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14.jpg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천송리 신륵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비. 높이 1.33m.

 

신륵사에는 원래 극락보전(極樂寶殿) 서쪽 언덕에 대장각이 있었는데, 그것은 고려말의 이색(李穡)과 승 나옹(懶翁)의 문도들이 발원하여 ≪경률론 經律論≫을 인출(印出), 수장하던 집이었고, 이 비는 대장각의 조성에 따른 여러 가지를 기록한 석비이다.

 

이색은 선왕 현릉(玄陵)의 자복(資福)과 아버지 이곡(李穀) 및 어머니의 추복(追福)을 빌고자 나옹의 문도와 함께 발원, 이숭인(李崇仁)에게 명하여 고려 우왕(禑王) 9년(1383)에 세워졌다.

 

이 비석은 장방형(長方形)의 지대석(地臺石) 위에 대석(臺石)을 놓고 비좌(碑座)를 마련하여 장방형 홈을 파서 대리석 비신(碑身)을 꽂았으며 그 좌·우에 석주(石柱)를 세워 지주(支柱)를 삼고 개석(蓋石)을 덮은 것이다. 이렇듯 양지주를 시설한 형식은 고려말(高麗末)에 보이는 것으로 주목된다.

대석에는 복련(覆蓮)과 귀꽃문 등으로 장식하고 개석의 낙수면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게 했다. 비문은 이숭인(李崇仁)이 짓고 권주(權鑄)가 썼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현재 신부 문면(文面)은 크게 파손되어 있어 전문을 판독할 수 없으나, 비음(碑陰 : 비의 뒷면)에는 대장단월(大藏檀越) 사부중(四部衆)으로서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를 구분하여 그 성명을 열거하였다.

 

이와 같은 조각형식은 조선시대 석비조형의 한 형식이 되었다. 비문은 자경 2㎝의 해서로서, 직제학 권주(權鑄)의 글씨이다. 권주의 글씨에 대하여 ≪서청 書鯖≫에는 ‘太古庵碑字 類虞永興(태고암비자 유우영흥)’이라 하였다.

 

9016.jpg

 

9015.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