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가톨릭교회란 무엇인가? - 전광진 신부

문성식 2010. 9. 29. 14:39

제1강 가톨릭교회란 무엇인가? (대구가톨릭대교수-전광진신부)


신앙인들은 신앙에서 큰 힘을 얻는다.

우리는 먼저 우리를 신앙의 길로 불러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려야 하겠다.

신앙의 길은 생명의 길이다. '죽음이 전부가 아니다.' 죽은 다음에 영원히 사는 길... 주님을 믿고 그 가르침을 따라 살면 이 세상에서 행복하고 죽어서 영원히 사는 이 귀한 신앙,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신앙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귀한 신앙의 길을 모르고 세상 덧없는 일에 마음이 빼앗겨서 정신없이 바쁘게 산다. 그러다가 문득 길이 막히면 어쩔 줄 몰라 한다. 괴로워하고 불안해하고...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참 많다. 그러다가 결국 소중하고 귀한 인생을 망치는 사람들도 많다.

사람이 한평생을 살면서 어려움과 고통을 피해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누구도... 아무리 많이 배웠거나 아무리 많이 가진 사람도... 어려움과 고통을 겪을 때 신앙은 든든한 울타리와 의지가 될 것이다. 신앙 안에 사는 것이 얼마나 든든한지... 그저 고맙고 감사할일이다.

가톨릭신앙은 마음을 건강하게 해줄 것이다. 정신을 튼튼하게 해줄 것이다.

우리는 가톨릭교회에 몸담고 있는 신앙인들이다.

성당에 20년씩 다녀도 가톨릭교회가 무엇인지 얼른 입이 잘 안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가톨릭교회가 무엇인지 그 핵심을 알고 있어야겠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셨다. 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부른다.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나? 구체적으로 이런 일을 하셨다.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죄인들은 용서해주고, 병자들은 고쳐주고, 죽은 사람은 살려주고... 없는 사람들은 있는 사람들에게서 얻어다가 나누어주고..."

예수께서 승천하실 때가 되자 이런 일이 계속되기를 원하셨다. 그렇게 해서 창립하신 것이 바로 가톨릭교회였다. 교회를 창립하시면서 예수께서는 수제자였던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베드로야, 너는 반석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누르지 못할 것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마태 16,18-19)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주면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요한 20,23)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에 사도들은 각 지역으로 흩어져서 복음선포에 주력했다. 복음... 말 그대로 기쁜 소식이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그 가르침대로 살면, 현세에서 복되고, 죽어서는 천국간다'는 소식이다.

사도들은 처음에는 모욕도 당하고 박해도 받았지만 조금씩 믿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모습이다. 에페소라는 도시에, 필립비에, 고린토에... 한 도시에 교회가 생겨나면 사도들은 그 교회를 운영할 책임자를 뽑았다. 이 사람들이 오늘날로 말하면 주교들이다. 주교는 일을 도와줄 협력자들을 뽑았다. 이 사람들이 신부와 부제들이다. 이렇게 해서 초대교회부터 주교-신부-부제라는 세 단계의 성직자들이 교회를 운영하게 되었다.

여기에 가톨릭교회의 핵심 세 가지가 들어 있다.

첫째, 가톨릭교회는 예수께서 '직접' 세우신 교회다.

둘째, 예수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를 운영할 권한(교도권)을 사도들에게 주셨다.

셋째, 이 교도권이 사도들의 후계자들을 통해 계속 ‘계승’되도록 하셨다.

그래서 가톨릭교회는 사도 베드로를 1대 교황님으로 해서 지금 베네딕도16세 제265대 교황님까지 이어져 내려온 교회다.

사도로부터 이어지는 이 '사도성'이 가톨릭교회가 참교회라는 가장 확실한 근거다.

가톨릭교회는 개신교교회와 비슷한 것 같지만 본질적으로 다르다.

개신교의 교회관은 이렇다. "예수께서 교회를 세우시기는 세우셨지만, 예수께서 세우신 교회는 사도들이 죽음으로써 없어졌다. 계승되는 것이 아니다. 참된 교회는 각자의 양심 안에 있는 것이고, 누구나 양심에 따라 교회를 세울 수 있는 것이다."

사도로부터 이어지는 사도성이 아니라 개인이 세울 수 있는 '임의성'이 개신교의 한계다.

개신교교회는 누구나 교회를 세울 수 있다. 좋은 목사님을 모셔올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하면 내보낼 수도 있다. 말하자면 개신교교회는 '사람이 세우는 교회'다.

가톨릭교회는 누구나 세울 수 있는 교회가 아니다.

가톨릭교회는 예수께서 직접 세우신 교회다. 그리고 이 교회의 운영을 사도들에게 맡기신 것이고, 사도들의 후계자들인 주교들을 통해 계속 계승되도록 한 것이다. 그래서 가톨릭교회는 처음부터 사도들을 주님의 대리자로 존경해왔고,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을 주님의 대리자로 순명해왔다. 또 주교로부터 사목의 책임자로 파견된 본당신부의 뜻을 가능하면 따르는 것이 전통이었다.

유럽에서 개신교가 시작된 것이 1521년이었다.

당시 아오스딩 수도회 수사신부였던 마르틴 루터신부가 가톨릭교회를 비판하고 나섰을 때, 신학자였던 요한 에크신부와 신학공개 토론회가 개최되었다. 1519년 독일 Leipzig에서였다. 루터신부는 가톨릭이 잘못되었다고 조목조목 비판을 했고, 에크신부는 루터신부를 설득하려고 했다. 오랫동안 토론이 계속되었지만 루터신부는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에크신부는 루터신부에게 마지막으로 이렇게 물었다. "루터신부, 당신은 교황과 주교를 인정하는가?"

루터신부는 잠시 주춤거렸지만 단호하게 대답하였다. "나는 교황과 주교를 거부한다."

교황과 주교를 거부하는 것은 주님께서 맡겨주신 교도권을 거부하는 것이고, 가톨릭교회를 거부하는 것이다. 가톨릭교회를 거부하는 것은 가톨릭교회를 세우신 주님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마르틴 루터신부는 가톨릭교회를 거부하고 새로운 교회인 '루터교'를 세운 것이다. 이것이 개신교의 출발점이 되었고, 당시 유럽에 가톨릭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 본을 보여준 것이 되었다. 그래서 너도나도 저마다 교회를 세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즉시 칼빈이 장로교를 세웠고, 영국의 헨리8세 왕이 성공회를 세웠다. 그 후로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참된 교회라고 하면서 많은 교회를 세웠다. 침례교, 감리교...

그래서 가톨릭교회는 처음부터 순명을 소중하게 생각해왔다.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를 거역해서는 가톨릭이 아닌 것이고, 주교가 파견한 사제를 거역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신부들은 주교님께 순명한다. 그리고 본당 일에 대해 서 신자들은 본당신부에게 순명하는 것이다.

사실 신부도 개인적으로는 주교님께 불만이 있을 수 있고, 주교님의 일처리에 대해서 생각이 다를 수도 있다. 그래도 주교님이 고민하고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마지막으로 결정해서 명하는 것은 거역할 수 없다.

그리고 본당의 모든 일에 대한 책임과 권한은 주교님이 파견하신 본당신부에게 있는 것이고, 신자들은 본당신부의 결정에 순명하는 것이다. 때로는 신자들 보시기에 본당신부님이 인간적으로 좀 부족하고 마음에 안들 때도 있겠지만... 그래도 본당신부는 주교님으로부터 본당사목의 책임자로 파견된 사람이다. 개인적으로 신부님의 결정이 마음에 안들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신부님이 고민하고, 신자들의 의견을 듣고, 마지막으로 결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신자들이 순명해야하는 것이다. 본당신부님을 중심으로 서로 똘똘 뭉쳐야하는 것이 우리 가톨릭교회의 전통인 것이다. 예수께서 이 교회를 직접 세우셨고, 사도들에게 맡기시고, 그 후계자들인 주교님들을 통해서 계속 계승되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오늘날 평신도들이 회의를 통해 본당사목을 결정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는 것 같다. 마치 개신교의 장로들처럼, 가톨릭교회도 간부들이 결정하는 것을 본당신부가 받아들여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 것 같다.

본당에서의 모든 회의는 의결기구가 아니라 심의기구 또는 자문기구다. 최종결정권자는 언제나 본당신부다. 예수께서 처음부터 이러한 교회의 구조를 원하셨고, 그것은 교회의 분란을 막기 위한 뜻이 담겨있는 것이다.

하지만 본당신부님들도 주요한 사목적 결정을 하실 때 혼자 하지 말고, 사목회의를 통해, 또는 가능한 여러 경로를 통해 본당교우들의 의견을 두루 듣고, 그 뜻을 존중해주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본당교우들의 뜻과는 상관없이 무조건 독단적으로 결정하면... 권위주의니, 독선적이라느니 하는 욕을 먹을 수 있다. 요즈음 세상이 얼마나 발전했고, 평신도들의 눈높이가 얼마나 높아졌나... 본당신부님들의 넓은 마음이 꼭 필요한 시대라고 하겠다.

교회와 성전건립.

하나의 본당이 있을려면 다음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는 외적인 것이다.

우선은 신자들과 신부가 있어야 한다. 수녀님을 모셔오면 더 좋을 것이다.

그리고 성전건립이 중요하다.

솔직히 신부들은 신설본당에 발령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다된 본당에 가서 뜨신 물도 잘나오는 본당신부하고 싶지, 새로 본당을 짓는다는 게 어디 보통일인가. 그래도 누군가는 신설본당을 맡아서 기초를 다져야한다.

신자들은 신설본당을 지으면서 형편대로 벽돌 한 장씩, 기와 한 장씩 성전건립기금을 모은다. 이런 신자들의 정성이 모아져서 성당이 지어진다. 근데 요즘 너나할 것 없이 다들 얼마나 어렵나. 성전건립기금을 내기가 쉽지 않다. 또 얼마를 내겠다고 약조를 해도 조금씩은 부담을 느낀다. 그래서 다들 물건을 내다판다 우얀다 애를 쓴다. 본당에 있으면 전국에서 전화가 많이 온다. 성전건립기금마련 물건 팔려는 전화다. 다 받기도 그렇고 거절하기도 그런 것이 본당신부님들의 고충이다.

둘째는 내적인 것이다.

첫째는 기도일 것이다. 참으로 기도만큼 우리를 강하게 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기도는 우리를 강하게 하고, 서로 일치하게 한다. 한마음으로 일치하지 못하면 아무리 사람이 많은들 무슨 힘이 있겠나. 억만금의 돈을 쌓아놓고 서로 싸우면 무슨 소용이 있겠나. 진실로 본당 교우들이 서로 일치하고 똘똘 뭉쳐야 참된 본당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가정공동체(가정교회)도 같은 이치다. 대궐 같은 아파트에 살면 뭐하노... 거기 사는 부부가 원수같이 살면 행복은 물 건너 가는 것이다. 반드시 내적인 일치가 행복한 공동체를 만들어 줄 것이다.

 

제2강 죄로 물든 인간성


1. 인간의 근본적인 나약함

사실 우리 인간... 근본적으로 나약한 존재다...

인간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항상 감정의 기복이 심하다. 요랬다 조랬다, 좋았다 싫었다... 외롭고 허전하고... 병들고, 허무하고... 그 마지막 한계가 죽음이다.

우리가 또 말 때문에 얼마나 실수하는지...

'사람은 귀가 두 개고 입이 하나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 말은 '말하는 것보다 두 배는 많이 들으라'는 뜻이다. 혀... 참 다스리기 어렵다. 툭하면 허풍이고 허세고, 툭하면 거짓말이고, 두셋만 모이면 넘 욕하고 헐뜯는다. 그래서 퇴계 이황선생님 말씀, "사람이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것은 그 실천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날부터 대인, 큰 사람은 항상 말조심, 입조심을 해왔다.

삶의 참된 의미를 찾지 못하면 사람은 결국 행복하기 어렵다. 무엇이 참 행복인지를 알지 못하면 허공 속에서 헤매는 구름과 같을 뿐 아니겠나... 참 행복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정신없이 바쁘게 살다가 죽음 앞에서야 후회하면서 하는 말: "허망하다.", "인생이 허무하다.", "일장춘몽 같다.", "이렇게 죽을 것을 내가 왜 내밖에 모르고 아락바락 살아 왔던가." 그리고 배우자에게 하는 말, '여보게, 미안하네...'

