했다고 했지만 롯은 정말 몰랐을까요? 지금의 윤리기준으로 보면 당연히 안 되겠지만 신이 정하신 그 뜻을 헤아리기가 정말 어렵군요.

빈을 방문 오스트리아로 왕실로부터 작위를 받은 것을 보면, 추정컨대 그의 명성은 국제적으로도 알려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웃해 있는 프랑스는 방문한 적이 없는데 프랑스의 낭만주의 작품들을 사진과 판화로 알고 있는 정도였다고 합니다. 당대 많은 화가들이 파리를 중심으로 스페인과 이탈리아를 방문했던 것에 비하면 아예스 일생 동안의 동선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키프로스 왕좌에서 물러나는 카테리나 코르나로

Caterina Cornaro Deposed from the Throne of Cyprus, 121x151cm, 1842

의자에 앉아 있는 여인의 이름이 카테리나 코르나로입니다. 지금은 키프로스의 왕이지만 원래는 베네치아 출신이지요. 이제 베네치아에 온 사람들에게 키프로스를 넘겨야 하는 순간입니다. 이런 상황이 흘러오기까지 수많은 눈물과 한숨이 있었습니다. 열네 살 이던 코르나로는 정략적인 이유로 키프로스의 왕자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협상이 지지부진하면서 결혼식은 거행되지 않았죠. 4년간 수녀원에서 생활한 후 결혼이 이루어졌지만 이미 키프로스 왕에게는 아들 둘과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욱 곤란해 진 것은 임신한 지 7개월 만에 키프로스 왕이 죽어버린 것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코르나로는 정적들을 물리치고 키프로스 왕이 되지만 모국 베네치아에서 가만있지를 않았습니다. 결국 베네치아와 합병한다는 미명 아래 코르나로는 왕좌에서 물러납니다. 국가가 살기 위해서 한 개인의 삶이야 언제든지 무시되는 것이 지금의 실상이고 보면 몇 백 년 전, 그것도 여성이라면 얼마나 더했겠습니까? 작게 열린 문틈 사이로 당신은 베네치아로 가는 배를 타야 한다고 손으로 가리키는 사내의 무표정한 얼굴은 조직의 얼굴이고 절망한 듯한 여인의 얼굴은 개인의 얼굴입니다.

아예스는 아카데미 교수로 있는 동안 학생들에게 대단한 영향을 주었다고 하는데 스승으로서도 훌륭했던 것 같습니다. 1860년, 아예스는 마침내 브레라 아카데미의 교장이 됩니다. 아흔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가지 그에 대한 자료는 많지 않습니다. 결혼을 한 기록이 없는 걸 보면 독신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자료 중에는 그가 동성애자였다는 대목도 있습니다.

목욕하는 수산나 Susanna Bathing, 135x120cm, 1850

수산나 이야기는 고전 회화의 단골 주제 중 하나입니다. 아름답고 경건한 요아킴의 아내 수산나가 목욕을 하는 것을 보고 늙은 장로 둘이 그녀를 유혹했습니다. 그러나 수산나가 그 장로들의 파렴치한 짓을 거절하자 장로들은 오히려 그녀가 외간 남자와 나무 아래에서 부정한 짓을 했다고 모함을 해 수산나는 사형을 선고받게 됩니다. 이때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다니엘이 등장해서, 장로들에게 수산나가 외간 남자들을 만났던 나무 이름을 말해보라고 하자 장로들은 서로 다른 이름을 말하게 되고, 결국 수산나의 무죄가 밝혀진다는 내용이죠. 이 작품 속에는 장로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눈부신 수산나의 몸만 빛나고 있습니다. 고개를 돌려 관객을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습니다. 관능이 환하게 피어오르고 있는 착각 때문입니다.

이탈리아 역사에 대한 명상 Meditation on the History of Italy, 1850

언젠가도 고백을 했지만 상징이 담긴 작품은 늘 어렵고 자신이 없습니다. 도상학(圖像學)을 배워볼까 자료를 찾았지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더군요. 방금 책 읽기를 끝낸 소녀의 표정이 단호합니다. 작품 제목을 참고로 하면 소녀의 무릎에 놓인 책은 이탈리아 역사책이겠지요. 다른 한 손에 든 십자가상은 이탈리아를 지켜 온 것은 그리스도교라는 상징일 것입니다. 문제는 한쪽으로 열린 가슴인데요, 그림에서 열린 가슴은 풍요를 상징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강 이탈리아 역사를 지켜 온 것은 그리스도교였고 그 땅은 풍요로웠다는 정도의 의미를 담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열린 가슴은 수없는 분열과 외부 침략의 상징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정치적인 알레고리가 들어가면, 역시 어렵습니다.

아예스의 작품에 대한 평가가 복잡한 이유 중 하나는 그의 많은 작품에 제작 연대나 서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간혹 남아 있는 증명서의 날짜들은 제품을 팔고 산 날짜인 경우가 많습니다. 또 같은 주제와 구성으로 살짝 변형된 작품들도 많습니다. 우리 같은 아마추어들에게는 별 문제가 없지만 감정 전문가들에게는 참 고약한 화가가 아닐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