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불화,탱화

대비사 大悲寺

문성식 2014. 11. 13. 16:45
소재지 : 청도군 금천면 
원문참조 및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전통사찰종합정보 
사진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대비사대웅전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박곡리 운문산(雲門山)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桐華寺)의 말사이다.

 

〔창건 및 역사〕

「호거산 운문사 사적기」에 의하면 567년(신라 진흥왕 28)에 창건되었는데 창건주의 이름은 알 수 없고 557년(진흥왕 18) 한 도승이 운문산에 들어와 현재 금수동 북대암 자리에 초암을 짓고 3년 동안 수도하더니 그러던 어느 날 산과 골이 진동하여 새와 짐승이 놀라 우는 소리를 듣고 그 곳이 오령(五靈)이 숨어 사는 곳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도우 10여명과 절을 짓기 시작하여 중심부에 대작갑사(大鵲岬寺 : 지금의 雲門寺), 동쪽에 가슬갑사(嘉瑟岬寺), 남쪽에 천문갑사(天門岬寺), 서쪽에 이 절인 대비사, 북쪽에 소보갑사(所寶岬寺)를 각각 지었는데, 역사가 다 끝난 시기가 567년이었다고 한다. 이중 대작갑사가 지금의 운문사이고 소작갑사가 대비사이다.

 

〔중 창〕

589년(진평왕 11) 원광(圓光)이 중창하였고, 대비갑사(大悲岬寺)로 이름을 바꿨다. 고려 인종 때에는 원응국사(圓應國師) 학일(學一)이 중창했다. 일제강점기에 대웅전을 중수했으며, 1950년 6.25를 전후하여 금천면민들의 성금으로 주지 응교(應敎)가 다시 대웅전을 중수했다.

 

〔산내암자〕

산내 암자로는 도솔암(兜率庵)과 옥련암(玉蓮庵)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보물 제834호 대웅전과 요사채가 있다. 대웅전은 조선 중기의 것이다.

 

〔문화재〕

유물로는 많은 수의 부도들이 있는데, 이 중에는 소요 태능(逍遙 太能)과 취운 학린(翠雲 學璘) 등의 부도도 있다.

대비사대웅전[보물 834]

 

〔사찰풍경〕

새는 울어도 눈물이 나지 아니하고

꽃은 웃어도 시끄럽지 아니하며

대나무 그림자 뜰을 쓸어도

먼지가 일어나지 않으며

밝은 달빛이 물 밑을 뚫어도

물에는 아픈 상처가 없다네.

(일타 스님의 보살행 중에서)

경치가 아름다운 청도에서도 대비사를 찾아가는 길은, 만나는 마을들의 정겨움으로, 산과 들의 풍요로움으로, 그리고 호수의 잔잔함으로 절집에 도착하기 전에 마음이 정화되는 듯하다.

절집에 들어서면 일반적 시골 농가와 절집이 혼합된 수행과 생활이‘불이’라는 느낌이 든다. 빛바랜 대웅전이 오랜 세월을 말해줄 뿐 너른 고추밭의 널린 일거리들 사이에서 머리에 수건을 쓰고 밭고랑 사이를 누비고 다니는 농촌 아낙의 삶의 모습이 느껴진다.

대비사는 신라 진흥왕 때 신승이 호거산(운문산)에서 수행하던 중 산에 오령이 있음을 알고 7년 동안 5개 사찰(오갑사: 대작갑사, 가슬갑사, 천문갑사, 소작갑사, 소보갑사)을 지은 것 중 지금의 운문사인 대작갑사와 대비사인 소작갑사만이 남아 있다. 그 후 여러 스님들이 중창을 거듭하다 고려 시대 박곡리 마을 내에 있던 것을 학일 스님이 중창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절집의 이름이 대비사라 한 것은 불교의 대자대비라는 뜻으로 지어진 것이라 하나 일설에는 신라 왕실의 대비라는 왕비가 수양 차 이 절에 와서 지낸 것이 인연이 되어 대비갑사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이절은 부도밭에 있는 고승대덕들의 부도와 대웅전의 불단 내부에서 발견된 묵서의 기록 등으로 17세기 중건된 사실이 전통을 말해 준다 하겠다. 그보다 절집에 머물며 이리저리 발길을 옮기다 보면 절집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주변에서 느껴지는 따뜻함과 편안함이 일타 스님의 보살행이란 법문이 생각나는 그런 절집이다.