구약성경에도 죽음을 앞둔 한 이스라엘의 왕이 이렇게 탄식하고 있다.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하늘아래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나는 누구보다도 많이 배웠다. 이스라엘에서 나만큼 배운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그 모든 지식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이제 죽는데. 또 나는 누구보다도 가진 게 많았다. 이스라엘에서 나만큼 부자가 없었다. 그러나 그 모든 재산도 무슨 소용이 있더냐... 다 바람을 잡는 것과 같이 헛된 일이었다."

우리도 살면서 수없이 인생의 허망함, 텅 빈 가슴을 느끼며 산다. 때때로 너무나 힘들 때, 이래 살아서 뭐하겠노, 차라리 고만 살았으면 얼마나 좋겠나 하는 생각도 들고, 저녁에 잠자리에 들면서 내일 이대로 영원히 눈을 뜨지 말았으면 얼마나 좋겠나 하는 생각도 들 때도 많다. 정신적인 공허함을 이겨 보려고 어떤 사람들은 신흥종교에 빠지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철학관이나 무속에 의지하여 정신적인 공허함을 이겨내려 한다.

원래 하느님께서 만드신 인생은 참 편안하고 좋은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겪으면서 사는 인생, 기쁘고 즐거운 일보다는 힘들고 어려운 일을 더 많이 겪으면서 사는 것이 사실이다.

한마디로 고단한 인생이다. 예로부터 고단한 인생을 이렇게 표현해왔다.

구약성서 욥 14, 1 : "사람의 수명이란 하루살이와 같은데도 괴로움으로만 가득 차 있다."

신약성서 필립 3, 20 : "우리는 죽기까지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의 본 고향은 이 지상이 아니라 천국입니다."

성 아오스딩 : "우리가 주님을 실제로 뵈올 때까지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겪는 번민과 고통은 끝이 없을 것이다."

성모찬송가(salve regina) : 이 세상을 '슬픔의 골짜기, 눈물의 골짜기로 표현'. "슬픔의 골짜기, 눈물의 골짜기에서 에와의 자손이 울며 탄식하나이다."

베토벤 유언장 : "하느님, 이제 번민과 고통의 세상을 벗어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덧붙였다. : "천국에서는 제발 들을 수가 있겠지요."

예수께서도 우리와 꼭 같은 길을 가셨고 때때로 고단한 삶 앞에 탄식하셨다. :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구나...'


2. 원죄와 선악과이야기

좋게 창조된 인생이 왜 이렇게 고통으로 채워져 있는가.

옛날 이스라엘 신학자들도 고달픈 인생살이에 대해 많이 묵상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왜 인생이 이렇게도 고단한가..."

이에 대해 이스라엘의 신학자들은 이렇게 답을 찾았다. : '태초에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창조질서를 세워주셨는데, 언제부턴가 이 창조질서가 깨어져 버렸고 인간본성이 죄로 물들게 되었다.'

"왜 인간본성이 죄로 물들고, 그로 인해 고통이란 운명을 뒤집어쓰게 되었는가..."

이스라엘 신학자들은 그것을 인간의 '높아 질려는 욕심' 때문으로 보았다. : '인간이 흙이라는 처지를 만족하지 못하고 하느님처럼 되고자 했던 욕심, 인간의 그 높아 질려는 욕심 때문에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질서가 깨지고만 것이다.'

인간의 높아 질려는 욕심인 '인간의 이기심', 이것이 원죄의 뿌리다.

고통 속에 있는 인간과 그 원인에 대해 깊이 묵상했던 이스라엘 신학자들은 '선악과이야기'로 그 답을 찾고 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계약’을 맺으시고, '죽지 않음'과 '이 세상에 대한 지배와 다스림', 그리고 ‘낙원’을 약속하셨다. 또한 창조가 잘 유지되도록 '질서'를 마련해 주셨다. 인간은 이 질서 안에서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을 누릴 수 있었다.

근데 하느님께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무엇이나 제 맘대로 다할 수 있게 하지'는 않으셨다. 그것이 선악과로 표현되고 있다. :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먹지 말아라. 그것을 따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 (창 2, 15-17)

선악과... 이것은 사람을 구속하는 멍에가 아니라 사회나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한 기본질서였다. 개인에게는 양심이고 공동체에는 규칙이고 사회에는 법이 선악과인 것이다. 선악과가 있어야 질서가 유지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신학자들은 불행하게도 이 기본질서가 깨어졌고 그로인해 인간본성이 죄로 물들어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되었다고 묵상하고 있다. 그 이야기를 이렇게 꾸몄다.

갑자기 뱀이 나타나서 여자에게 여자 맘대로 다하게 하지는 않으신 하느님께 대해 서운한 마음이 들도록 말꼬리를 얄밉게 바꾸고 있다. "얘, 하느님이 너희더러 이 동산에 있는 나무열매는 하나도 따먹지 말라고 하였다는데 그게 정말이냐? 하나도?" (창세 3, 1)

여자가 뱀에게, "아니야, 하느님께서는 이 동산에 있는 나무열매는 무엇이든지 따먹되, 이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열매만은 따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 (창세 3, 2-3) '따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여자가 덧붙인 이 말속에 모든 것을 맘대로 다하게 하지는 않으신 하느님께 대한 섭섭한 감정이 묻어있다.

뱀은 이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아니야, 절대로 죽지 않아. 그 나무열매를 따먹으면, 너희는 하느님처럼 될 것이야." (창세 3, 5)

'너희는 하느님처럼 될 것이야...' 뱀의 유혹에 인간은 하느님처럼 되고자 했다. 선악과를 따먹고만 것이다. 하느님처럼 된다는 것, 그것은 인간이 하느님의 뜻에 따르지 않고 자기가 하느님처럼, 자기 마음대로 하겠다는 것이다. 내 맘대로, 내 생각대로 다하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아담은 창조질서를 깨버리고 말았다.

이제, 하느님의 추궁이 시작되고 있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아담은 비겁하게도 핑계를 대고 있다. "여자 때문에 그랬심다."

여자도 비겁하게 변명을 대고 있다. "뱀 때문에 그랬심다."

이렇게 해서 핑계와 변명은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인간의 유산이 되었다. 인간은 자기 실수와 부족함을 솔직히 인정하기보다는 자꾸만 변명과 핑계를 대고 감추고 싶어 하게 되었다. 그냥 이것저것 둘러대지 않고 '제가 잘못했습니다.'하면 끝날 것을, 그 말 한마디를 끝까지 못하는 게 우리 인간의 가련한 운명이 되었다. 높은 사람이건, 낮은 사람이건, 체면과 자존심, 부끄러움 때문에 오늘도 우리는 핑곗거리와 변명거리를 찾는 비겁한 신세가 되었다.

이제 징벌이 차례로 내려지고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고통이었다. 질서를 파괴한 인간성, 죄로 물든 인간성 위에 고통이 선고되고 있다.

아담에게는 노동의 고통이 선고되고 있다. : "너는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살리라." 그래서 먹고살기가 그렇게도 어려운 것이다. 여자에게는 혹독한 출산의 고통이 선고되고 있다. "너는 죽도록 고생하지 않고는 출산하지 못하리라." 그래서 아이 낳기가 그렇게도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가장 큰 고통인 죽음이 선고되고 있다. : "너희는 흙에서 난 몸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너희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


3. 원죄론

인간이 피조물인 처지를 무시하고 하느님처럼 되고자했던 열망, 높아 질려는 그 '가련한 열망'이 인간성을 죄로 물들게 했고 결국은 고통이라는 운명을 가져오게 했던 것이다.

아담이 지은 죄... 이기적인 본성이 인간성을 손상시키고 죄와 고통을 가져오게 하였으니,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을 신학자들은 '원죄'로 규정하였다.

이스라엘 신학자들은 아담이 지은 죄가 모든 인간에게 유전된다고 밝히면서, 이 유전은 생물학적 유전이라고 규정했다. 이렇게 해서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믿게 되었다.

교부들은 이 원죄론을 더욱 발전시켜, 아담보다 아담을 꼬신 하와를 범인으로 지목해 여자를 더욱 지독하게 몰아붙였다. 그리하여 초대교회 때부터 여자는 아주 나쁘게 해석되었다. 여자 때문에 세상에 고통과 죽음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해석함으로써, 교회 내에서 여성차별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이용하였다. 창세기 3,16의 여자에 대한 하느님의 처벌, "너는 남편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겠지만 도리어 남편의 손아귀에 들리라." 이런 구절 때문에 교회 안에서도 여자는 두고두고 손해를 보고 불평등한 대접을 받아야 했다.

신학자 떼르뚤리아노(220년 사망)의 말 : "여자여, 너는 지옥의 문이로다. 너는 악마에게 문을 열어주는 자이니, 너는 나무의 봉인을 깨뜨리고 하느님의 법을 저버렸고, 악마에게 가까이 갈 능력이 없는 순진한 남자마저 유혹하였도다."

신학자 요한 크리소스토모(407년 사망)의 말 : "온갖 야수들 가운데 여자보다 더 해로운 것은 찾아 볼 수 없다." "성행위는 원죄를 계속 유전시키는 범죄행위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독신으로 살면 자손번식이 중단되고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질 것인데, 사람들이 자제를 몬해서 자꾸 결혼하기 때문에 계속 죄로 물든 인간이 태어나고, 재림이 지연되고 있다"고 한탄하였다.

6C에 프랑스에서 열린 갈리아 시노드는 '여자가 과연 인간인가, 여자에게도 영혼이 있는가'하는 문제가 주제였다. 논쟁 끝에 표결에 붙였는데 단 한 표차이로 여자도 영혼이 있는 인간으로 가결되었다.

마침내 529년 오랑쥐 공의회는 이러한 가르침을 토대로 가톨릭 원죄론을 교의로 선포하고 있다.

첫째, 아담의 범죄 때문에 죄와 고통이 세상에 들어왔다.

둘째, 아담의 범죄는 모든 인간에게 유전된다.

셋째, 그렇기에 구원받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은총이 절대로 필요하다.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도 고통이 죄에 대한 벌로 주어진 것이며, 의인을 위한 약이라 가르쳤다. 이러한 가르침이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이 되어서 오늘도 교리를 가르치는 신부들과 수녀들은 원죄와 고통문제를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현대신학자들은 이 원죄론이 다음 두 가지 점에서 잘못되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첫째, 고통이 아담이 범죄한 벌로 주어진 것이라면, 고통은 하느님이 주신 것이 된다. 과연 고통은 하느님이 주신 것인가.

둘째, 아담의 죄가 생물학적으로 유전되는 것은 아니다. 죄라는 유전인자는 없기때문이다.

오늘날 신학자들은 고통문제를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인간의 고통과 불행한 현실은 ‘인간 스스로의 잘못에 근거한 것’이다. 인간 스스로 하느님과의 친교관계를 거부함으로써 모든 질서가 뒤틀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고통의 원인은 다음 두 가지다.

첫째, 악의 세력이다. 이 세상에 악의 세력이 존재한다. 뱀으로 상징되는 악의세력, 분명하게 파악되지는 않지만, 세상에는 악의 세력이 존재한다. 이 악의 세력이 늘 인간을 유혹하고, 인간에게 피하기 어려운 고통을 주는 것이다.

둘째, 아담의 죄가 유전되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기적인 인간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인간의 이기심, '나를 먼저 생각하는 본성'으로 인해 인간은 다른 사람과, 또 하느님과 단절되는 고통을 겪는다.

옛날에는 죄로 물든 인간성과 고통이 인간이 지은 죄에 대한 하느님의 처벌의 결과인 것으로 해석했지만,

오늘날은 악의 세력과 인간 스스로의 이기심으로 인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4. 죄로 물든 인간성과 기쁜 소식

우리의 인생이란 늘 고통과 시련의 연속인 것 같다. 너나할 것 없이 잘 낫거나 못 낫거나, 많이 배웠거나 못 배웠거나, 많이 가졌거나 못 가졌거나, 다들 이런저런 고통 속에 사는 우리 인생인 것 같다.

우리는 숙명적으로 '죄로 물든 인간성'을 가지고 살아간다.

나약한 인간성... 20세기 가장 뛰어난 신학자 칼 라너 신부의 표현대로 ‘비겁하고 비참하고 원시적인 인간성’이 인간의 운명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는 너나할 것 없이 무거운 짐을 지고 죽기까지 허덕거리면서 사는 인생이다. 그러기에 굳건하지 못하다. 막부시대를 연 일본의 쇼군 도꾸가와 이에야스 : '인생이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 감정의 변화가 심하고, 불안하고, 처음의 결심도 퇴색되고, 욕심과 집착을 버리기도, 자존심을 버리기도 지독하게 어렵다. 그렇기에 우리의 인생행로는 늘 흔들리고 고통을 피할 수가 없는 것 같다.

