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주사 法住寺
충청북도
소재지 : | 보은군 속리산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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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참조 및 출처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전통사찰종합정보 |
사진출처 : | 20090614 촬영 |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 속리산(俗離山)에 있는 절.
〔창 건〕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이다. 553년(진흥왕 14)에 의신(義信)이 창건하였고, 그 뒤 776년(혜공왕 12)에 진표(眞表)가 중창하였다. 절 이름을 법주사라 한 것은 창건주 의신이 서역으로부터 돌아올 때 나귀에 불경을 싣고 와서 이곳에 머물렀다는 설화에서 유래된다.
그러나 이 절은 진표와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미륵신앙의 중심 도량이 됨으로써 대찰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즉, 금산사(金山寺)를 창건한 진표는 제자 영심(永深) 등에게 속리산으로 들어가서 길상초(吉祥草)가 난 곳을 택하여 가람을 이룩하고 교법을 펴라고 하였다. 이에 영심 등은 속리산으로 들어가 길상초 난 곳을 찾아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길상사(吉祥寺)라 하였다.
〔연 혁〕
고려시대에 들어서 법주사에는 뛰어난 고승대덕들이 주석하면서 여러 차례 중창이 거듭되었다. 먼저 문종(1046∼1083)의 다섯 째 왕자였던 도생 승통(導生僧統)이 절의 주지를 지냈다.
도생 스님의 행장은 자세히 전하지 않으나 투철한 법상종 승려였던 혜덕 왕사를 은사로 출가하였다. 이것은 그가 곧 법상종 승려임을 알 수 있고, 나아가 그가 주지를 지낸 법주사 역시 신라 이래의 법상종 전통을 계속해서 이어 나갔다는 사실로도 이해 할 수 있다.
고려시대 절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자료는 인종 때(1122∼1146) 김부식(金富軾)이 편찬한 「속리사점찰법회소(俗離寺占察法會疏)」, 1342년(충혜왕 3)의 「고려국속리산법주사 자정국존비명(高麗國俗離山法住寺慈淨國尊碑銘)」, 그리고 「도생승통비(導生僧統碑)」 등이다. 이를 통해 먼저 인종 때까지는 법주사를 산 이름과 같은 속리사로 불렀고, 유학자 김부식이 왕명으로 점찰법회 소문을 지을 만큼 사격이 높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원종 때(1259∼1274)는 자정 미수(慈淨彌授, 1240∼1327) 대사가 절에 주석하였다. 스님은 고려 중기의 유명한 법상종 승려다.
1281년(충렬왕 7) 왕이 절에 행차하여 산호전(珊瑚殿)에 참배하였고, 뒤이어 충숙왕도 절을 다녀갔다. 1363년(공민왕 12)에는 왕이 절에 들렀다가 양산 통도사(通度寺)에 사신을 보내 부처님의 사리 1과를 법주사에 봉안하도록 하였다. 이 사리탑은 지금 능인전 뒤쪽에 그대로 남아 있다.
조선시대 들어서도 절의 법등은 계속 이어졌다. 조선 초 세조 때(1455∼1468)는 신미(信眉) 대사가 머물며 절을 크게 중창하였다. 세조의 스승으로서 큰 존경을 받았던 신미 스님은 이보다 앞선 1449년(세종 31) 12월에 속리산 내의 복천사(福泉寺)를 중창하기도 하였다. 이 사실을 기록한 「복천사중수보권문」이 전한다. 이 무렵 법주사를 방문한 세조는 절 초입에 서 있는 소나무 밑을 지나게 되었는데 소나무가 스스로 가지를 들어 가마가 무사히 지났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그 유명한 정이품송이 탄생한 것이다.
조선 중기 절은 60여 동의 전각과 70여 개의 암자를 거느린 대찰이었다. 그러나 1592년(선조 25)의 임진왜란으로 대부분 전각이 불에 타 없어지는 비운을 겪었다. 부분적으로 중수를 계속했으나 정유재란을 맞아 또다시 절이 전부 불타버렸다. 전쟁 뒤에는 1605년(선조 38)부터 1626년(인조 4)에 걸쳐 사명(四溟) 대사 유정(惟政) 스님이 팔상전을 중건했다. 1624년 다시 중수가 시작되어 이듬해 불사를 마치고 「법주사사적기」를 편찬하였다.
