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 괴산군 사리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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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참조 및 출처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전통사찰종합정보 |
사진출처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충청북도 괴산군 사리면 사담리 보광산(普光山)에 있는 절. 한국불교태고종에 속한다.
〔창건 및 연혁〕
보광사의 창건주와 창건시기에 대해는 전하는 바 없어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괴산군」〈불우조(佛宇條)〉에서 절의 이름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조선 초기에는 절이 창건되어 법등이 이어지고 있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러나 1799년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는 절이 폐사되었다 하였고,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무렵에 나온 『괴산군읍지(槐山郡邑誌)』에도‘보광사는 보광산에 있는데, 이미 무너진 지 오래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18세기 후반에는 절이 폐허가 되었던 것 같다.
이후 폐허가 된 절은 근대에 와서 1925년에 권봉주(權鳳柱)스님이 초암을 지어 절의 법등을 다시 이었고, 1936년에는 김봉삼(金奉三)스님이 역시 폐허였던 인근의 봉학사터에서 석불을 옮겨 봉안하면서 절을 중창하였다. 최근에는 1991년부터 운산(雲山)스님이 주석하면서 절을 중수하기 시작하였는데, 1993년에 낡은 법당을 헐고 새로운 법당을 지었으며, 2002년에는 삼성각과 요사를 새로 건립하였다.
〔당우 및 문화재〕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과 산신각·요사채 등이 있다. 대웅전 안에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0호로 지정된 괴산 봉학사지 석조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상호(相好)는 단정하고 안정감을 주며, 여성적인 온후함과 자비가 넘치는 걸작품으로서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 여래좌상은 원래 봉학사(鳳鶴寺) 법당에 있던 주불이었는데 조선 헌종 때 충청도관찰사인 김소(金素)의 묘를 쓰고자 절을 헐고 불상의 머리를 절단하여 매장하였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약 150년 전에 보광산 밑의 하도마을에 사는 손씨의 꿈에 노승이 나타나 100여 년 동안 흙 속에 묻혀 있었다며, 때가 되었으니 보광사 남쪽의 언덕에 있는 불상을 파내어서 봉안하라는 현몽을 얻었다 한다. 손씨는 같은 꿈을 세 번 꾸고 난 뒤 10여 인의 동조자들과 함께 불상을 찾아 제사를 지냈으며, 그 뒤 많은 불공객들이 찾아왔을 뿐 아니라 손씨 집안은 크게 번창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 절에서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9호로 지정된 괴산 봉학사지 오층석탑을 관리하고 있다. 이 밖에도 옛 절터에는 고려 초기의 석등하대석(石燈下臺石)·주춧돌·기와조각 등이 남아 있다.
〔가람배치〕
보광산 정상 아래에 자리한 보광사는 대웅전, 삼성각, 요사 건물로 작은 가람을 이루고 있다. 정남향한 가람은 횡으로 길게 펼쳐진 형태로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측에 삼성각, 우측에 요사가 있다. 또한 절에서 산 쪽으로 약 200m 정도를 올라가면 봉학사지라는 절터가 나오며, 이곳에는 고려시대 초기의 오층석탑이 남아있다.
〔사찰풍경〕
사라진 봉학사(鳳鶴寺)의 후신(後身) 보광사(普光寺)
대웅전 처마 끝에서 보면 끝없이 펼쳐지는 낮은 산들이 손에 잡힐 듯 친근해 보이고 마음까지도 시원해진다. 대웅전 오른쪽 바위 밑에선 석간수가 샘솟는데 아무리 가물어도 넘쳐 나는 샘물이 맛 또한 그만이다.
보광사는 없어진 봉학사의 후신으로 그 명성을 간직해 오고 있으며, 봉학사지 석조여래상을 대웅전에 주존불로 모시고 있다. 이 부처님에 대해 전해져오는 전설은 백 년의 세월을 건너뛰며 이어져 있어 신비가 더 하다.