 

〔설 화〕

실이호박소의 꽝칠이

옛날 금천면 박곡리에 대비사라는 절이 있었다. 그 절에 살고 있는 사람은 단 두 사람 한 사람은 주지 스님이고 다른 한 사람은 13, 4세쯤 되는 상좌 중이었다.

어느 해 몹시 가뭄이 들어 모든 곡식들이 시들고 타서 농부들이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절에도 채소를 좀 가꾸는데 이곳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단 하나 그렇지 않은 밭이 한때기 있었다. 그 밭은 나이 어린 상좌 중이 가꾸는 채소밭이었다. 그 밭은 웬일인지 채소가 파릇파릇 잘 자라고 흙도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그런데 그 절의 상좌중은 매일 같이 자정이 되면 항상 슬며시 방을 나가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주지 스님이 생각하니 상좌중이 가꾸는 채소밭만 가뭄이 들지 않는 것도 이상하려니와 매일같이 밤중에 상좌중이 나가는 것도 이상하여 몰래 따라가 보았다. 가뭄에 탄 여름밤이라곤 하지만 귓전에 스치는 바람은 서늘하였다.

과연 상좌중은 이상한 짓을 하더니 사람이 아니었다. 겁먹은 주지 스님은 와들와들 떨며 돌아와 들킬까봐 자는 시늉을 하였다. 조금 있다 돌아온 상좌 중이 이불 속으로 들어오려 할 때 눈을 뜨며 “너 어디 갔다 왔니?”하며 다정히 물으며 손을 만져보니 얼음장 같이 차가웠다. 상좌중은 웃으며 변소에 다녀왔다고 하였다. 다음날 주지 스님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상좌 중을 따라가 보았다. 어제와 같은 일이 일어났다. 용으로 화하는 것 이었다.주지스님은 몰래 돌아 왔으나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러다 해가 바뀌었다. 어느 날 상좌중의 행동이 더욱 의심스러워 따라가 보니 그날은 용이 되어 승천하는 날 이었다. 상좌 중이 한참 용으로 화하려 할 때 내력을 모르는 주지스님은 자기도 모르게 ‘으흠’하고 기침을 하였다.

그때 그만 상좌중은 용이 되지 못하고 꽝철이가 되어 날아가며 하도 원통하고 분해서 주위에 있는 바위를 꼬리로 쳐 산꼭대기의 바위가 둘로 갈라지고 그때 떨어져나간 꼬리가 바위틈에 끼어 거미로 변해 매년 한사람씩 헤쳤다고 한다.

두 조각난 바위는 지게바위 라하고 지금도 산마루에 우뚝 솟아 있다. 지금도 그 부근엔 바로 선 바위가 없는데 용이 되려다 못되고 꽝철이가 된 상좌중이 용이 되었을 때 물에 앉으려고 바위를 다 쳐 냈기 때문이라 하고, 꽝철이는 밀양에 있는 실이 호박 소에 가서 살았다 한다. 그곳은 물이 휘어 도는 곳으로 깊이가 수십 길이 된다고 한다.

그 꽝철이가 움직이면 비가 오지 않는다 하고 실이 호박 소에서 나왔다고 소문이 나면 꽝철이를 쫓기 위해 산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데 이것이 기우제의 시작이라 한다.

 

〔교통정보〕

-대중교통 이용시 ; 서울-청도(버스, 철도)-박곡리 6회 운행

-자가용 이용시; 경부 고속도로 북대구I.C - 신천대로 - 앞산 순환도로 - 25번 국도 청도 방향 - 20번 국도 동곡 방향 - 박곡리 - 대비 저수지 - 대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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