예수께서 인간의 근본적인 허무함을 이겨내게 해주셨다. 세상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주님께서 이겨내게 해주신 것이다. 그리고 진정으로 행복하게 사는 길을 보여주셨다.

사람들은 저마다 행복을 찾아 이리저리 바쁘게 산다. 다들 많이 알고... 또 잘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또 많은 사람들은 그저 이기적인 마음 가는대로 아무렇게나 산다. 그냥 자기 욕심만 채우면서... 자기만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고, 참된 행복을 찾지도 않고 부초처럼 왔다리 갔다리 살다가... 어느 날 죽음 앞에서야 인생의 허무함을 깨닫는 사람들이 참 많다.

예수께서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보여주셨다.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보여주셨다.

나아가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있는 세상... 그 소식을 주님께서 알려주신 것이다. 사람들은 그 소식을 듣고 기뻤다. 너무나 기쁘고 기뻤던 나머지 사람들은 그 소식을 기쁜 소식, 복음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제3강 구원과 구약이야기


1. 인간과 구원

교회는 신약 시대에 예수님에 의해서 갑작스럽게 생겨난 것이 아니다.

교회는 예수님에 의해 창립되어 세상에 드러나게 되지만,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은 이스라엘이라는 토양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을 그 뿌리로 하고 있으니, 결국 교회에 대한 탐구는 구약에까지 소급될 수밖에 없다.

교회는 이미 창세기에 주어진 하느님의 약속이 구원역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기나긴 여정 안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창세 12, 2-3)

모든 종교는 인간의 救援을 목표로 한다.

구원은 세상의 모든 죄와 고통에서 해방되어 하느님과 영원히 일치하는 것이라 할수있다.

세상에 죄와 고통이 많다. 죄와 고통의 원인은 무엇인가?

불교는 그 원인을 '욕심과 집착'으로 보고 있고, 가톨릭은 '이기심'으로 보고 있다.

종교는 이러한 고통과 죄에서 인간을 해방시켜 구원하는 것이다.

가톨릭은 모든 인간이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보고 있다. 원죄의 본 뜻은 '이기적인 본성'이다. 불행하게도 인간의 본성이 이기심으로 물들었고, 이기심이 인간의 운명이다.

가정에서 부부사이에도 이기심 때문에 고통이 생겨난다. 남편이 이기적이면 아내가 힘들고, 아내가 이기적이면 남편이 힘들다. 사회에서도 이기심 때문에 뇌물을 갖다 주고, 학교에서도 이기심 때문에 촌지를 갖다 준다. 운전할 때... 이기심 때문에 화를 내고 욕을 한다.

인간의 이기심, 고통속에 있는 인간... 하느님은 인간의 처지를 가련히 보셨다. 인간을 죄와 고통 속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해방시키고자 하신 것이다.

하느님의 구원은 인간 역사 안에서 오래전부터 이루어져 왔다. 그것을 '구원역사'라 한다.

하느님의 구원역사는 두 단계가 있었다.

첫째 단계 : 이스라엘백성을 선택해서 이루신 구원역사

둘째 단계 : 구세주께서 직접 이루신 구원역사

하느님의 구원역사 안에는 구원을 이루는 핵심이 들어 있었다. 그것이 계약이었다.

첫째 단계 : 이스라엘백성과 맺으신 계약을 오래된 계약이라고 해서 '구약'이라고 했다: 아담과의 계약, 아브라함과의 계약, 시나이계약.

둘째 단계 : 구세주께서 직접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주신 계약을 새로운 계약이라고 해서 '신약'으로 불렀다.

2. 구약

1) Adam과의 계약

아담이야기는 실제역사가 아닌 설화이야기다.

하느님의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계약을 맺으시고, '죽지 않음'과 '이 세상에 대한 지배와 다스림', 그리고 '낙원'을 약속하셨다. 또한 창조가 잘 유지되도록 '선악과'라는 질서를 마련해 주셨다. 하지만 인간은 창조질서를 깨뜨려버리고 말았다. 선악과는 인간이 지켜야 하는 양심, 도덕, 질서, 법을 말한다. 그걸 깨버린 것이다. '선악과 이야기'는 인간이 한평생동안 겪어야하는 고통의 원인에 대한 당시 이스라엘 신학자들의 신앙적인 표현이었다.

2) Abraham과의 계약

아브라함부터 실제 역사가 시작된다.

BC1750년경, 하느님은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고 '하느님은 이스라엘민족의 하느님이 되고,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땅과 자손의 번성'이라는 축복을 내리시리라'고 약속하고 있다. 단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충실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창세 17, 4-8)

아브라함은 하느님과의 계약에 충실하려고 노력했고, 이렇게 해서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은 이스라엘의 시조가 되었다. 아브라함의 계약은 훗날 시나이 계약으로 확대되고 있다.

3) 시나이 계약

시나이계약은 구약 가운데 중심계약이다.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민족은 시나이 반도 남부에 있는 시나이산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고 하느님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계약의 내용은 두 가지다. : '첫째, 하느님은 이스라엘백성의 하느님이 된다. 둘째,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백성이 된다.'

계약의 결과로 십계명과 율법이 주어졌다. 십계명과 율법은 삶의 근본지침이었다.

3. 구약드라마

인류구원 대장정의 출발은 BC 1750년 경 아브라함이라는 한 인물에서부터였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아브라함이 응답하면서 실제 구원역사가 시작되었다.

사실 하느님의 인류구원 손길은 그보다 훨씬 더 깊고 신비하겠지만... 인간이 알 수 있는 구체적인 방식이 아브라함이라는 한 인물에서 시작된 구원의 역사다.

아브라함은 양을 치던 유목민이었고 훗날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 되었다.

하느님말씀 : "너는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리라... 나는 너와 네 후손의 하느님이 될 것이고, 가나안 온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준다..." (창세 17, 4-8)

"아브라함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이를 갸륵하게 여기셨다." (창세 15, 6)

이렇게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셨고 아브라함일가는 가나안 지역에 자리를 잡았다. 아브라함일가에게 요청되는 응답은 오직 하나였다 : '하느님께 전적으로 충실해야 한다.'

아브라함 손자인 야곱 때 가나안 지역에 혹심한 기근이 들었다.

아브라함일가는 기근을 피해 이집트로 이주하게 되었고, 거기에서 200여년 이상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BC 1550여년 경 이집트 황제였던 파라오는 강력한 이집트 부흥정책을 펴면서 이 민족들을 추방하게 된다. 아브라함일가는 다행히 추방은 면했지만 결국 노예로 전락했고 서서히 말살되는 운명에 처해졌다. 파라오는 아브라함일가의 사내들을 모조리 거대한 토목공사에 징발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일가의 식구는 계속 불어나게 되었고... 위협을 느낀 파라오는 급기야 아브라함일가의 사내아이들을 모두 죽이라는 명을 내렸다.

파라오의 명은 가혹했고... 아브라함집안 곳곳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아브라함 집안의 피맺힌 통곡소리가 마침내 하느님께 닿았다.

'십계'라는 영화가 모세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BC 1250년경, 하느님은 불세출의 지도자 모세를 파견하셨다.

모세는 황제 파라오와 치열한 대결을 펼쳤고 끝내는 아브라함일가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홍해에 도달하였다. 이제 홍해만 건너면 이집트의 추격을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분을 삭이지 못한 파라오는 전차부대를 풀어 아브라함일가를 뒤쫓았다.

앞에는 홍해바다, 뒤에는 막강한 이집트의 전차부대... 그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아브라함일가는 무사히 홍해를 건넜고, 추격하던 이집트의 전차부대는 바다에 빠져 전멸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훗날 이스라엘 민족에게 뼛속 깊이 새겨졌고 자손 대대로 결코 잊을 수 없는 민족의식을 심어주었다. :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해주셨다!!'

이 민족의식이 오늘날까지 유대인들의 자부심이 되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은 지금도 집안 후손대대로 이 민족의식을 가르치고 있다. 유대인이 따로 유대인이 아닌 것 같다.

이집트로부터 해방된 아브라함일가는 벅찬 감동에 겨워 찬미의 노래를 불렀다.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지없이 높으신 분,
기마와 기병을 바다에 쳐넣으셨도다...
주님은 용사, 그 이름 주님이시다.
파라오의 병거와 군대를 바다에 쳐 넣으시니
빼어난 장교들이 갈대바다에 빠졌도다.
바다가 덮치니 깊은 물 속에 돌처럼 잠기더라." (탈출 15, 1-5)

홍해를 건넜지만 가나안까지는 광야의 연속이었다.

광야에서의 진군은 혹독한 악조건이었다. 이 여정은 숱한 역경과 고난으로 가득 찼던 가시밭길이었다. 광야에서는 물과 음식이 귀했다. 더위와 땡볕, 사막이라는 악조건, 또한 곳곳의 사나운 유목민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한 노예들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늘 상 투덜댔습니다. 그들은 불평분자들이었고, 왕짜증들이었다. :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가 안 계신가?" (탈출 17, 7)

빗발치는 백성들의 불평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의지'를 지녔던 모세의 인도로 백성들은 끝내 시나이산의 오아시스에 도착했다.

시나이산에서 하느님은 모세와 계약을 체결하셨다. :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되고,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백성이 된다."

이 계약이 이스라엘백성의 중심인 '구약'이 되었고, 계약의 표로 모세는 십계명과 율법을 받았다. 십계명과 율법은 이스라엘백성 삶의 근본지침이었다.

백성들은 일제히 응답하였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모두 그대로 실천 하겠습니다." (탈출 19, 8)

이스라엘백성으로 거듭난 아브라함일가는 진군을 계속하였다.

네보산에서 모세가 세상을 떠나자 그 후계자인 여호수아가 백성을 인도하였고... 예리코성 함락을 시작으로 가나안지방에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 민족을 몰아내면서 가나안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좁은 땅 가나안을 두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두 민족이 죽기 살기로 벌이는 전쟁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두 민족의 숙명이 되었다.

BC 1200여년부터 200여 년 동안 계속된 팔레스타인과의 치열한 정복전쟁을, 삼손을 비롯한 뛰어난 판관들이 이끌었다.

그 후 이스라엘에도 왕이 생겼다. 첫 번째 왕이었던 사울(BC 1020-1000 재위)의 뒤를 이어 다윗 왕(BC 1000-961 재위) 때 마침내 정복전쟁을 끝내게 되었고 이스라엘은 안정되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BC 961-922 재위)은 처음으로 석조성전을 지어 하느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다윗은 팔레스타인 장군 골리앗을 쓰러트렸고, 솔로몬은 지혜로웠지만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였다. 다윗과 솔로몬 재위시기가 이스라엘의 최전성기였다.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라졌고 점차 쇠퇴의 길을 갔다...

놀랍게도 안정을 찾자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하느님을 멀리하였다. 배가 부르면 등이 따신지... 점점 더 이스라엘의 왕과 권력자들은 하느님을 무시하고 백성을 착취하였다.

이에 대해 BC 750여년 경부터 이사야와 같은 예언자들이 나타나 하느님말씀에 귀 기울이고 약자들을 보호하라고 수없이 경고하였지만, 권력자들은 오히려 예언자들을 박해하였고... 압제의 기간은 길었다.

권력자들은 하느님말씀을 무시하였고, 힘없는 사람들은 피눈물을 흘려야했다. 이스라엘 곳곳에서 고아와 과부, 외국인노동자와 같은 약자들의 한숨과 통곡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하느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배반은 바알과 같은 여러 잡신들을 숭배하면서 절정에 닿았다.

끝내 야훼 하느님의 진노가 땅에 닿았다.

BC 722년 먼저 북왕국이 앗시리아제국에 의해 멸망하고 만다.

BC 587년 남왕국마저 바빌론제국에 멸망하고 이스라엘은 그야말로 초토화되었다.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은 줄줄이 엮여 바빌론까지 포로로 끌려가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

야훼 하느님을 배반한 이스라엘의 댓가는 참혹했다.

나라가 멸망했고 구약인 시나이계약이 파기되었다...

BC 587년 멸망이후 살아남은 사람들은 1948년 독립할 때까지 2500년을 나라 없는 떠돌이신세로 지내야했던 비참한 운명이 되었다. 그 기간 동안 수없는 불행을 겪어야 했다. 2차 대전 중에는 600만명이 학살되는 비운처럼...

4. 신약과 교회

이렇게 파기된 구약 위에 인류전체를 위한 '새로운 계약'이 주어지고 있다.

