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71.jpg 이 석조사자상(石造獅子像) 2구(軀)는 현재 국립경주박물관(國立慶州博物館)에 진열되어 있으나, 원 위치는 경주(慶州)가 아니고 경북(慶北) 의성군(義城郡) 단촌면(丹村面) 관덕동(觀德洞)의 이름을 알 수 없는 절터이다. 곧, 현지에 남아 있는 의성(義城) 관덕동(觀德洞) 삼층석탑(三層石塔)(보물(寶物) 제(第)188호(號))의 위층 기단 갑석(甲石) 4우(隅)에 암?수 1쌍씩 4구(軀)의 석사자(石獅子)가 배치되어 있었는데, 그 중 1쌍은 1940년경 현장에서 분실되었고, 다른 암?수 2마리만이 현재의 위치로 옮겨져 보관되게 된 것이다. 2구(軀)의 석사자의 도난는 도굴꾼들 소행일 것인데, 그 유물은 거의 완전한 상태가 아니었던가 짐작된다.

현존 2구(軀)의 석사자는 모두 전면(全面)에 마멸이 심하여 각부 조각의 세부를 분간하기 어려우며, 더우기 수사자는 파손되어 절단된 2 조각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파손된 수사자는 각부 조각이 완전하지는 않으나 그 전체의 형태만은 식별할 수 있으니, 앞발을 세우고 고개를 약간 왼쪽으로 틀고 있는 모양을 한 것이 동적(動的)인 자세라 하겠다. 암사자는 뒷발을 구부리고 앞발을 뻗치고 앉아서 정면을 향하고 있다. 목에는 영락(瓔珞)이 조식(彫飾)되었고, 얼굴은 이(耳)·목(目)·구(口)·비(鼻)등이 닳긴 했으나, 그래도 각부의 윤곽은 뚜렷하여 날카로왔던 당초의 인상을 짐작케 한다. 양쪽 앞발 사이의 배 밑에는 3마리의 새끼 사자가 있어서 그 중 1마리는 어미의 젖을 빨고 있는데, 이러한 유례는 흔하지 않다 하겠다.

이 석상은 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혀 있고 그 형태가 우아하나 마멸된 탓인지 용맹의 기상이 적어 보인다. 그러나 부분적으로는 원형을 짐작케 하고 있으니 꼿꼿이 세운 두 발의 양쪽 발톱이 날카롭다든가 앞가슴과 양쪽 발에 근육이 나타나고 있는 것 등은 힘찬 조각술의 일면을 보이고 있는 바라 하겠다. 대부분의 석사자상이 당자(當者)만의 조각인데, 이 석상(石像)은 예외로서 이른바 아사포유형(兒獅哺乳形)이다.

지금까지의 조사에 의하면 이것은 최고 유일한 예로서 매우 희귀한 석사자라 하겠다. 이 석사자는 이미 알려진 통일신라(統一新羅)시대의 석사자상과 비교할 때 그 형태나 각부의 조각이 결코 뒤지지 않을 것인데, 그 조성 연대는 이들 석사자상이 놓여 있던 의성(義城) 관덕동(觀德洞) 3층석탑(3層石塔)과 같은 때로 추정하여 9세기 초엽의 작품으로 생각해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