그 뒤 벽암 각성(碧巖覺性, 1575∼1660) 스님이 황폐화된 절을 중창하였다. 1851년(철종 2) 3월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이 힘을 기울여 국가적 규모의 중수가 이루어졌다. 1872년(고종 9)에는 지금의 금동청동미륵대불 자리에 있었던 2층 규모의 용화보전이 헐렸다. 1927년 진하당(震河堂)과 탄응당(坦應堂) 대사의 비를 세웠다.
1939년 미륵불상 조성이 시작되었다. 주지 장석상(張石箱) 스님이 발원하고 전라북도 태인에 살던 김영곤(金永坤) 거사가 시주하여 80척의 미륵상 조성이 시작되었으나 조각을 맡았던 김복진(金復鎭)이 요절하면서 중단되고 말았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희사로 1963년 3월에 재착수하여 1964년에 완공하였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1967년 금오 태전(金烏太田, 1896∼1968) 스님이 기울고 퇴락한 전각을 중수하였다. 1974년 정부의 지원으로 가람의 전각 대부분을 보수하고 복원하였다. 1975년 현대불교의 산증인이었던 금오 스님의 부도와 비를 세웠다. 1976년 주지 탄성(呑星) 스님이 대웅보전을 보수하고, 범종각을 새로 지었다. 1990년 주지 월탄(月誕) 스님 주도하에 미륵상을 대대적으로 중수하였으며, 하부에 성보전시관인 용화전을 마련하였다. 1996년 지장보살도를, 그리고 이듬해 약사후불탱화를 각각 조성 봉안하였다.
〔당우와 문화재〕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보전·팔상전(捌相殿)·명부전(冥府殿)·원통보전(圓通寶殿)·약사전(藥師殿)·천왕문(天王門)·금강문(金剛門)·능인전(能仁殿)·진영각(眞影閣)·사리각(舍利閣)·염화실(拈華室)·삼성각(三聖閣)·응향각(凝香閣)·진해당(振海堂)·궁현당(窮玄堂)·명월료·정제당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대웅보전은 1624년(인조 2)에 벽암이 중창할 때 건립한 것으로, 총 120칸에 건평이 170평, 높이가 61척에 달하는 대규모의 건물이다. 보물 제915호로 지정되어 있다. 다포식(多包式) 중층건물로서 무량사(無量寺) 극락전, 화엄사 각황전(覺皇殿) 등과 함께 우리 나라 3대 불전(佛殿)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내부에 모셔진 삼존불은 벽암이 중창할 때 조성한 것으로 중앙에는 법신(法身)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좌측에 보신(報身)인 노사나불(盧舍那佛), 우측에 화신(化身)인 석가모니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각각의 앉은키가 5.5m, 허리둘레만도 3.9m에 이른다.
국보 제55호인 팔상전은 5층 목탑으로서 우리 나라 목탑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팔상전은 신라 진흥왕 때 의신이 세웠고, 776년에 병진(秉眞)이 중창하였으며,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1605년(선조 38)에 재건하였다.
원통보전은 정방형의 특이한 건축양식을 갖춘 건물로서 의신(義信)이 창건하고 진표가 중창하였으며, 벽암이 1624년에 삼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내부에는 높이 2.8m, 허리둘레 1.9m의 관세음보살좌상이 안치되어 있는데, 머리에는 수려한 보관을 쓰고 얼굴에는 옅은 미소를 담고 있는 거대한 목상(木像)이다. 원통보전은 보물 제91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일주문은 정면 1칸의 건물로서 ‘호서제일가람(湖西第一伽藍)’이라는 현판이 있다. 금강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내부에는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과 사자를 타고 앉은 문수보살(文殊菩薩), 코끼리를 타고 앉은 보현보살(普賢菩薩)을 안치하였다. 천왕문은 국내의 천왕문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서, 1624년 벽암이 중창하였고 1974년에 새롭게 단청하였다.
진영각은 이 절을 거쳐간 고승들의 영정을 봉안한 곳으로서, 일명 선희궁원당(宣喜宮願堂)이라고도 한다. 이 같은 이름이 붙은 까닭은 조선 제21대 영조의 후궁이었던 영빈 이씨(映嬪李氏)가 사용하던 원당(願堂)이었기 때문이다.