BC 605년 예레미아는 이스라엘의 실패 위로 새 계약을 선포하고 있다:

"이날에 이르기까지 나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 23년을 하루같이 전했지만 너희는 듣지 않았다. 주님께서는 예언자들을 거듭거듭 보내셨지만 너희는 역시 듣지 않았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의 말을 듣지 않았기에, 나는 바빌론 왕을 시켜 너희를 멸하리라." (예레 25, 3-9)

"장차 때가오면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새로운 계약을 맺으리라. 이 새 계약은 이스라엘 조상들을 이집트에서 데려 내 오던 때 맺은 것과는 다르다. 나는 그들을 내 백성으로 삼았지만 그들은 나와 맺은 계약을 깨뜨리고 말았다.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맺을 새 계약이란 그들 마음에 새겨줄 내 법을 말한다. 그 마음에 내법을 새겨주어,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예레 31, 31-34)

이 새로운 계약, 바로 그것이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주신 계약인 '신약'이었고... 그 결과로 세상에 드러난 것이 바로 '가톨릭교회'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구세주로 세상에 오셨다.

그리고 예수님의 구원역사가 시작되었다.


 

제4강 신약과 교회창립


1. 예수님과 구원가르침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다. 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부른다. 고통 속에 있는 인간을 구원하시는 예수님...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계명과 율법'을 잘 지켜야한다고 생각했다. 계명 중의 으뜸이 십계명이고, 율법은 십계명의 세부시행지침이었다. 이렇게 이스라엘사람들은 십계명과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이 구원받는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은 계명과 율법의 형식에 얽매여서 형식주의, 율법주의에 빠졌던 것이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그들이다. 그리하여 계명과 율법이 구원을 받는 길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을 옭아매는 구속하고 삶을 힘들게 하는 멍에가 되었던 것이다.

근데 구세주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은 달랐다. :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계명과 율법을 잘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더 근본적인 것이 두 가지다. 첫 번째가 서로 사랑하는 것, 두 번째가 서로 용서하는 것이다...' 예수님 말씀... '나는 너희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서로 용서하여라...'

사랑은 '남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사랑의 반대가 이기심, 이기심은 '나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사랑은 남을 먼저 이해해줄 줄 알고, 남의 말을 들어줄 줄 알고, 남의 입장을 헤아려줄 줄 알고... 마침내 남을 위해 목숨까지 내어 놓을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예수께서 당신자신을 다 내어주시고 마지막에는 당신 목숨까지 내어주신 것이다.

용서는 '마음의 보약'이다.

사람은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서로 상처를 주고받게 된다. 생각 없이 던진 말과 거친 행동으로 가슴에 상처를 준다. 말로 남을 죽인다고 한다. 그것이 마음에 쌓여 병이 되고 한이 된다. 미움과 섭섭함이 쌓이고, 증오심과 복수심이 마음을 병들게 한다.

'죽어도 용서 못해'하면서 독을 품고 사는 사람이 있다. 독을 품고 하느님 앞에 갈 수는 없지 않겠나. 마음의 응어리를 털어 버려야 하겠다. 마음의 한을 털어 버리는 것이 용서다. 그럴 때 진정으로 마음이 후련해지고 치유가 되는 것이다. 용서는 우리 마음을 치유해주는 가장 좋은 보약이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구원의 핵심은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이다. 계명을 철저히 지키고 미사에 철저하고 기도에 철저한 것보다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예수님은 율법주의와 형식주의를 넘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근본적인 사랑을 가르쳤다. 그러기 위해서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이 서로 용서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 병자들, 죄인들을 진정으로 사랑했다.

삶의 희망을 잃고 절망하는 사람에게 용기를 주고, 죄인들을 용서해주었으며, 병자를 고쳐주고, 죽은 사람 살려주고, 없는 사람, 있는 사람들꺼 얻어다가 나누어주었다. 이러한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그 가르침에 따라 살면 이 세상에서 복되고 마침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가르침의 핵심이었다. 그 가르침을 사람들은 기쁜 소식, 복음이라고 불렀다.

2. 교회창립

3년여 동안, 예수님은 곳곳에서 복음을 선포했고 점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생겼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 모았고, 특히 열둘을 뽑아 특별한 사명을 맡기기 시작했다. 12제자는 사도로 불리었다.

예수님은 사도들 가운데 수제자였던 베드로를 중심으로 교회를 세웠고,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이 교회를 계승하면서 세상구원을 위해 봉사하도록 사명을 맡겼다.

이렇게 해서 형성된 하느님을 믿는 백성이 바로 '가톨릭교회'였고,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라는 뜻으로 '그리스도교(基督敎)'라고 부르게 되었다.

교회창립의 과정

예수님은 제자들을 모아놓고 '교회창립식'을 가지시지는 않았다.

당시 예수님은 여러 가지 과정을 거치면서 교회를 창립하셨다.

1) 12제자의 부르심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고 특히 12을 뽑아 사도로 삼으셨다. : "예수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고 이름하셨다...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마르 3, 14-15). 이렇게 제자들을 부르신 것은 근본적으로 가톨릭교회의 설립하려는 기초가 되었다.

예수께서는 12사도를 단순히 부르신 것이 아니었다. 12사도를 특별히 가르치셨고, 훈련시키셨다. 그리고 그들을 파견하셔서 하느님말씀도 전하게 하시고 마귀도 쫓아내게 하시면서 점점 더 단련시키셨다.

2) 선교실습

예수께서는 종종 선교활동에 파견하셨다. 선교실습이었다. :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환자들을 깨끗하게 해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마태 10, 5)

사도들은 돌아와서 예수님께 선교활동결과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마르 6, 30 :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마태 17, 19 : "어찌하여 저희는 그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제자들은 이런 실습을 통해 점점 선교정신과 실제를 배워갔다.

3) 최후의 만찬과 성체성사제정

최후의 만찬은 하느님과 인간의 새로운 계약인 신약이 체결되는 순간이었다.

예수님은 당신이 떠나가신 후에 제자들이 어떻게 활동해야 할지 그 활동지침을 주시고 있다. 최후의 만찬은 훗날 교회활동의 지침이었다.

예수님은 서기 30년 4월 6일 목요일 저녁에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드시고, 다음날인 4월 7일 금요일 오후에 예루살렘 북문 밖 골고타에서 처형되셨다.

최후의 만찬을 하시기 직전에 예수께서는 먼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다.(요한 13장) 본래 이런 일은 종의 일이었다. 종은 주인이 들어오면 발을 씻어주고 닦아주었다.

근데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발을 씻어주시고자 하셨다. "베드로야 양말을 벗어라..."

스승이신 예수께서 발을 씻어주신다니... 베드로가 딱 막아서고 있다. '주님께서 제 발을 씻어주시다니요, 안됩니다.' 베드로는 발이 좀 더러웠던 것 같다. '그러면 너와 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된다.' '주님, 그라만 발뿐만 아니라 아예 등도 밀어 주이소.' '목욕을 한 사람은 온 몸이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된다...'

최후의 만찬 중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유언과도 같은 말씀을 한다.

원래 식사를 하면서 중요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 법이다.

먼저 제자들이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 삶을 살 것을 명한다. "내가 너희에게 발을 씻어준 것은 너희도 하라고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 15)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것'이 예수님의 의도였다.

과연 주님을 따르는 우리들이 주님의도대로 살고 있는지를 생각한다. 특히 주님의 사명을 받은 성직자들이 섬기는 삶을 살고 있는지 늘 반성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베드로에게 공동체의 책임을 맡으라는 당부를 하고 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처럼 체질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 (루카 22, 31-32)

베드로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반할 것'이라는 말씀에 섭섭했다. 그래서 "주님, 와이카십니까... 저는 주님과 함께라면 감옥에라도 가겠습니다."고하자, "베드로야, 내 말을 잘 들어라.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루카 22, 33-34) "주님... 저를 물로 보십니까... 저는 주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주님을 모른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마태 26, 35)

예수께서는 우직했던 베드로를 교회의 최고 책임자로 임명하시고 있다. 훗날 베드로는 1대 교황님이 되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새계명을 주셨다. :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 34) 그리고 참포도나무비유를 들어 예수께서 아버지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듯이 제자들도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을 당부하면서 서로 사랑할 것을 다시 강조하고 있다. :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7)

또 성령을 약속해 주셨다. :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요한 14, 16)

또한 평화를 주셨다. :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요한 14, 27)

또 제자들에게 온갖 고난 속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용기를 주셨다. :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 33)

그리고 성체성사를 제정하시고 거듭 거행하기를 명하셨다.

놀랍게도 예수께서는 빵을 들어 감사기도를 바치시면서 전대미문의 말씀을 하셨다. : '받아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마르 14, 22) '내 몸'은 나의 육신만이 아니라 나의 전부, 곧, 나 자신을 의미한다.

포도주를 나누어 주시면서도, '이것은 나의 피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마르 14, 24) 여기서도 '내피'는 몸속의 피만이 아니라 '나의 전부'를 뜻한다.

예수께서는 자신 전부를 바쳐 하느님과 온 인류 사이에 '새로운 계약'(新約, 1고린 11, 25)을 맺어주고자 하였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새로운 계약', 신약(新約, 1고린 11, 25 ; 루카 22, 20)을 체결하고 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최후의 만찬을 거듭 행하라고 당부하신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루카 22, 19)

마침내 식사를 마치시고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게쎄마니 동산으로 올라가셔서 마지막 길을 가신 것이다. : "가자, 때가 왔다."

4) 제자들의 파견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견하셨다. 세상에서 교회를 거듭 일으키고 구원의 봉사가 되게 하라시는 명이었다. :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 28, 19-20)

5) 교회창립말씀

마침내 마태 16,18이하는 '예수님의 교회창립에 대한 직접적인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

"너는 베드로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 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요한 20, 23 또한 결정적이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베드로를 교회의 반석으로 하고, 그에게 교회 열쇠를 맡겨 '맺고 푸는' 권능을 위탁하는 말씀이, 가장 직접적인 교회 창립 말씀과 의지가 분명하다. 물론 예수께서 역사적으로 어느 정도까지 명확하게 교회의 창립을 알고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어디까지 교회의 형성과 구조와 조직을 생각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베드로에게 '받아 적어라 베드로야... 나중에 한국이라는 나라에도 교회를 세워라. 나중에 평화방송도 설립하고 전광진신부를 강사로 초대하거라...' 그런 것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명백한 것은 예수께서 베드로위에 구원의 공동체인 교회를 구축하고자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은 교회에 '가장 기초적인 구조'를 주셨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초석으로 하고, 열쇠를 손에 넣은 자로서 세우고, 맺고 푸는 특별한 권능을 준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예수님은 교회에 가장 기본적인, '아직 발전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인 구조를 주신 것이다.

이렇게 해서 베드로에게 주어진 기본적인 지위는 두 가지였다.

첫째, '사도단의 으뜸'(루가 22, 31)

둘째, '전체교회의 으뜸'(요한 21, 15이하)

이러한 모든 기본적인 배려 외에도 당신께서 늘 함께 해주시겠다고 약속해주셨다.

그래도 미덥지 않으셨던지 또 성령을 약속해주셨고, 성령으로 주도될 교회의 역사에 모든 것을 맡겼던 것이다.

바로 이렇게 해서 사도들이 활동하던 첫 세대의 역사 안에 교회의 기초가 되는 근본 초석이 구체화되고 확정되었다. 그리고 이 근본 초석은 뒤이어 전개되는 교회의 시대에 '근본적이며 규범적인 것'으로 존속하게 되는 것이다.

 

 

제5강 선교의 힘, 평화



1. 로마제국을 선교시켰던 '평화'

 

가톨릭은 유대교에서 갈라져 나온 신흥종교였다.

너무나 미미하고 보잘것없던 신흥종교... 작은 무리였던 가톨릭이 로마제국 전체로 퍼져서 로마제국을 개종시킨 것은 결코 쉽게 된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그 핵심이 무엇이었을까...

그 첫 번째는 놀랍게도 '평화'였다. 초대교회 신자들이 서로 평화롭게 살았던 때문이었다. 서로 안싸우고... 평화가 로마제국을 개종시킨 것이다.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제자들은 예수님 생전에는 예수님이 정말로 누구신지 잘 몰랐다.

