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목 | 보물 제235호 |
---|---|
소재지 | 서울 종로구 신영동 218-2 |
소재지 | 신영동 |
지정일 | 1963.01.21 |
수량 | 1기 |
시대 | 통일신라 |
소유자 | 국유 |
관리자 | 종로구 |
자료출처 및 참조 | 문화재청,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영동에 있는 통일신라 시대의 당간지주. 높이 3.63m.
장의사 옛터에 있는 이 당간지주는 불(佛) 보살(菩薩)의 공덕을 기리며 불기(佛旗)를 꽂아 두던 시설로 높이 3.63m 이다. 양쪽 지주는 동서로 마주 서 있는데 당간이나 그 기단부(基壇部)는 모두 훼손되어 원형을 추정할 수 없다.
장의사(莊義寺)는 백제(百濟)와의 싸움으로 황산(黃山) (지금의 논산(論山)으로 추정) 에서 전사한 신라의 장수(將帥) 장춘랑(長春郞)과 파랑(罷郞)의 명복(冥福)을 빌기 위하여 신라 무열왕(武烈王) 6년(659)에 세웠다고 전한다.
고려의 예종(睿宗), 인종(仁宗), 의종(毅宗) 등이 남경(南京) (지금의 서울) 에 왔던 길에 다녀간 일이 있고, 조선 태조비(太祖妃)인 신의왕후(新懿王后)의 기신제가 이 곳에서 있은 이후 왕실의 특별한 비호(庇護)를 받았으나 연산군(燕山君)은 이 일대를 풍류를 즐기던 장소로 삼다가 동왕(同王) 12년(1506)에 절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꽃밭을 만들고 꽃을 심게 하였다.
장의사(莊義寺)는 백제(百濟)와의 싸움으로 황산(黃山) (지금의 논산(論山)으로 추정) 에서 전사한 신라의 장수(將帥) 장춘랑(長春郞)과 파랑(罷郞)의 명복(冥福)을 빌기 위하여 신라 무열왕(武烈王) 6년(659)에 세웠다고 전한다.
고려의 예종(睿宗), 인종(仁宗), 의종(毅宗) 등이 남경(南京) (지금의 서울) 에 왔던 길에 다녀간 일이 있고, 조선 태조비(太祖妃)인 신의왕후(新懿王后)의 기신제가 이 곳에서 있은 이후 왕실의 특별한 비호(庇護)를 받았으나 연산군(燕山君)은 이 일대를 풍류를 즐기던 장소로 삼다가 동왕(同王) 12년(1506)에 절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꽃밭을 만들고 꽃을 심게 하였다.
세검정초등학교가 설립된 이후 학교마당 안에 보존되어 있다.
양 지주는 동·서로 마주 서 있는데 간주를 받던 간대(竿臺)나 기단부가 남아 있지 않아 원형을 추정할 수 없다. 마주보는 내측면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고 외면이나 전면·후면에도 아무런 조식(彫飾)이 없으며, 외면의 각 변에서 모를 죽여 약간의 장식의장을 보이고 있다.
양 지주의 정상부는 내면 위 끝부분에서 16㎝ 정도의 윗면이 평평한데 윗면은 외면으로 내려오면서 활모양을 그리며 깎여졌다. 그러므로 외측면에서는 특별한 구조가 보이지 않으나 앞뒷면에서 보면 상단부(上端部)는 한변이 원호(圓弧)인 사다리꼴로 보인다.
당간을 고정시키는 간은 상부 한 곳에만 장치하였는데 내측면 상단 가까이에 둥근 구멍으로 간구(杆溝)를 마련하여 간을 끼우도록 하였다.
대개의 경우 위쪽 한 곳에만 간을 시설하더라도 내측면 꼭대기에 장방구(長方溝)를 뚫는 것이 보통인데 그 유례를 따르지 않았다. 이 당간지주는 높이에 비하여 중후한 편으로, 간구 이외에는 별다른 공작이 가하여지지 않은 매우 소박한 형태이다.
'한국의 보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물 제237호 청자순화4년명호(靑磁淳化四年銘壺) (0) | 2015.07.05 |
---|---|
보물 제236호 미륵사지당간지주(彌勒寺址幢竿支柱) (0) | 2015.07.05 |
보물 제234호 옥구발산리석등(沃溝鉢山里石燈) (0) | 2015.07.05 |
보물 제233호 무량사석등(無量寺石燈) (0) | 2015.07.02 |
보물 제232호 관촉사석등(灌燭寺石燈) (0) | 2015.07.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