내부 중앙에 개산시조(開山始祖) 의신과 전법초조(傳法初祖) 태고화상(太古和尙)의 영정이 있고, 좌우로 이름을 알 수 없는 2인의 영정을 비롯하여 세홍(世弘)·함월(函月)·명찰(明察)·정준(靜俊)·장신(莊信)·도홍(道弘)·홍민(弘玟)·지영(智榮)·영린(玲璘)·진하(震河)·탄응(坦應)·석상(石霜)·금오(金烏)·명일(冥一)·보흔(普欣)·충은(衝恩)·법영(法英) 등 모두 24인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사리각에는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신 사리탑과 이 탑을 조성하게 된 연기(緣起)를 적은 세존사리비(世尊舍利碑)가 있다. 1650년(효종 1)에 건립한 세존사리비에는 이 사리탑이 1362년(공민왕 11)에 세워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공민왕이 이 절에 행차하였을 때 왕은 사신을 통도사로 보내 석존사리 1립(粒)을 옮겨오게 하여 봉안하였다고 한다.
염화실, 응향각은 대웅전 서쪽에 있는 일련의 건물로서, 모두 선원(禪院)에 부속된 것이다. 예전에는 대향각이 있었으나 현재는 총지선원(總持禪院)이라는 이름을 가진 선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선원 위에 있는 염화실은 조실(祖室)이 기거하는 곳이며, 응향각은 노전(爐殿)이라는 직책을 맡은 승려가 거처하는 곳이다.
그리고 이 절에 있었던 유지(遺址)로는 용화보전(龍華寶殿)이 있다. 이 용화보전은 법주사의 정신을 상징하는 중심 법당이었다. 용화보전은 산호전이라 불리었고 산호보광명전(珊瑚普光明殿)이라고도 불리었는데, 산호전이라는 명칭은 이 전각의 후면 암석을 산호대라고 불렀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사적기에 의하면 용화보전은 2층으로 되어 있었고, 크기는 35칸으로 대웅전 28칸보다 더 크고 웅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이 전각 안에는 금색의 장륙상(丈六像)이 안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872년(고종 9)에 대원군이 경복궁 복원을 위한 당백전 주조의 명목으로 불상을 압수하라는 명을 내려 불상은 압수되고 용화보전은 헐리게 되었다.
현재에도 옛터에는 당시의 초석과 미륵삼존불의 좌대 3기가 있다. 이 용화보전 터에는 1964년 시멘트로 만든 미륵불입상이 조성되었으며, 1986년 이를 헐고 청동 160t을 들여서 1989년 사월초파일에 높이 33m의 청동미륵대불이 점안(點眼)되었다.
이 절의 국가지정문화재로는 국보 제5호인 법주사쌍사자석등(法住寺雙獅子石燈)을 비롯하여 국보 제64호인 법주사석연지(法住寺石蓮池), 보물 제15호인 법주사사천왕석등(法住寺四天王石燈), 보물 제216호인 법주사마애여래의상(法住寺磨崖如來倚像), 보물 제848호인 신법천문도병풍(新法天文圖屛風), 보물 제1259호인 법주사괘불탱이 있다.
이 가운데 미륵대불 앞에 위치하는 희견보살석상은 향로를 머리에 이고 굳건히 서 있다. 즉, 향불을 머리에 이고 부처님께 공양하는 모습이다. 이것은 진표나 영심 등이 대성(大聖)의 수기를 얻기 위하여 개인의 일신을 아끼지 않던 법상종 특유의 신앙형태를 조형적으로 나타낸 의미심장한 걸작이다. 즉, 부처님을 향한 믿음이 굳건하므로 머리의 뜨거움, 손의 뜨거움을 잊고 일심으로 향로를 받드는 모습이다.
또 자정국존비는 1314년(충숙왕 1)에 세운 것이며, 절에 이르는 길가에는 세조의 어련(御輦)이 지나갈 때 길을 비켰다는 정이품송(正二品松, 천연기념물 제103호)이 있다.
현존하는 산내 암자로는 수정암(水晶庵)·복천암(福泉庵)·중사자암(中獅子庵)·여적암(汝寂庵)·탈골암(脫骨庵)·상환암(上歡庵)·상고암(上庫庵), 근래에 중건된 동암(東庵) 등이 있다.