그저 예수께서 왕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헤로데를 물리치고, 또 로마제국마저 물리치고 새로운 왕국을 세워서 왕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수님이 왕만 되면 제자들은 팔자 고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모와 처자를 떠나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오만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더운 땡볕에 다리가 아파도 쉬지도 못하고 다녀야했고, 배가 고파 사흘씩 굶기도 했다. 마땅히 잘 곳이 없어서 나무 밑에서 잔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고, 사람들에게 쫒겨 나서 도망을 다닌 적도 많았다. 그 모든 고생을 하더라도 예수께서 왕만 되면 모든 고생이 끝나고 높은 자리 하나 얻어서 평생을 호강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평소에도 제자들은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다투기도 했고, 제자들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미리 청탁을 하기도 했다. '예수님, 왕이 되시면 우리아들 하나는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주이소...'

그렇게 기다려 왔는데, 웬걸, 예수께서 로마 군인들에게 맥없이 붙잡혀서 끌려가는 것을 보고 제자들은 크게 낙담하고 당황하기 시작했다. 속으로 '이기 아닌데, 이라만 안되는데...' 하면서 발버둥을 쳤지만, 예수께서 잡혀서 헤로데의 관저로 끌려가 두들겨 맞는 것을 보고는, 모든 게 허사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제자들은 군중 속에 숨어서 불안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혹시라도 예수님과 한패라고 붙잡히면 같이 맞아죽겠지 싶어서 제자들은 비겁하게도 하나둘씩 스승을 버리고 도망쳐버리고 만다. 그것도 예루살렘에서 150km나 떨어진 갈릴래아까지 비호같이 달아나버렸다.

그나마 수제자인 베드로만 사람들 틈에 몰래 남아서 숨을 죽이고 보고 있었다.

안그래도 불안하게 보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아줌마가 베드로를 툭치면서 '당신도 저 사람과 한패지요?'하고 물었다. 화들짝 놀란 베드로는 딱 잡아떼고 있다. '아니오, 사람을 잘 못 봤소. 나는 저 사람이 누군지 모르오.' 이 아줌마가 다른 곳으로 가면 좋겠는데, 베드로 주변에서 계속 어른대다가 두 번째로 '아냐. 당신 맞아. 안면이 있는데.' 재차 따지자, 베드로는 괜히 더 큰소리로 '이 양반아, 나는 저 이 누군지 모른다 안카나.' 쪼끔 있다가 또다시 '당신 분명 맞아, 내가 지난번에 봤어.' 세 번째로 다그치니까, 베드로는 '이 양반이 사람 잡네...'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잡아뗀 베드로는 그 질로 스승을 버리고 도망가 버리고 말았다. 스승이 붙잡혀서 두들겨 맞고 있는데도, 제자들은 저만 살겠다고 다들 비겁하게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

이제 예수님은 혼자가 되었다.

예수님은 헤로데 궁전에서 밤새도록 두들겨 맞으면서 심문을 받았다. 종교재판이었다. 유대율법에는 하느님을 모독하는 자는 사형이었다. 예수님은 스스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했으니 사형이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로마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사람을 사형에 처할 권한이 없었다. 그래서 유대 권력자들은 로마총독에게 고발하여 사람을 처벌하였다. 하지만 이스라엘 율법을 어기는 것은 로마제국에 직접적으로 도전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로마총독도 때때로 애매할 때가 많았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어떡하든 큰 죄를 덮어씌워서 예수님을 반드시 죽이고자 했다. 당시에 가장 큰 죄는 반역죄였다.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 이 사람이 자기가 왕이라칸다'고 고발했던 것이다.

날이 새자 로마총독 빌라도의 출근시간에 맞추어 예수님은 빌라도관저로 끌려왔다.

이제는 정치재판을 받아야 했다. 드디어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 앞에 나왔다.

근데 빌라도가 한눈에 봐도 그 말이 맞지 않았다. 왕이 된다는 사람이 너무나 행색이 초라하고, 군대도 없고, 아무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총독 빌라도가 보기에 예수님은 너무나 초라했다. 로마제국 귀족가문에서 태어나 최고의 교육을 받았고, 크게 출세해서 식민지 이스라엘의 총독으로 파견된 빌라도가 보기에 예수님은 참으로 하찮은 존재였다.

당시 로마제국은 많은 식민지를 다스리고 있었다. 강대국이었던 이집트를 비롯해서, 시리아, 그리스 등등. 그 식민지 중에서도 이스라엘은 아주 작은 식민지였다. 이 쪼끄마한 식민지에서, 그것도 신분이 낮은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잘 배우지도 못했던 촌무지랭이 예수라는 청년이 왕이 된다는 소리가 빌라도가 보기에 정신이 좀 나간 친구이거나 아니면 이스라엘 권력자들이 모함을 하는 것임을 직감하였을 것이다.

빌라도는 저런 하찮은 예수를 심문하는 것이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고발을 했기 때문에 심문을 한다. : '니가 저 사람들 말대로 왕이냐?' 예수님은 놀랄만큼 침착하게 대답한다. '내 왕국은 이 세상이 아니다.' 성질 급한 빌라도가 재차 묻는다. : '아무튼 니가 왕이냐?' 자세를 흐트리지 않고 예수님의 대답이 이어진다. '내가 왕이라고 당신이 말했다. 나는 오직 진리를 증언하러 왔다.' 진리를 증언한다는 예수님의 말이 빌라도에게 가소롭게 들렸다. '지까짓 게 뭐를 안다고...', 이렇게 생각한 빌라도는 속으로 역시 '이 친구가 별로 죄 지은 게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나가는 소리로 예수님께 '진리가 무엇인가'하고 묻고는, 예수님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밖으로 나가서 군중들에게 말한다. '내가 심문해봤는데, 이 친구는 아무 죄도 없다.' 이렇게 되자 유대인들은 악을 쓰고, '예수님을 죽여야 한다'고 소리를 질렀다. : '죽이시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군중들이 흥분하게 되자 귀찮아진 빌라도는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내주고 말았다. 빌라도에게 한 유대청년의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은 골고타로 십자가의 길을 가셨던 것이다.

스승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을 때에 같이 붙잡혀 죽을까봐 멀리 도망친 제자들이었다. 스승이 뺨을 맞고, 발로 채이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데도 살겠다고 도망갔던 비겁한 제자들이었다.

제자들은 골방에 문을 꼭 걸어 잠궈 놓고 숨어있었다. 유대인들에게는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부활개념이 없었기에 스승의 죽음으로 만사가 끝이라고 체념했다. 3년 동안 처자식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것이 허사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하나, 다시 고기를 잡아먹고 살아야하나. 어디서 품이라도 팔아먹고 살아야 할 것인데, 이런저런 걱정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선은 조용히 숨어있어야 했다. 괜히 함부로 밖으로 나 다녔다가는 붙잡혀서 죽을 수 있으니까 우선은 숨어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를 3일째... 갑자기 죽었던 스승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턱 나타나신 것이다. 처음에는 유령인줄 알았다. "유령이다!" 예수께서 손과 발을 보여주셨다. "유령 아이다. 함 봐라." 그제서야 제자들은 스승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부활하신 스승 앞에서 제자들은 너무나 기뻤다. 성서는 '너무나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고 표현하고 있다.

부활은 제자들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켰다. '죽음이 전부가 아니구나, 죽음 뒤에 부활이 있구나...' 그것은 말할 수 없는 놀라움이었고 벅찬 감동이었다. 제자들은 이제 죽음이 두렵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걸어 잠궜던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가 사람들 앞에서 자기들이 겪은 것을 힘차게 증언하기 시작했다.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던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구세주였다. 하느님은 그분을 부활시키시고 우리의 주님이 되게 하셨다. 우리가 그 증인들이다. 예수님을 믿으시오. 예수 믿고 그 가르침대로 살면 현세에서 행복하고 천국에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

부활을 확신한 제자들의 증언으로 조금씩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모습이었다. 초대신자들은 그 수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신자들은 똘똘 뭉쳤고 단결했다. 서로가 서로를 아끼고 극진히 사랑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부활하신 예수님의 첫 번째 말씀대로 신자들은 모두가 평화롭게 살았다. 신자들은 작은 무리였지만 평화가 진정으로 큰 힘이 되었고, 그 힘은 마침내 로마제국을 굴복시킨 엄청난 힘으로 폭발하기 시작했다.

로마제국으로 번지는 가톨릭교회

당시 로마제국은 강대한 군사력과 정치, 웅장한 문화와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 수십 개의 속국을 다스리던 역사상 가장 강대한 국가였다. 그 속국들 중에 유대인은 그야말로 보잘것없는 작은 민족이었다. 이 유대의 시골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라는 청년이 세상의 구세주라는 말이 로마사람들에게는 너무나 가소롭고 우스운 이야기였다.

하지만 제자들의 불굴의 의지와 확고한 증언과 함께 신자들이 서로 똘똘 뭉쳤던 초대교회는 점점 로마제국 전체로 번지기 시작했다. 처음에 황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책임자와 주요 신자 몇몇만 잡아 죽이면 끝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렇게 해서 박해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박해는 더욱 신자들을 단결시켰고 강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더욱 혹독한 박해가 300년 동안 계속되었다.

로마에 콜로세움이라는 경기장이 있다. 돌로 지어진 이 경기장은 당시에 5만 명이 들어가는 엄청난 규모였다. 프로야구나 축구경기가 없던 당시 로마사람들은 콜로세움에서 검투사들끼리의 결투를 즐겼고, 검투사와 사자와의 싸움을 즐겼다. 또한 가톨릭신자들을 붙잡아다 굶주린 사자에게 먹이로 주면서 처형했다. 콜로세움...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했던 피맺힌 곳이다. 하지만 신자들은 굴하지 않고 더욱 굳건한 신앙으로 뭉쳤고, 300년 뒤에는 마침내 황제까지 세례를 받고 가톨릭을 로마제국의 국교로 선포하게 되었던 것이다.

로마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평화

강대했던 로마제국... 정치, 군사, 경제, 문화, 종교 등 모든 것이 안정되어 무어하나 아쉬울 것이 없던 로마제국사람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한 것은 그냥 쉽게 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초대교회 신자들이 오직 주님부활을 확신하고 평화롭게 살았던 때문이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많이 배운 사람들이 아니었다. 많이 가진 사람들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똘똘 뭉쳤다. 그들 입술에는 언제나 웃음이 넘쳤고 얼굴에는 평화가 흘렀다. 로마제국 사람들은 많이 가지고 많이 배웠으면서도 서로 싸우고 욕하면서 살았지만, 신자들은 평화롭게 살았고 죽음 앞에서도 기꺼이 목숨을 내 놓을 수 있었다. 바로 이런 모습들이 로마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사람들은 신자들의 모습을 보고 놀랐다. '무엇이 저들을 저렇게 살 수 있게 하는가...'

신자들은 부활을 확신하고 서로 평화롭게 살았다. 이것이 로마사람들에게 벅찬 감동을 주었고, 300년 동안 사람들을 하나씩 둘씩 가톨릭으로 개종시켰던 것이다. 평화가 로마사람들의 마음과 혼을 사로잡았던 것이고, 마침내는 로마제국을 녹였던 것이다.

안싸우고... 평화롭게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우리는 왜 그렇게 잘 싸우는지 모르겠다...

 

2. 선교왕 바오로사도

 

로마제국의 선교왕은 사도 바오로였다.

사도 바오로는 지칠 줄 모르게 복음을 전하였고 불꽃같은 인생을 살았다.

사도 바오로의 원래 이름은 사울이었다.

보통의 유대가문에서 태어난 사울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였다. 사울은 율법학자 가믈리엘 문하에 들어가 율법을 익히면서 율법전문가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 즈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사건이 있었고, 이내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사람들이 생겨나면서 유대인들로부터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한창 혈기 왕성할 때였던 사울은 십자가에서 처형된 예수라는 청년이 부활했다는 사실과 구세주라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그런 것은 유대의 율법을 거스르는 일이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 낭설을 퍼뜨리는 자들은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고 박해의 대열에 동참하기 시작하였다. 어느 날 다마스커스에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자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붙들러 가는 길이 바오로의 운명을 바꾸어 놓게 된다.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께서 바오로에게 나타나신 것이다.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너는 장차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사울은 그길로 다마스커스에서 세례를 받고 이름이 바오로로 바뀌어 주님의 사도로 거듭나게 되었던 것이다.

주님의 사도가 된 바오로는 불굴의 의지로 거침없이 복음을 전하다가 마침내 순교하게 된다. 유대지방의 조그만 종교였던 가톨릭은 바오로의 노력으로 로마제국 전체로 퍼지게 되었으니, 바오로는 가톨릭교회에서 베드로와 함께 가장 큰 사도라고 할 수 있다.

바오로는 선교에 가장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1고린 9, 16)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2고린 4, 8-9)

바오로는 어떤 어려움을 겪더라도 결코 굴하지 않는 놀라운 정신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사실 바오로도 한평생 모진 고통을 겪었다.

