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11/22)/오늘의 말씀과 묵상

문성식 2014. 11. 23. 04:01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11/22)






    체칠리아 성녀는 로마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독실한 신앙인으로 자랐다. 성녀의 생존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260년 무렵에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며, 박해 시대 내내 성녀에 대한 공경이 널리 전파되었다고 한다. ‘체칠리아’라는 말은 ‘천상의 백합’이라는 뜻으로, 배교의 강요를 물리치고 동정으로 순교한 성녀의 삶을 그대로 보여 준다. 흔히 비올라나 풍금을 연주하는 모습으로 그려진 체칠리아 성녀는 음악인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말씀의 초대
    요한 묵시록의 저자는 두 증인에 대한 계시를 받는다. 그들의 증언이 끝나면 지하의 짐승이 그들을 죽일 것이고, 그 주검은 큰 도성의 한길에 버려질 것이다. 사람들은 이를 보고 기뻐할 것이나 곧 그들에게 하느님의 생명의 숨이 부어지고 그들은 하늘로 오른다(제1독서).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어떤 사람이 아내를 남기고 죽었는데 모세의 율법에 따라 그의 형제들이 차례로 형수를 맞아 대를 이으려다가 모두 죽었다면, 부활 때에 그녀는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하는지 묻는다. 예수님께서는 저세상에서 부활에 참여한 이들에게는 더 이상 시집가거나 장가갈 일이 없다고 말씀하신다(복음).
    제1독서
    <그 두 예언자는 땅의 주민들을 괴롭혔습니다.> ▥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 11,4-12 나 요한에게 이런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여기 나의 두 증인이 있다.” 그들은 땅의 주님 앞에 서 있는 두 올리브 나무이며 두 등잔대입니다. 누가 그들을 해치려고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 그 원수들을 삼켜 버립니다. 누가 그들을 해치려고 하면, 그는 반드시 이렇게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예언하는 동안 비가 내리지 않게 하늘을 닫는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원할 때마다 온갖 재앙으로 이 땅을 치는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증언을 끝내면, 지하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싸워 이기고서는 그들을 죽일 것입니다. 그들의 주검은 그 큰 도성의 한길에 내버려질 것입니다. 그 도성은 영적으로 소돔이라고도 하고 이집트라고도 하는데, 그곳에서 그들의 주님도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모든 백성과 종족과 언어와 민족에 속한 사람들이 사흘 반 동안 그들의 주검을 바라보면서, 무덤에 묻히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땅의 주민들은 죽은 그들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서로 선물을 보낼 것입니다. 그 두 예언자가 땅의 주민들을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흘 반이 지난 뒤에 하느님에게서 생명의 숨이 나와 그들에게 들어가니, 그들이 제 발로 일어섰습니다. 그들을 쳐다본 사람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두 예언자는 하늘에서부터, “이리 올라오너라.” 하고 외치는 큰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원수들이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27-40 그때에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둘째가, 그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그러자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스승님, 잘 말씀하셨습니다.” 하였다. 사람들은 감히 그분께 더 이상 묻지 못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는 부활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두가이들이 자신들의 주장이 사리에 맞다는 식의 이야기를 꺼내며 예수님께 논쟁을 걸고 있습니다. 많은 특권을 가지고 현세적 성공을 중시하며 영적 실재에 냉소적이던 사두가이들의 태도는 우리 현대인에게도 익숙한 모습일 것입니다. 사실 많은 학자와 사상가가 물질주의, 회의주의, 자연주의, 과학주의, 환원주의 등과 같은 말로 삶과 죽음의 문제를 비롯한 세계관을 표현해 왔습니다. 이러한 현대의 사조는 각 개인의 가치관과 행위에도 큰 영향을 미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자신들이 자초한 ‘신 없는 세계’에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는 세계관이나 생로병사의 자연법칙에 종속된 인생관에 따라 부활과 하느님 나라를 판단하는 사람들에게, 부활한 이들은 그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다른 차원의 삶을 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신학생 때 철학 교수 신부님이 이 복음을 말씀하시면서, 모든 것을 ‘영원의 관점에서’ 고찰하라는 네덜란드의 근대 철학자 스피노자의 말을 언급하신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 복음에 대한 또 다른 ‘철학적 주석’을 본다면, 영국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다음과 같은 명제일 것입니다. “세계의 의미는 반드시 이 세계 밖에 있어야 한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사두가이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그들의 질문 내용이 아니라 그들 삶의 자세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가치와 초월적 차원의 삶에 대해 눈뜨는 것을 시작부터 막고 있는 선입견, 결코 변하지 않겠다는 완고함과 자기방어의 의지가 그들의 자세에서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교 철학자가 아닌 스피노자나 비트겐슈타인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고 초월적 세계에 대한 영감을 얻는 것은, 그들이 지닌 ‘더 큰 진리’에 대한 개방성과 열정 때문일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도 부활이 뜻하는 초월적 세상에 대한 정신의 눈을 밝히는 것이 신앙의 여정이기에, 신앙인들은 어쩌면 모두 철학자의 모습을 한 조각씩 간직한 가운데 살아간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가슴속에서 자연스레 생겨나는 진지한 의문들이 아니라 냉소적이고 완고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일 것입니다.
 
-출처 매일 미사-
저녁노을(모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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