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18.jpg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에 있는 조선 전기의 부도 및 비. 부도의 높이 2.15m, 비신의 높이 1.10m, 너비 0.6m, 두께 0.2m. 

 

1398년(태조 7) 건립된 것으로 용문사에서 약 300m 떨어진 동쪽에 있으며, 부도와 비는 다시 80m 정도의 거리를 두고 위(부도)·아래(비)에 있다.

부도는 조안(祖眼) 등이 세운 것이며, 비교적 보존이 잘되어 있다. 부도는 여러 개의 장대석으로 탑구(塔區)를 마련하고 그 중앙에 건립하였다. 지대석과 하대석이 방형으로 되어 있으나 상대석과 탑신부가 8각으로 되어 있어 역시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을 따르고 있다.

지대석은 장대한 판석을 결구하여 넓게 자리잡았다. 그 위에 1석으로 조성된 하대석은 하단에 구형을 돌리고 측면에는 각 모서리에 1판(瓣)씩, 각 변에 5판씩의 연화문(蓮華文)을 배치하여 모두 24판의 복련(覆蓮)을 돌렸다. 하대석 윗면에는 낮고 높직한 2단(段)의 굄대와 원형의 굄 1단을 마련하여 중대석을 받았다.

중대석 표면에는 아무런 조각장식도 없으며 부드러운 곡선을 보일 뿐이다. 상대석은 8각으로 되었다. 아랫면에 3단의 각형 받침이 있고 측면에는 단엽 16판의 앙련(仰蓮)이 조식(彫飾)되었다. 윗면에는 1단의 각형 굄이 각출(刻出)되어 탑신석을 받치고 있다.

8각 탑신의 각 면에는 상·하단에 갑석형(甲石形)과 굽형이 마련되었고, 좌우에 우주형(隅柱形)이 새겨졌다. 문비형(門扉形)은 1면에만 조각되었는데 퇴화된 양식이다. 옥개석(屋蓋石)은 탑신석 위에 놓여지는 부분에 3단의 받침이 있고 처마 밑은 낮은 부연(副椽)이 모각되었으며, 모서리마다 각형 서까래가 마련되었다.

10419.jpg 옥개석 윗면의 낙수면(落水面)에는 크게 두드러진 8각 우동(隅棟 : 옥개석의 귀마루)이 있고 8각의 전각부(轉角部)에 이르러서는 귀꽃무늬가 장식되었는데 종래의 형태와는 달리 퇴화되고 있다. 상륜부(相輪部)는 완전하지 않아 현재 둥근 앙련석 하나가 놓여 있을 뿐이다.

비는 엄밀히 말하여 갈석(碣石)이라 함이 마땅한 작은 규모의 석비이다. 비문은 당시의 명신이며 학자인 권근(權近)이 지은 것으로 적혀 있다. 윗부분은 모서리를 양쪽 모두 접은 상태이고, 문자가 새겨져 있는 주위(비의 상하좌우 끝)에 가는 선이 쳐져 있다.

비액은 소전(小篆)으로 지름 4㎝ 정도의 크기이며, 비문은 지름 1.5㎝ 안팎의 소해(小楷)이다. 비면의 글자는 모두 20행으로 각 행 44자로 쓰여 있다. 비 옆면에는 아무런 기록이 없고 비음(碑陰 : 비의 뒷면)에 21행의 형식으로 조성 당시 찬조자의 명단이 6단(六段)으로 적혀 있다.

정면 하단 왼쪽에 약간의 파손된 부분을 제외하면 비교적 양호한 상태이다. 현재는 산등성이 마애석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처음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상태로서 보물의 보존 상태로는 매우 불만스럽다.

비는 정지국사(1324∼1395)의 행적 등을 기록한 것인데, 국사는 고려 말의 고승으로 황해도 재령 출신이며, 중국 연경(燕京 : 지금의 북경)에서 수학하였다.

서형태미(書形態美)로는 소해이기는 하나 당시 유행하던 당해(唐楷)의 범주에 들어가는 서체로서 깔끔한 필치가 아직도 비를 세울 당시의 분위기를 잃지 않고 있으며, 너무나 정갈스러운 구성의 치밀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