한평생 바오로는 지병을 앓았고, 선교여행을 다니면서 항상 도적들로부터 죽음의 위협을 겪었고, 사람들의 모욕과 반대를 만났다. 그럴 때마다 바오로는 어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불굴의 신념으로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죽기까지 똑바로 자기 길을 갔다.

어려운 일을 겪는 신자들에게 바오로는 다음과 같은 말로 위로해주고 용기를 주었다. :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로마 8, 35-39)

2002년 1월에 나는 서품 10주년을 기념해서 동기신부들과 터키 그리스 성지순례를 했다.

나는 터키의 안티오키아에서 사도바오로를 생각했다.

안티오키아는 바오로의 주민등록지였고 바오로가 길어 먹었던 곳으로 알려진 '바오로의 우물'이 있는 곳이다. 안티오키아를 거점으로 바오로는 로마제국 전체로 향해갔던 것이다.

터키는 넓은 지역이고 곳곳이 척박한 지역이다.

특히 카파도키아지역은 기기묘묘한 형상의 괴석들과 광야가 끊임없이 펼쳐진 곳이다.

버스로 몇 시간을 달려야 겨우 마을이 보일정도로 끊임없이 펼쳐진 구릉지대가 많다.

그 넓은 지역을 바랑을 메고 샌달을 신고 걸어 다녔을 바오로를 생각했다.

아무도 반겨주는 이 없던 도시를 방문해서 생전 처음 듣는 예수님이야기를 해야 했던 것이 바오로의 운명이었다.

불같은 열정으로 바오로는 터키지역 곳곳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에페소에, 갈라디아에... 골고사이에, 키프로스에...

바오로의 다음 여정은 그리스지역이었다. 필립비에, 데살로니카에... 아테네에, 고린토에...

숱한 죽을 고비를 넘긴 바오로는 기어이 로마로 진출했다.

로마에서 2년여 동안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복음을 전하면서 마지막 불꽃을 태웠던 바오로... 결국 순교로 장렬하게 지상 삶을 마감하였다.

바오로 탄생 2000주년을 맞아 교황님께서는 2008년 6월 28일부터 2009년 6월 29일까지를 ‘바오로의 해’로 선포하시고 우리 모두 바오로의 쇠를 녹일 듯한 열정과 바위를 녹일 듯한 불굴의 의지를 본받아 선교에 힘을 다하자고 권고하셨다.

먼저 우리 스스로가 세상사에 흔들림 없이 굳건해야 하겠다. 그리하여 우리도 세상 마지막에 바오로가 남긴 말씀을 남길 수 있으면 좋겠다. :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2디모 4, 6-7)

마침내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종교자유가 선포되었고, 이어 380년, 가톨릭이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었다. 곳곳에 성당이 들어서고 가톨릭교회는 자리를 잡으면서 유럽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이렇게 해서 전 유럽이 가톨릭이 되었다.

 

 

제6강 정교혼합과 가톨릭교회의 변질 

 

예수께서 설립한 가톨릭교회는 사도들과 초대신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300년 동안의 모진 박해 속에서도 빠르게 로마제국으로 전파되었다.

313년, 마침내 교회는 콘스탄티누스황제에 의해 자유를 얻었고 나아가 국교가 되었다.

자유는 좋은 것이었지만 가톨릭교회를 새로운 패러다임(Paradigme)으로 변화시켰다.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는 정치와 결합되면서 점점 복음의 순수성이 퇴색되어갔다.

그 변질을 '외적인 변질과 내적인 변질'로 살펴본다.

 

1. 교회외적인 변질 : 정치와 종교의 혼합

로마황제들은 가톨릭교회를 극진히 대접하였다. 두 명의 황제가 대표적이다.

콘스탄티누스황제(305-337)는 자기가 살던 라떼란궁전을 교황에게 선물하였다. 그리고 황제는 로마를 떠나 자기 이름을 딴 도시 콘스탄티노플로 이주하여 죽기까지 거기서 살았다. 콘스탄티노플은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요충지로서 당시 경제와 무역이 번창했던 로마보다도 더 역동적인 도시였다. 이후 콘스탄티노플은 동로마제국의 수도가 되었고, 1453년에 오스만터키에 함락되었다. 이슬람세력인 터키사람들은 도시 이름을 이스탄불로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황제로부터 궁전을 선물 받은 교황은 궁전을 성당으로 리모델링하였는데 그것이 라떼란성당이다. 라떼란성당은 1308년까지 교황좌성당이 되었다. 1309년 교황은 성베드로성당으로 교황좌성당을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베드로성당은 313년 종교자유 이후에 베드로사도가 순교한 지역에 건립된 성당인데, 이후로 점점 더 증축되어 1309년에 교황좌성당이 되었다.

황제 테오도시우스(379-395)는 가톨릭을 로마제국의 국교로 정했다. 그리고 주교들에게 지방행정권을 부여해서 지방을 다스리게 했는데,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주교들은 지방의 통치자가 되었고 권력자가 되었다.

바로 이것이 정치와 교회가 혼합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이렇게 되어 가톨릭교회는 정치와 합쳐지면서 외형적으로는 크게 발전하게 되었지만, 순수한 복음정신은 쇠퇴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가톨릭교회는 로마제국의 화려하고 웅장한 제도와 조직을 받아들여 교회의 제도와 조직을 갖추어 나갔다. 이렇게 해서 교회가 마치 국가처럼 운영되기 시작하였다.

로마제국 궁정의 화려한 문장, 금실로 수를 놓은 눈부신 복장, 각종 거창한 의식들이 자연스럽게 교회의 제도나 전례 안에 수용되었다.

성직자들은 점점 말발센 나으리로 받들여지고, 평신도는 기도하기와, 순종하기, 헌금하기에 열심해야 하는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각종 칭호나 격식이 제국식으로 변화되었다. 교황님은 성부성하, 추기경님은 전하, 주교님은 각하, 신부님은 지극히 공경하올 신부님, 수녀님은 경애하올 수녀님 등등... 교회의 대다수를 이루는 평신도만이 칭호가 없다.

나아가 가톨릭신자들만이 참된 인간이고, 신자아닌 사람은 야만인, 미개인, 이방인이라는 생각이 자리를 잡았다. 그리하여 점차 승리주의와 자만함에 물들게 되었다.

성 예로니모(340-320)는 이를 표현하여 '그리스도교 황제가 통치하자 교회는 권세와 부가 커졌으나 덕이 작아졌다'고 했다.

바오로는 예수님께서 보여준 본을 충실히 따랐던 사도중의 하나였다. 바오로는 사도로서 교우들로부터 생활비와 기타 미사예물 등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것을 포기하고 스스로 노동하여 그 비용을 충당했다. (사도 18,3에 따르면 천막 짜는 일)바오로는 물질적인 도움을 사양하곤 했다. (1데살 2, 9) 그것은 교우들의 경제적 부담이 복음선포에 지장을 줄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무엇보다 사도가 돈을 밝히고 사리사욕을 채운다는 혐의가 복음선포에 지장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1고린 9, 12) 바오로는 자기가 자랑할 것이라고는 십자가의 어리석음밖에 없다고 했다. (갈라 6, 14) 평생을 복음을 전하고 구원을 위한 봉사로 살았던 바오로... 편안함을 멀리하고 억척같이 일을 했던 바오로였다.

하지만 바오로 이후 성직자들은 점점 봉사자가 아니라 봉사 받는 사람들이 되어갔다. 많은 경우 성직자들은 억척같이 일하기보다는 편안함을 더 찾게 되었다.

중세시기에 정치와 교회의 혼합은 완성되었다.

476년, 로마제국이 멸망하고 중세천년 게르만시대가 시작되었다.

476년 게르만민족이 서로마제국을 멸망시키면서 중세 천년 게르만시대가 시작되었다.

게르만의 여러 종족들, 동고트, 서고트, 부르군드, 반달, 앵글로 색슨족들은 약화된 로마제국을 석권하고 저마다 왕국을 세웠다.

그 가운데 프랑크족이 지금의 프랑스와 서독일지역에 세운 프랑크왕국은 강력한 신흥국가로 성장하게 되었는데, 카알 황제는 다른 왕국들을 통합하여 마침내 서유럽전체를 통일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카알을 대제라고 불렀다.

카알 대제(Karl, 768-814)는 프랑크왕국의 국시를 '가톨릭교회의 보호'로 정하고 주교를 지방의 왕으로 임명하였다. 이렇게 되면서 정교혼합이 본격화되었다. 주교들은 평일에는 군주로서 정무를 보고, 주말에는 주교로 교회 일을 보게 되었다.

오토대제(Otto, 936-973)는 스스로 주교와 수도원장을 지명하였다. (서임권) 황제가 후보자를 지명하면 서품은 통과예식에 불과했고, 주교는 황제 앞에서 복종선서를 해야 했다. 주교는 왕인 동시에 주교직무를 행사하였다. 이렇게 되어 정교혼합이 완성되었다.

복음을 전하는 가톨릭교회는 국가처럼 바뀌었고, 봉사자인 성직자들은 사람들을 다스리는 권력자들이 되어 교회의 모습 전체가 변질되었다.

나아가 중세 절대군주사회의 강력한 신분질서가 교회의 제도와 조직 안에 흡수되었다. 이와 함께 교회 내에 강력한 위계질서가 형성되어 하느님-교황-주교-신부-부제-수도자-평신도(남자-여자-어린이) 순서로 교회의 신분질서가 고착되었다. 이런 사회가 1000년 동안 지속되면서 오늘날까지 교회 내에 '서열주의와 권위주의'가 이어지게 되었다.

정치와 종교의 혼합은 교회 외적인 변질을 초래하였다.

첫째, 교회가 교황님이 다스리는 제국과 같이 되었다.

교황은 황제, 주교는 영주, 사제는 기사, 신자는 평민이라는 식이다.

둘째, 성직자들은 신자들을 다스리는 권력자가 되었다.

성직자들이 신자들을 위한 봉사자가 아니라 지배자가 되었고 성직자들의 피 속에 권위주의가 흐르게 되어 대대로 전해지게 되었다.

교회는 하나의 제국과 같았고, 신자들은 '충성과 순명' 속에 살아야 했다. 위법자는 가혹한 처벌로 다스렸다. 교회는 죄인은 발붙일 수 없는 거룩한 성도들의 모임이며, 가톨릭교회 밖에서는 아무도 구원될 수 없는 우월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교회는 용서와 사랑보다는 제도와 법이 그 바탕이었고, 교회는 하나의 국가조직, 그것도 스스로 승리와 자만에 취한 거대한 제국이었다. 이것을 현대 학자들은 '화석처럼 굳어진 경직화'로 표현하고 있다.

 

2. 교회내적인 변질 : 형식주의

이와 함께 내적으로도 교회가 변질되었다.

예수님은 율법보다는 사랑을, 형식보다는 진솔함을 가르쳤는데, 놀랍게도 교회는 사랑보다는 율법을, 진솔함보다는 형식을 중시하는 쪽으로 변질되었다.

처음에 초대교회신자들은 주님 말씀을 가슴에 간직하고 기쁜 마음으로 성찬을 나누며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면서 살았다. '말씀과 성찬'이 초대교회 신자들 신앙의 원천이었다.

그런데 종교자유가 주어지고 교회가 법과 제도를 갖추게 되면서 교회가 변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점차 말씀은 사라지고 성찬만 남게 되었다. 그리하여 점점 말씀을 선포하는 강론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성찬만이 더욱 강조되었다. 그러다보니 말씀을 듣고 힘을 얻어 기쁘게 살기보다는, 미사만 빠짐없이 참석하고 고해성사만 열심히 보면 되는 신앙생활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 결과 신앙생활이 기쁨과 신바람이 아니라, 교회의 법적인 의무만 행하는 형식적인 신앙이 되기 쉬웠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성직자들은 알게 모르게 강론을 소홀하게 되었고, 미사도 건성으로 형식적으로 드리기 쉬웠다.

훗날 마르틴 루터는 형식화된 성찬을 버리고 말씀만으로 예배를 꾸몄다. 개신교 예배가 말씀(설교) 중심이다. 개신교는 성서를 중심으로 설교에 온 힘을 다해왔다. 목사님들은 설교에 승부를 건다. 온갖 신선한 재료를 준비하고 갖은 양념을 쳐서 얼마나 맛있고 고소한 설교들로 신도들을 배불리시는지... 일요일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개신교신도들의 얼굴을 보면 반짝반짝 빛이 난다. 얼마나 행복한 얼굴인지...

