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65.jpg 배리삼릉(拜里三陵)은 경주 남산의 서쪽 기슭에 동서(東西)로 세 왕릉(王陵)이 나란히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서쪽 밑으로부터 신라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 제53대 신덕왕(神德王), 제54대 경명왕(景明王) 등 박씨(朴氏) 3왕의 릉(陵)이라 전하고 있다. 모두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전방(前方)에 후대에 설치된 혼유석(魂遊石)만 있을 뿐 다른 시설물은 없다.

가운데의 전(傳) 신덕왕릉(神德王陵)은 두 차례에 걸쳐 도굴을 당하여 1953년과 1963년에 내부가 조사되었다. 조사 결과 매장주체는 깬돌로 쌓은 횡혈식 석실(橫穴式 石室)로 밝혀졌다. 석실(石室)은 평면 방형(方形)이었고 천정은 궁륭상(穹륭狀)이었으며 연도(羨道)는 남벽가운데에 달렸는데, 석실과 연도 사이에는 판석(板石) 2매로 된 문을 달았다. 석실 벽면의 길이는 3.04-3.09m이고, 석실 바닥에서 천정 뚜껑돌까지의 높이는 3.91m였다. 석실 바닥 가운데에는 평면 방형(方形)으로 깬돌을 쌓고 그 위에 두께 5㎝ 정도의 판석(板石) 2매를 남북으로 놓아 2인 합장용(合葬用)의 시상(屍床)을 설치하였다. 석실과 연도의 모든 벽면과 천정, 그리고 시상(屍床)의 측면에는 석회(石灰)를 두껍게 발랐다.

이 고분에서 가장 주목되는 점은 석실 벽면에 마치 병풍(屛風)을 돌려 세운 것처럼 북벽(北壁)과 북벽(北壁)에 이어지는 동서양벽(東西兩壁)의 일부에 연속하여 채색면(彩色面)이 그려져 있었던 사실이다. 채색면(彩色面)은 북벽에 6폭, 그리고 그 좌우로 연속하여 동·서벽에 각각 3폭씩 모두 12폭으로 그 높이는 1.4m였는데, 이를 다시 상하(上下)로 양분(兩分)하여 모두 24면으로 하고 주(朱)·황(黃)·백(白)·군청(群靑)·감청(紺靑) 등 5색으로 배색하였다. 이 채색면(彩色面)은 본격적인 벽화(壁畵)는 아니지만 벽화가 그려지지 않은 경주(慶州)의 신라고분(新羅古墳)에서는 주목되는 자료이며, 또한 유례가 없는 것이다. 이 채색면(彩色面)의 의미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5색(色)은 오행설(五行說), 혹은 그와 결부된 방위신사상(方位神思想)과 관련이 있을 것이고, 12폭이라는 것도 12지신(支神)사상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배리삼릉(拜里三陵)의 주인에 대해서는 신라(新羅)의 박씨(朴氏) 3왕(王)이라 전하고 있지만, 확실한 기록이 없고 신라 초기의 아달라왕(阿達羅王)과 하대(下代)의 신덕왕(神德王)·경명왕(景明王) 사이에는 무려 700여년의 차이가 있어 이들의 릉(陵)이 한 곳에 모여 있다는 사실이 이해되기 어렵다. 더욱이 신라 초기에는 이와 같은 대형(大形) 고분(古墳)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신라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재위(在位) 154-184)은 박씨(朴氏)이고, 일성왕(逸聖王)의 장자로서 왕비는 내예부인(內禮夫人)이다. 재위기간 동안 별다른 치적은 확인되지 않으며,《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서기 184년 3월에 왕이 죽었다고만 전하고 있을 뿐 장지(葬地)에 대한 기록은 없다.《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왕릉(王陵)의 소재지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신라 제53대 신덕왕(神德王)(재위(在位) 912-917)은 본명이 박경휘(朴景暉)이고, 아달라왕(阿達羅王)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대아(大阿) 우겸(又謙)(銳謙)이었으며, 왕비는 헌강왕(憲康王)의 딸이었다. 재위기간은 내외로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917년 1월에 왕이 죽자 시호(諡號)를 신덕(神德)이라 하고 죽성(竹城)에 장사지냈다 하고,《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화장(火葬)하여 잠현(箴峴) 남쪽에 묻었다고 하였다.

신라(新羅) 제54대(第54代) 경명왕(景明王)(재위(在位) 917-924)은 본명이 박승영(朴昇英)이고, 신덕왕(神德王)의 아들이다. 재위기간은 후삼국(後三國)의 난립과 함께 국내정치가 혼란한 시기였다.《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924년 8월에 왕이 죽자 시호(諡號)를 경명(景明)이라 하고 황복사(黃福寺)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하였으며,《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황복사(黃福寺)에서 화장(火葬)하여 성등잉산(省等仍山) 서쪽에 산골(散骨)하였다고 되어 있다.

등잉산(省等仍山) 서쪽에 산골(散骨)하였다고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