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제516호 대구무술명오작비(大邱戊戌銘塢作碑)
종 목 | 보물 제51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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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칭 | 대구무술명오작비(大邱戊戌銘塢作碑) |
분 류 | 기록유산 / 서각류/ 금석각류/ 비 |
수량/면적 | 1기 |
지 정 일 | 1969.11.07 |
소 재 지 | 대구 북구 산격동 1370 경북대학교박물관 |
시 대 | 신라 |
소 유 자 | 국유 |
관 리 자 | 경북대학교박물관 |
1946년 대구시 대안동에서 처음 발견되었다가 7, 8년 동안이나 행방을 알 수 가 없었는데, 그 후 다시 경북대학교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비(碑)는 길쭉한 모양의 자연석으로, 아래는 직선으로 잘려 있고 윗부분은 원형으로 처리되어 있다. 아래부분의 모습으로 보아 본래 받침돌 위에 세웠거나 암반 위를 파고 세웠던 것으로 여겨진다. 비의 내용은 건립날짜와 저수지 축조내용 및 관계된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글자가 상당수 깎여나가 해석을 하는 데에 많은 어려움이 있으나, 신라시대 수리시설이나 사회사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1946년 대구시(大邱市) 대안동(大安洞)에서 발견, 조사되었다. 이 오작비(塢作碑)가 처음 발견된 대안동(大安洞)은 대구시(大邱市)의 거의 중앙인데, 이 지점이 곧 건립 당시의 위치인지 아닌지는 판정하기 곤란하다. 그것은 비신(碑身) 자체가 작아서 이동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비는 적갈색의 화강암 자연석으로 상단부(上端部)는 중앙이 높고 좌 ·우로 낮아져서 원호(圓弧)를 이루어 거의 반원형이며 아랫부분에 이르면서 약간 좁아졌다. 석비(石碑)는 자연석 그대로로 별로 손질을 가한 흔적이 없으며, 명문(銘文)을 각자(刻字)한 앞면조차도 석면(石面)을 가공한 것같이 보이지 않는다. 개석(蓋石)은 본래 없었던 게 분명하나, 대석(臺石)의 유(有) ·무(無)는 알 수 없다. 현재 오른쪽 하단부(下端部)가 파손되었는데, 본래는 대석을 두었거나, 그렇지 않으면 자연석이라도 그 윗면에 자리를 파고 비신(碑身) 하단부(下端部)를 감입(嵌入) 시켰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명문(銘文)은 문자(文字)의 크고 작음과 간격이 일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각행(各行)까지도 바르지 않고 비뚤어져 있다. 필치(筆致)는 극히 졸박(拙朴)하나 일면 고아(古雅)한 풍(風)이 있으며, 서체(書體)는 북위(北魏)를 방불케 하는 점이 있어 경주(慶州)의 남산(南山) 신성비(新城碑)들과 일치하는 바가 있다. 전문(全文) 9행인데 각행(各行)의 잣수가 일정하지 않으며, 마멸된 곳이 많고 또한 석비의 오른쪽 하단부(下端部)가 약간 파손되어 제3행까지는 1자 정도의 파탈(破脫)이 있는 것같이 보인다. 내용을 살펴보면, 우선 제1행은 이 석비의 건립 목적을 서술한 것으로 곧 표제(標題)에 해당하니「무수년사(戊戍年四) 월삭십사일(月朔十四日), 영동리촌(영冬里村)에 고■오(高■塢)를 만들고 기록한 것이다」라는 뜻이 되겠다. 이것으로 보아 이 석비는「오(塢)」를 축조한 기념비라 할 수 있는데, 그 오(塢)의 명칭에 해당하는「고■오(高■塢)」의「고(高)」자(字) 아래 한 자가 빠졌음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오작비(塢作碑)가 발견된 대구(大邱)는 고신라(古新羅)나 통일신라(統一新羅)시대를 막론하고 국가적으로 중요시되는 도시였으므로, 이 곳에 방어 수호에 필요한「오(塢)」를 축조하였던 것은 당연한 일로 생각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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