조선 헌종 때 충청도 관찰사였던 김소(金素)가 죽어 명당을 구하다 마침 봉학사(鳳鶴寺)터가 금계포란형의 천하의 명당임을 알고 절을 폐하고 묘를 썼다. 이때 이 부처님은 목이 부러지는 운명에 처해 지금의 보광산 언덕에 묻히게 된다. 그런데 하루는 김소의 자손에게 한 스님이 찾아와서 명당을 더 복되게 하려면 계곡 아래 물을 막아 복이 새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했다. 자손은 귀가 솔깃해서 스님의 말을 따랐으나 오래지 않아 집안에 화가 겹쳐 망하고 말았다. 물을 막음으로 해서 금계가 품고 있던 알이 다 썩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로부터 백년 후 보광산 아래 마을에 사는 손씨는 똑같은 꿈을 세 번이나 꾸었다. 스님 한 분이 나타나서 "나는 백년 동안이나 묻혀 있었다. 이제 때가 되었으니 보광산에 올라가 언덕을 파면 돌부처가 나올 것이니 잘 봉안하라."는 꿈이었다. 그래서 손씨는 십여 명의 동료를 모아서 언덕을 파고 이 부처님을 모셔다 지금의 보광사에 봉안했다고 한다.
명당이란 자연의 섭리를 거역하지 않고 지은 인연에 따라 복이 되는 곳을 이르는 것이다. 불가에 복전(福田)이란 말이 있다. 복을 지을 수 있는 터전이란 말이다. 그렇다면 명당이나 복전이나 그 자체가 복을 주는 것은 아니다. 복은 명당을 운위하는 사람, 복전을 일구는 사람, 그 사람이 짓는 수많은 행실의 결과로 만들어지고 창조되는 것이다. 착하고 성실한 사람에게는 명당도 복전도 따로 없다. 지장보살에게는 지옥도 복전이지 않는가?
〔설 화〕
대웅전에 봉안된 석조여래좌상은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이 불상은 본래 봉학사(鳳鶴寺)의 법당에 있었는데, 조선 헌종 때 충청도 관찰사였던 김소(金素, 1602~1666)의 자손들이 김소의 묘를 법당 자리에 쓰면서 불상을 근처에 파묻었다. 이 절터가 풍수지리설에서 금계포란형의 명당자리로 소문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스님이 찾아와 명당을 더 복되게 하려면 계곡 아래 물을 막아 복이 새나가는 것을 막으라고 일러 주었고, 자손들이 그 말대로 하자 집안이 망했다. 금계포란형은 금닭이 알을 품은 형국인데, 물이 흐르지 못하여 알이 썩는 바람에 집안이 망했던 것이다.
그 뒤 19세기 중엽 보광산 아래 하도마을에 사는 손(孫)씨의 꿈에 노승이 나타나서 옛날에 파묻은 불상의 위치를 알려주고는 ‘이제 때가 되었으니 보광사 남쪽 언덕에 있는 땅속에서 불상을 파내어 봉안하라’고 하였다. 이에 손씨는 마을사람들과 함께 올라가 불상을 파내고 봉안하였는데, 이후 손씨 집안은 크게 번창하였다고 한다. 1935년까지만 해도 건물 밖에 있던 불상은 김봉삼(金奉三)스님이 주지로 오면서 대웅전에 봉안하게 되었다.
〔교통안내〕
■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
〔중부고속도로 증평IC〕
증평IC---(510번국도 괴산, 문경방면)---연탄사거리---(영광병원)---미암사거리---화성교차로---사곡교차로---청룡교차로---(청결고추 조형물)---수암교차로---시동마을 입구---(산길로 1.5km)---보광사
〔중부내륙고속도로 연풍IC〕
연풍IC---(34번국도 괴산방면)---칠성면---괴강삼거리---(1.2km)---대덕사거리---(37번국도 금왕, 음성방면 3km)---괴산교차로---(34번국도 증평, 청주방면 5km)---유평터널---(4km)---수암교차로---(산길로 1.5km)---보광사
■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서울 -> 청주고속버스(1일 35회) 1시간 30분
청주 -> 사리직행버스(1일 40회) 40분
시동마을 입구에서 하차하여 절까지는 걸어서 가야함.(거리는 약 1.5km정도이나 길이 꼬불꼬불하고 험하여 대략 50분 정도 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