거기에 비해 주일미사를 마치고 나오는 가톨릭신자들은 거의 돌부처수준이다. 이론적인 강론, 케케묵은 강론, 왔다리갔다리 강론, 재고품, 유통기간 지난 강론이 문제다. 먹고살기 힘들고 지친 신자들이 주일미사에 와서 축복을 받고 신바람이 나기보다는 그저 주일의무를 채웠다는 것이 전부다. 안머라케이면 다행이고...

말씀은 사라지고 성찬만 남은 교회에 두 가지가 추가되었다. 첫째, 법, 둘째, 순명이었다.

이런 교회를 학자들은 '제도교회'라고 부른다.

제도교회의 특징이 '성사와 법, 그리고 순명'이었다.

매일 미사에 참여하고, 법과 규칙을 철저하게 지켜야 했고, 엄격히 순명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핵심이 되었다. 그 결과는 율법주의와 형식주의였다.

그리하여 신앙생활이 기쁘고 행복하고 신바람이 넘치는 것이 아니라 법적으로 의무를 채우는 것으로 경직되어 버렸다. 이와 함께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뒤로 밀려나고 신앙생활이 성사의무를 채우는 것과 개인적 신심생활로 굳어지게 되었다. 이런 영향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주일을 지키는 것'과 '내 혼자 열심 해서 천당에 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다. 또 신부들은 '미사 드리고 고해성사 주는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신앙관은 구원을 '제사중심'으로 만들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대신 죽음으로써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 졌다. 그러니 십자가의 희생제사인 미사를 충실히 드려야 한다.' 이런 구원관을 '십자가중심의 구원론'이라고 한다.

그 결과 인간은 십자가를 기념하는 희생제사인 미사를 열심히 드림으로써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주었다. 제사만 열심히 드리면 구원받는다... 이런 구원관은 여러 가지 오해를 불러일으켰는데, 그 첫 번째가 '형식주의'였다.

그리하여 제사인 미사를 드리는 것과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이 가장 강조되었다.

하루라도 미사를 빠지면 안되었다. 기도... 아침기도, 저녁기도, 삼종기도, 묵주기도 등등 열심히 바치는 것이 강조되었다.

그러다보니 매일 미사를 드리고 기도 열심히 하면 자동적으로 삶이 거룩하게 되는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또 내가 경건하니까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이라면 좋을낀데, 저라면 좋을낀데... 간섭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 쉬웠다. 마치 옛날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제사와 기도에는 열심하지만 남들도 자기들처럼 경건해야 한다는 교만함이 알게 모르게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 주변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미사와 기도에는 열심하지만 영적인 자만심에 물든 사람들이다.

또 사랑을 실천하는 일은 조금씩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은 조금씩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마치 옛날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남을 쉽게 미워하고 판단하고 사람들을 험담하기 쉽게 되었다. 우리 주변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미사와 기도에는 열심하면서도 남을 미워하고 욕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교회가 제도교회로 바뀌면서 내적으로도 변질되었다.

첫째, 사랑보다는 법 중심으로,

둘째, 진솔함보다는 형식주의로...

오늘날 신학자들은 구원의 초점이 '십자가 중심의 구원'보다 '하느님나라 중심의 구원'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예수님의 구원활동은 십자가중심이 아니었다. 제자들을 보고, '너거들, 걱정마라. 내가 이담에 십자가에서 죽으면서 너거 죄를 다 짊어지면 구원된다'는 식이 아니었다.

예수님 선포의 핵심은 '하느님나라'였다. : "하느님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하느님나라의 복음을 실천해야 한다. "즉 미사와 기도에도 열심해야 하겠지만... 우리의 실생활에서 하느님나라의 복음을 잘 실천함으로써 구원을 얻는다"는 가르침이었다.

이 하느님나라의 복음이 '사랑과 용서'였다. 가장 단순하게 말하면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3.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

하느님 사랑을 실천하는 첫째는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와 감사이고 그것이 오래전부터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로 표현되었다. 대표적인 경신례가 제사였다. 오늘날로 치면 ‘미사와 기도, 그리고 제물에 해당하는 헌금’이다.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고 제사를 드렸다. 번제물로는 어린양이 최고였다. 제사는 제단에 어린양을 잡아놓고 불에 태워 하느님께 바치는 것이었다.

또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소출이나 수입 중에 십분의 일을 바쳤다. 이것을 십일조라고 한다. : "땅의 십분의 일은, 땅의 곡식이든 나무의 열매든 모두 주님의 것이다." (레위 27, 30)

하지만 예언자들은 권력자들이 제사만 근사하게 드리고, 힘없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을 보고 꾸짖고 있다. :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나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굳기름에는 물렸다...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아라. 분향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 너희가 기도를 아무리 많이 한다 할지라도 나는 들어 주지 않으리라...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주어라." (이사 1, 11-17)

예언자들은 하느님께 드리는 올바른 제사는 이웃을 사랑하는 실천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 "사람아,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분께서 너에게 이미 말씀하셨다.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 (미가 6, 8)

예수님 시대에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형식주의에 빠져 있었다.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는 철저하게 드렸다.

기도도 여측 없었다. 법과 규칙을 지키는 데는 나무랄 데가 없었다.

이렇게 하느님께는 잘했지만... 사람들에게는 못했다. 특히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무시하고 목에 힘을 주고 살았다.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잘하지 못하면서 하느님께는 잘 하는 척 하면서 살았던 그들을 보고 예수님께서는 '위선자'라고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모습이 이웃에 대한 사랑에서 드러나야 한다고 하셨다.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진짜로는 하느님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희생제물을 하느님께 바치는 것보다 먼저 이웃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라고 가르쳤다. :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훨씬 더 낫습니다.' (마르 12, 33)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마태 5, 23)'는 말씀도 '일상의 삶에서 사람들과 화해하고 봉사하는 것이 예배와 제례준수를 우선한다'는 뜻이다. 인간에 대한 봉사가 하느님께 대한 예배를 대신하지는 않지만, 하느님께 대한 예배는 인간에 대한 봉사 안에서 그 진정한 의미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미사 열심히 드리고 남 미워하면 무슨 소용 있겠나?

미사와 기도는 열심 하면서 남을 판단하고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남은 가슴 아프게 해놓고 하느님 앞에서 예배만 번듯하게 드리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가 미사를 드리고, 기도하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고 용서하기 위해서다.

이웃사랑의 근본의미는 다음 두 가지다.

첫째,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다. 이웃사랑은 멀리 떨어진 사람에 대한 막연한 사랑이 아니다. 저 북한동포나 아프리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첫 번째로 내 가족, 그리고 나와함께 사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말한다. 그래서 밖에서는 잘하고 가족들에게 잘 못하는 사람은 참된 이웃사랑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둘째, '구체적인 사랑'을 말한다. 이웃사랑은 추상적인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결코 마음만으로도, 말만으로 하는 것도 아니다. 사랑은 반드시 실제로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구체적인 사랑이어야 한다. 그 것도 내 방식으로 베푸는 사랑이 아니라, 이웃이 원하는 방식으로 해주는 사랑이다. 내방식대로 하는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이다.

예수님의 모든 행위는 추상적인 이념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죄를 용서하고 병을 고쳐주었다. 슬픔에 동참하여 눈물을 흘렸고 완고한 마음 앞에 탄식하였다. 예수님은 현실주의자셨다.

현실에로의 부르심... 신앙을 마음 안에, 몸 안에 가두지 마라. 반드시 현실에서 드러내라... 신앙을 '고상한 이념 속'에 가두어두지 마라... 마음 속으로만의 확신으로 그치지 마라. 반드시 현실에서 드러내라... 그것도 억척같이 드러내라...

뛰어난 성인들은 이상주의자들이 아니었다. 사도바오로... 이냐시오... 마더 데레사... 이분들은 고상한 명상 속에 사신 분들이 아니었다. 현실 안에서 죽는 날까지 억척같았던 분들이었다... 깊은 영성이란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도 내 신앙을 내 생활 구석구석에서 드러내야하겠다. 내 신앙을 마음속에만 감추어 두어서는 안되겠다.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은 나를 진정으로 내어주는 것이다.

내 모든 것을 내어주는 삶, 내 생각이나 성격, 내 방식, 내가 원하는 것 모두를 기꺼이 내어 놓을 줄 아는 삶, 한마디로 '타인에 대한 개방성'이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의 핵심적인 의미인 것이다.

우리는 나의 기준으로 이웃을 보기보다 이웃에 대한 너그러운 마음을 가질 줄 알아야 하겠다. 누구나 각자가 하는 일은 서로 중요한 것이고 각자의 생각은 존중되어야 한다.

누구에게나 자기의 몫이 있다. 집안에는 남편의 일이 있고, 아내의 일이 있다. 아버지의 일이 있고, 어머니의 일이 있다. 며느리의 일이 있고, 시어머니의 일이 있다. 이런 일들은 서로 꼭 같이 중요한 것이고, 어느 한쪽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내 일만 중요하고 저 사람의 일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농사를 짓고, 어떤 사람은 학생들을 가르친다. 어떤 사람은 육신의 병을 고치고, 어떤 사람은 영혼의 병을 고친다. 이 모든 일들이 서로 꼭 같이 소중한 것이고, 모든 일들은 서로서로 도와주고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 모든 꽃이 장미꽃일 수는 없는 것이다. 장미꽃도 있고, 국화도 있고, 나팔꽃도 있고, 봉선화도 있다. 이 모든 꽃들이 어울려서 아름다운 자연을 만드는 것이다.

또 모든 사람은 하느님 앞에 서로 평등한 것이고, 꼭 같이 존중받아야 한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 모두는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소중한 생명들이고, 우리 모두는 이 지상생활이 끝난 다음에 모두 다 같이 하느님나라로 가야하는 것이다. 베드로씨나 바오로씨, 마리아씨나 데레사씨... 이 모든 분들이 하느님 앞에서 귀한 사람들이다.

내가 잘 낫다고 저 사람 무시해서도 안되고, 내가 좀 안다고 자랑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내 생각이 옳다고 저 사람 생각 무시해서도 안되겠고, 저 쪽은 틀렸고, 내가 맞다고 원수처럼 지내도 안되겠다. 나이 많다고 업신여기고, 병들었다고 무시해서도 안되겠다. 요즈음 나이 많은 사람들이 젊은 사람들에게 자꾸 밀려나니까 하는 말이, '나이 많아 미안해요...'란다. 키 작다고, 뚱뚱하다고, 얼굴 검다고, 머리숱 적다고 사람 무시해서도 안되겠다.

정말 세상에 자기만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런 교만함이 알게 모르게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는 것이다. 내 고집과 독선이 남과 나를 갈라놓고 공동체를 병들게 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자꾸 종양이 생기고 암도 생긴다. 무좀도 생기고 치질도 생긴다...

서로의 입장을 존중할 줄 아는 마음, 예수님 마음이다. 서로의 일을 존중할 줄 아는 마음, 예수님 마음이다. 서로의 생각을 존중할 줄 아는 마음, 예수님 마음이다.

서로를 귀하게 여길 줄 알고 중하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하겠다. 우리 모두는 잘 낫거나 못 낫거나, 좋거나 싫거나 함께 하느님나라에 가야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내 것만 맞고, 남의 것은 틀리다는 생각을 버려야겠다. 내 것이 소중하면 남의 것도 소중한 법이다. 나와 다른 생각, 나와 다른 삶의 방식을 존중하는 넓은 마음을 가져야겠다.


 

제7강 가톨릭의 변질의 결과 1 : 교회분열 

시대구분

인류역사를 고대와 중세, 근대와 현대로 구분한다.

학자들은 고대와 중세를 가르는 분기점으로 게르만민족에 의해 서로마제국이 멸망되었던 476년을 든다.

중세와 근대를 가르는 분기점으로 학자들은 가톨릭과 개신교가 분열되었던 1521년으로 본다.

근대와 현대를 가르는 분기점으로 학자들은 1914년-1918년까지 일어났던 제1차 세계대전으로 본다. 그 이후를 현대로 구분한다.

가톨릭교회는 로마제국의 혹독한 박해를 거치면서도 빠르게 제국으로 전파되어 마침내 313년 자유를 얻게 되었다. 자유는 좋은 것이었지만 교회의 순수성을 변질시켰다.

변질은 두 가지, 첫째 외적으로 가톨릭교회가 정치와 혼합되면서 '권위주의'에 빠지고, 둘째 내적으로 신앙생활이 '형식주의'로 빠진 것이 교회변질의 핵심이었다.

