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정스님 어록

눈과 마음

문성식 2015. 7. 23. 12:53

 
      눈과 마음 늘 같이 있고 싶은 친구를 보내면서 우리는 속으로 되뇌인다. '마음이 지척이면 천리도 지척이요······.' 공간적인 거리를 정신적인 관념으로 단축시키고 싶은 심정에서다. 뿐만 아니라 시간적인 간격마다 두고 싶지 않아서 일념一念이 무량겁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지극히 식물성스러운 이러한 사유 경향은 우리 조상들이 즐겨 부르던 옛 시조나 가요를 통해서도 우리들 핏줄에 스며 흐른다. 어떤 현실에 정면으로 맞서 대결하기보다는 저만치 우회로를 통해 극복하려는 것이다. 이 같은 경향을 약자의 체념이라며 한쪽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 눈에서 멀면 마음에서도 멀다.' 고 일리가 있는 지당한 말씀. 아무리 정다운 사이라 할지라도 멀리 떨어진 채 마주 대할 기회를 갖지 못한다면, 유행가 가사처럼 언젠가는 희미한 옛 그림자가 되고 말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한없이 굳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형편없이 헤플 수도 있다. 세상은 이래서 더욱 분주해지고 있다. 눈에서 멀리 하지 않기 위해 찾아 나서느라고, 눈을 크게 뜨고 저마다 찾느라고. 어제 만난 그는, 요즘도 바쁘냐는 물음에 계속 바쁘다고 했다. 직장 일 때문이 아니라 사람을 보느라고. 주말이면 '관상쟁이'가 되어 그놈의 선을 보아야 한다는 것. 지난 봄부터 봐 오는데도 선뜻 마음에 들지 않아 계속 근무중이란다. 참 수고가 많겠다. 짝을 맞추느라 애 많이 쓴다. 그렇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보기는 눈으로 보는데 판단은 마음으로 하고 있다. 보고 또 보아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똑같은 눈으로 보는데 어떤 마음에는 들고 어떤 마음에는 스쳐 지나간다. 그러고 보면 눈은 한낱 거울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창문에 불과한 것이 사람의 눈이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들은 눈에만 의존하려는 데 맹점이 있다. 눈앞에 드러난 물량의 형태와 상승하는 곡선에만 최대의 관심을 기울인다. 그 부피 아래 깔린 '인간'이나 곡선 뒤에서 시들고 있는 영역에는 마음을 두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또한 사람의 눈이다. 마음을 빼앗기고 나면 눈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번들거리는 저 탐욕의 눈에서 우리는 그 마음의 명암을 읽을 수 있다. 탐욕의 안개가 자신의 시야를 가로막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려면 도수 높은 안경을 쓸 것이 아니라, 허심탄회한 빈 마음을 가져야 한다. 사물을 꿰뚫어보는 직관력이란 시력 얼마의 그 육안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다. 그것은 모든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텅 빈, 그래서 투명해진 마음의 눈이다. 눈과 안목의 차이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진정한 친구는 내 영혼의 얼굴이다. 그는 내 마음의 소망이 응답한 것. 친구를 위해 나직이 기도할 때 두 영혼은 하나가 된다. 맑고 투명하게 서로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친구 사이에는 말이 없어도 모든 생각과 소원과 기대가 소리 없는 기쁨으로 교류된다. 이때 비로소 눈과 마음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하나가 된다. ㅡ 법정 스님글 중에서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