소장문화재 목록 및 해설
보물 제1360호 법주사소조삼불좌상(法住寺塑造三佛坐像)
보물 제1361호 법주사목조관음보살좌상(法住寺木造觀音菩薩坐像)
사적 및 명승 제4호 속리산법주사일원(俗離山法住寺一圓)
〔사찰풍경〕
충청북도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에 자리한 법주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본사이다. 속리산의 8개의 봉우리와 8개의 대(臺), 8개의 돌문이 그것인데 이들이 연꽃잎처럼 감싼 터에 절은 자리 잡고 있다. 이처럼 법주사를 둘러싼 속리산은 산 그자체로 불국토의 형상을 취한 셈이다.
진표율사(眞表律師)의 법맥을 이은 영심대덕(泳深大德)이 길상사(吉祥寺)로 본격적인 사찰의 문을 연 이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법상종 사찰로 자리 매김하였다.
이때부터 절에는 미륵장육상을 모셔 미륵하생의 도량으로서의 구실을 하기 시작하였다. 고려시대에 들어서는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대각국사 의천(義天)의 동생인 도생(道生) 승통이 주지를 맡는 등 법상종 사찰로 위치를 굳혀갔다.
이후에는 자정(慈淨), 신미(信眉), 일선(一禪), 각성(覺性), 희언(熙彦), 만공(滿空), 금오(金烏) 선사 등으로 이어지는 법맥을 지켜왔다.
진표(眞表) 율사와 영심(영심) 대덕 때 만들어진 미륵불 중심의 가람배치는 고려시대에 들어 화엄과 미륵을 함께 모시는 신앙형태를 취하면서 대광명보전과 산호전의 두 불전 축이 직교하는 배치형태로 자리 잡았다.
근래 들어 다시 산호보전 청동미륵대불을 조성하여 다시금 미륵신앙의 중심지를 표상하고 있다. 법주사를 대표하는 건물은 5층 목탑형태의 팔상전인데 임진왜란 이후 다시 지었지만 현존하는 몇 되지 않는 목탑에 속한다. 조선후기 왕실과의 관계는 사찰 안에 왕실 원당인 선희궁 원당을 짓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법(法)이 상주할 수 있는 탈속의 세계를 상징하는 법주(法住)란 절 이름처럼 법주사는 청동미륵대불을 중심으로 하여 미륵도량으로서 거듭나고 있다.
〔설 화〕
창건설화
553년(신라 진흥왕 14)에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창건 과정은 조선시대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근대에 완성된 조선불교통사 등에 설화적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553년 무렵 신라에 의신(義信) 스님이 있었는데, 불법을 구하고자 머나먼 천축국(天竺國, 인도)에 유학의 길을 떠났다. 공부를 마친 후 신라로 돌아오면서 흰 노새 한 마리에 불경을 싣고 돌아 왔다. 그 뒤 스님은 절을 지을 만한 터를 찾아 이리 저리 순방하던 중, 흰 노새가 지금의 법주사 터에 이르러 발걸음을 멈추고 우는 것을 보았다. 노새의 기이한 행적에 깨달은 바가 있어 걸음을 멈추고 산세를 둘러보니 아름다운 절경에 비범한 기운이 서려있었다. 마침내 이곳에 절을 짓고 절 이름을 인도에서 가져온 경전, 즉 부처님의 법(法)이 이곳에 머물렀다(住)는 뜻에서 법주사라 지었다.
이와 같은 의신 조사의 창건 설화는 실제의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고 보기도 한다. 우선 절을 창건하였다는 553년은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때이다. 이후 신라의 고승들이 가까운 중국 유학 길에 떠나는 것도 7세기 이후부터 비롯되는데 머나먼 인도까지의 험난한 역정을 통해 불경을 가져왔다는 말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절에 관한 이러한 설화적 창건담은 절 이름인 법주사의 뜻풀이에서 비롯된 이야기일 것이다.
〔교통안내〕
1) 자가운전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할 경우 수원-천안-청주, 청원IC를 거쳐 보은, 속리산으로 갈 수 있다.
영동고속도로를 탈 경우 강릉-원주-이천-진천-증평IC로 나와 미원을 거처 보은, 속리산으로 방향을 잡으면 된다.
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할 경우 정읍-전주-대전-회덕분기점-옥천IC로 나온다. 여기서 보은, 속리산으로 방향을 정해 가면 이정표가 잘 표시되어 있다.
2) 대중교통
서울에서는 남부터미널과 동서울터미널에서 보은, 속리산으로 가는 버스가 있는데 3시간 30분가량 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