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목 | 보물 제35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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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서울 서대문구 대현동 산11-1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
소재지 | |
지정일 | 1963.01.21 |
수량 | 1기 |
시대 | 고려시대 |
소유자 | 이화여자대학교 |
관리자 |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
자료출처 및 참조 | 문화재청 |
통일신라말 ·고려초에 활약한 승려인 대경대사의 사리탑이다.
대경대사(862∼930)는 통일신라 경문왕 2년(862)에 태어나 9세 때 출가하였으며, 19세에 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을 받았다. 그후 교리보다는 참선에 뜻을 두어 성주사의 무염대사에게서 수행하기도 하였다. 중국으로 건너가 수 년동안 정진하다가 효공왕 13년(909)에 귀국 후 소백산에서 은거하던 중 고려 태조의 부름으로 보리사의 주지가 되었다. 태조 68세로 입적하니, 태조는 그의 시호를 ‘대경대사’라 하고 탑이름을 ‘현기’라고 내렸다.
비는 1913년 경기도 양평군 보리사터에서 서울로 옮겨왔는데, 이때 바닥돌이 떨어져 나가 현재는 새로 만든 바닥돌 위에 놓여 있으며, 기단부(基壇部)위에 탑의 몸돌을 올리고 지붕돌을 덮어 놓은 전형적인 8각 사리탑이다.
8각 원당형(圓堂形)의 부도(浮屠)로서 상륜(相輪)의 일부 상실과 부분적으로 손상을 입고 있으나 우수한 작품의 하나이다. 이 부도는 일찍이 1913년 원 위치에서 떠나 서울로 옮겨졌는데, 이때 지대석(地臺石)이 떨어져 나가 새로 만든 지대석 위에 놓여 있다.
하대석(下臺石)은 8각인데 여러 단으로 구성되었으며, 맨 아랫단은 가장 넓어서 각 면에 형태를 달리하는 사자(獅子)가 양각되고, 위에 운문(雲文)과 연엽(蓮葉)을 돌렸다. 윗면에는 주위에 홈을 돌 리고, 안에 8각 3단의 각형(角形) 몰딩이 있어 윗단을 받았다. 위의 돌 하나에는 조각이 있었던 듯하나 파손되어 알 수 없고, 그 위에 또 하나의 8각 석재(石材)가 있어 윗면에는 각 우각(隅角)마다 동자주(童子柱)를 세운 난간형(欄干形)이 모각(模刻)되어 그 아래위의 돌은 마치 기명(器皿)의 받침같이 되었다. 중대석(中臺石)은 2단으로 아랫단 각 우각(隅角)에 해당하는 부분에는 피어오르는 운문(雲文)으로 구획하고, 각 면에는 형태를 달리하는 칼라빙카 1구(軀)씩이 양각되고, 윗면 주위에는 홈을 돌려 윗단과 구분하였다. 윗단은 폭이 좁아졌고, 각 면에 주악천부상(奏樂天部像)이 우아하게 배치되었다. 상대석(上臺石)은 다시 휠씬 넓어졌는데, 밑에는 3단의 받침이 있는 주위로 판(瓣) 안에 4화형(花形)이 장식된 연화(蓮花) 8엽(葉)이 돌려 있다. 윗면에는 각 우각(隅角)을 따라 연엽(蓮葉)이 덮였고, 내부(內部)에는 홈을 돌린 가운데 3단의 몰딩을 마련하고 탑신(塔身)과 접하는 주위로 1면(面) 5엽(葉)씩의 작은 복판(複瓣) 연화가 돌려져 있는데, 우각(隅角)을 향하여 좌우로 사형(斜形)을 이루는 특징 있는 배치 방식을 취하였다. 탑신부(塔身部)도 8각인데 우각(隅角)에 기둥 모양이 있고, 앞뒤 양면에는 문비(門扉)와 자물쇠형이 모각(模刻)되고, 그 좌우로는 사천왕입상(四天王立像)을, 남은 좌우 양면에는 보살입상(菩薩立像)을 각각 양각하였다.
옥개(屋蓋)는 넓은 편으로 밑면에는 탑신 주위로 8구(區)를 마련하고 비천상(飛天像)과 화형(花形)이 번갈아 양각되었으며, 추녀 밑에는 둥근 연목(椽木)과 각형부연(角形副椽)이 그중으로 모각(模刻)되었다. 옥상(屋上) 굵은 우동(隅棟) 8줄이 표현되었고, 그 사이에 기왓골이 뚜렷하다. 추녀 끝은 모두 손상을 입어 귀꽃의 유무를 알 수 없다.
상륜부(相輪部)에는 화염문(火焰文)이 조각된 보주(寶珠)가 있을 뿐이다. 각부 구조의 비례가 정제(整齊)되어 장중관후(壯重寬厚)한 품위가 있으며, 만루(滿鏤)된 각부 조식(彫飾)은 웅대정교 (雄大精巧)하여 품격이 있고, 석재(石材) 구성에 있어서도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이 부도(浮屠)의 원 소재지에 관하여는, 확증은 없으나 경기도(京畿道) 양평군(楊平郡) 용문면(龍門面) 연수리(延壽里) 보제사(菩提寺) 터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곳에서 옮겨진 대경대사(大鏡大師) 현기탑비(玄機塔碑)(보물(寶物) 제(第)361호(號))가 경복궁(景福宮) 안에 건립되어 있다. 따라서 이 탑은 일찍이 원 위치를 떠나 서울 시내 남산동(南山洞) 일인(日人) 가옥(家屋) 안에 있던 것을 현 위치로 옮긴 것인데, 탑과 탑신의 형태나 조각 수법으로 보아 그렇게 추정이 가능하다. 한편, 대경대사(大鏡大師)는 나말려초(羅末麗初)의 고승(高僧)으로서 고려(高麗) 태조(太祖)12년(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3년(929))에 입적(入寂)하였고, 탑비는 천복(天福)4년, 곧 고려(高麗) 태조(太祖)22년(939)에 건립되었으므로, 이 부도도 그 무렵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부도 자체의 양식과도 합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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