교회는 마치 교황이 다스리는 교황제국과 같이 되고, 성직자들은 권력자가 되었다. 그러다보니 권위주의라는 유전자가 성직자들의 피 속에 유전되게 되었다.

신앙생활도 기쁨과 행복이 넘치는 신바람이 아니라 국민이 국법을 지키는 것처럼 법을 철저히 지키고 순명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신앙생활이 형식으로 흐르기 쉬웠다. 미사와 기도는 열심하지만 미움과 질투는 여전했다.

성예로니모의 적절한 표현대로... 가톨릭교회는 권세와 부가 커졌지만, 덕은 작아졌다...

변질된 가톨릭교회에 점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교회는 거듭 스스로를 반성하고 회개와 쇄신이 필요하였다. 다행스럽게도 그때마다 뛰어난 개혁가들이 나타나 개혁을 추진하기도 하였지만, 교회전체의 개혁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부분적인 개혁으로 그쳤다.

이러한 변질의 극단적인 결과 중의 하나가 교회분열이었다.

일반적으로 교회분열을 종교개혁이라고 하지만...

'종교개혁'이라는 말은 적절한 용어가 아니다.

마르틴 루터가 다른 종교도 개혁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개혁이라는 말은 루터나 개신교 입장에서 보는 말이다. 가톨릭입장에서 보면 개혁이 아니라 배반이다. 가톨릭이나 개신교가 아닌 제3자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였던 가톨릭교회가 분열된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개혁'이라는 말보다 '교회분열'이라는 말이 더 객관적인 용어라고 생각된다.

사실 인간이 있는 곳 어디에나 분열이 있다. 가정에서도 부부사이에 미운 마음이 들고, 다투고, 마침내는 갈라서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분열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나약하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그렇기에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개혁이 필요한 것이다. 처음처럼...

종교의 분열은 일반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사실 타종교들도 여러 종파로 분열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가톨릭교회는 2천년 역사 안에서 두 번에 걸쳐 분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교회분열은 가톨릭교회의 가장 뼈아픈 실패라고 볼 수 있다.

 

1. 가톨릭교회와 정교회의 분열(1054년)

1) 분열의 경과

첫 번째로 가톨릭교회는 정교회와 분열되었다. 분열의 원인은 다음과 같다.

313년, 종교의 자유가 주어지고, 380년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었다.

395년, 로마제국이 동서로마제국으로 분열되면서 교회도 동서방교회로 나뉘어 지게 되었다. 서로마제국의 수도는 로마, 동로마제국 수도는 콘스탄티노플, 양제국은 서로 대립하게 된다. 그러면서 양국 교회의 수장들도 주도권을 놓고 대립하게 되었다.

로마를 중심으로 했던 '가톨릭교회'는 교황이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전체교회를 통제하는 최고의 권한인 '수위권'을 가진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했던 '정교회'는 교황이 전체교회를 대표하기는 하지만 다른 교회를 통제하는 권한은 없고, 양 교회는 서로 동등하고 자율적으로 운영된다고 맞섰다.

로마 교황은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종속을 요구한 반면,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로마교황의 독주를 거부하였다. 이러한 불화 속에 500년이 흘렀다. 이 불화의 골이 깊어지면서 점차 동서방 교회의 거리가 멀어지다가 드디어 양교회대표가 만나 담판을 짓게 되었다.

1054년, 로마 교황을 대표한 훔베르트 추기경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오스는 격렬한 대립 끝에 감정이 격화되었고, 마침내 서로를 단죄하고 파문하기에 이른다.

양 교회가 서로를 파문하였으니 실질적으로 유럽 전체가 파문상태였다. 이론적으로는 그때부터 가톨릭이든 정교회든 아무도 천국에 갈 수 없게 되었다.

1965년 12월 7일,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끝내면서 양 교회는 서로의 파문을 철회하고 화해하였다. 이론적으로는 성프란치스코, 소화데레사와 같은 분들이 대기상태로 있다가 그 날 부로 천국으로 오르게 된 것이다.

2) 양교회의 비교

(1) 용어

가톨릭교회를 서방교회, 라틴교회라고도 부르는 반면 정교회를 동방교회, 비잔틴교회라고도 부른다.

(2) 교회생활

정교회는 전통중시, 가톨릭교회는 세상변화에 적응, 교리는 거의 같다. 7성사도 꼭 같고 크게 다른 점은 없지만, 미사, 양형성체, 사제독신제 등 교회생활의 차이.

(3) 교회조직

가톨릭교회는 로마교황을 중심으로 중앙집권적으로 운영된다. 오늘날 신자 11억5천만.

정교회는 나라별로 독립적으로 운영된다. 그리스정교회, 러시아정교회, 루마니아정교회, 불가리아정교회 등. 오늘날 신자 2억5천만.

(4) 선교역사

정교회는 군사, 경제적으로 약해, 선교에 나서지 못해 동방지역으로 고정되었다.

가톨릭교회는 막강한 군사, 경제력을 앞세워 세계 식민지 건설과 함께 선교에 주력.

(5) 일치운동

1965년 12월 7일,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종료에 맞추어,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과 콘스탄티노플의 총 주교좌 대성당에서 1054년의 상호 파문을 폐기하였다.

그 이후 양 교회대표의 만남은 오늘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2001년, 교황 요한바오로2세는 그리스를 방문하여 역사 안에서 가톨릭교회가 정교회에 가했던 모든 잘못을 용서청하고, 두 교회가 서로 화해하고 협력할 것을 요청하였다. 교황은 나아가 시리아를 방문, 가톨릭교회가 이슬람에게 가했던 모든 잘못에 대해 용서를 청했다.

우리나라 정교회는 현재 서울마포구 아현동을 비롯, 부산, 인천, 전주, 양구, 춘천 등에 성당이 있고, 신자 2500명, 성직자 10여명 수도자 약간명으로 파악되고 있다.

 

2. 가톨릭과 개신교의 분열(1521년)

500년-1500년, 중세시기에 변질된 가톨릭교회의 폐해가 교회를 황폐화시켰다.

교회지도부는 권위주의에 물들어 있었고 무능했다. 곳곳에서 교회에 대한 원성이 높았다.

부도덕한 교황들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였고, 일부 수도자들은 종을 부리면서 수도생활을 하였다.

세상이 바뀌고 있었다. 중세가 무너지고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근대가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무조건적인 복종보다 인간의 삶을 중시하는 눈을 뜨게 되었다. 소위 인문주의...

교회는 변화되는 세상을 제대로 보고 세상의 요구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권위주의와 권력정신을 버리고 순수한 복음정신으로 돌아갈 것이 필요했다. 불행하게도 시급한 변화에 대처하기에는 교회가 노쇠한 공룡과 같이 너무나 무기력하였다.

특히 1500년대 유럽에는 교회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개혁을 요구했다. 하지만 수많은 개혁의 요구에 교회지도부는 안일하게 대처했고, 오히려 처벌과 단죄로 개혁을 제한했다. 나아가 더욱 강력한 복종과 순명을 강조하였고, 여차하면 종교재판으로 마녀로 몰아 화형시켰다. 마녀화형식은 당시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수백년간 계속된 마녀화형식으로 200여만명이 처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의 개혁가들

오랫동안 가톨릭교회는 꾸준히 개혁을 해왔지만 거듭 개혁이 필요했다. 다행히 많은 개혁가들이 꾸준히 교회개혁을 추진하였는데, 이들은 대부분 수도회를 창설하거나 여러 가지 방식으로 지리멸렬했던 가톨릭교회에 복음정신을 불러일으켰다.

안젤라 메리치(Angela Merici, +1540)는 우르술라회를 창설하였다.

천주의 요한(Johannes von Gott, +1550)은 자비의 우회라는 병자간호를 위한 공동체를 창설하였다.

가롤로 보로메오(Karl Borromäus, +1584)는 재속신부수도회인 헌신회를 설립하였다.

아빌라의 대데레사(Theresia von Avila, +1582)는 까르멜회수도자로 깊은 신비사상으로 수도회를 쇄신시켰고 특히 스페인과 프랑스의 신심에 영향을 미쳤다.

십자가의 요한(Johannes vom Kreuz, +1591)도 까르멜수도자로 수도회의 쇄신과 신심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필립보 네리(Filippo Neri, 1515-1595)는 오라토리오회의 창설자로 로마에서 활약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적인 활력을 불러일으켰다.

가밀로(Kamillus von Lelli, +1614)는 중환자와 임종자를위한 가밀로회를 창설하였다.

샹탈의 요안나(Johanna von Chantal, +1641)는 마리아 방문수도회를 창설하였다.

베드로 베륄(Peter von Berulle, +1629)은 프랑스의 오라토리오회를 창설하여 성직자교육에 헌신하였다.

장 자크 올리에(Jean Jacques Olier, +1657)는 파리의 쌩슐피스 본당신부로서 재속신부 수도회인 슐피스회를 창설하였다. 오늘날까지 파리의 쌩슐피스신학교는 프랑스의 가장 중요한 신학교육기관의 하나로서 프랑스의 모든 신학교의 전형이요 본보기가 되었고, 영국과 미국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

빈첸시오(Vinzenz von Paul, +1660)는 이웃사랑의 실천에 헌신하였다. 자비수도회를 창설하여 빈민구호와 병자간호에 봉사하도록 했다.

드 랑세(de Rance, +1700)는 트라피스트수도회를 창설했다.

요한 드 라 살(Jean Baptist de la Salle, +1719)은 그리스도교 교직회를 창설하였다.

이런 분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분이 바로 예수회를 창설한 이냐시오 로욜라(Ignatius von Loyola, 1491-1556)일 것이다. 예수회는 교회 내에 강력한 개혁정신을 불러일으켰다.

이들은 교회 곳곳에서 자선사업, 교육사업 등 세상을 위해 지칠 줄 모르게 헌신하였다.

마르틴 루터(1483-1546)도 개혁을 간절히 바랬던 신부였다. 하지만 루터는 급진적이었다. 다른 개혁가들처럼 교회 내에서 개혁하지 못하고 교회를 뛰쳐나가 새로운 교회를 세움으로써 가톨릭교회와 개신교로 분열되기에 이른다.

1) 마르틴 루터(1483-1546)

마르틴 루터는 독일북부 아이스레벤에서 태어나 아오스딩 수도회의 수사신부가 되었다. 공부를 계속한 루터는 성서신학박사가 되어 뷔텐베르그 신학대학 교수가 되었다.

루터는 열정이 강한 사람이었고, 당시의 많은 개혁가들처럼 가톨릭교회가 개혁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루터는 가톨릭교회 안에서 개혁하지 못하고 가톨릭교회 자체를 부정하고 새로운 교회를 세웠다.

이 교회가 루터교이고 이때가 1521년이었다.

루터교는 독일북부지역,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에 전파되었고, 우리나라에도 '한국기독교 루터교'라는 이름으로 들어와 있다.

루터가 세운 루터교의 본을 보고 가톨릭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너도 나도 새로운 교를 세우게 되었으니, 루터교는 개신교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렇게 되어 저마다 자기의 '주관적인 확신'으로 너도 나도 새로운 교회를 세우는 불행한 상황이 되었다. 저마다 자신의 교회가 진리라고 확신하는 반면, 상대교회에 대해 배타적이고 공격적이니 한 나라 안에서 종파가 다른 사람들이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또 나라끼리도 종파가 다르다는 이유로 대립하고 심지어 전쟁까지 하게 되니... 사람의 행복을 추구해야 하는 종교가 오히려 사람에게 불행을 가져오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2) 요한 칼빈(1509-1564)

비슷한 시기, 프랑스에서 태어나 법학과 신학을 공부한 평신도 요한 칼빈도 가톨릭교회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독일에서 새로운 교회를 세운 루터의 본을 본 칼빈은 교회를 세우기로 결심하고 스위스 제네바로 와서 새로운 교회를 세웠다. 이때가 1536년이었고, 이 교회가 장로교다.

장로교는 다른 종교에 대해 루터교보다 더욱 배타적이고 공격적이 되었다. 장로교는 네덜란드와 영국 등으로 전파되었고, 후에 미국으로 전파되어 세계화에 성공하게 되었다.

미국에서 장로교를 비롯한 개신교는 또 여러 종파로 분열되었다. 또 많은 신흥종파들도 생겨나게 되었다. 여호와의 증인, 안식일교, 몰몬교...

미국 장로교의 언더우드목사가 1884년 한국에 들어와 선교를 하면서 한국 장로교가 시작되었다. 언더우드목사는 연세대학교, 세브란스 병원을 세우면서 한국선교에 크게 성공하게 된다. 한국의 장로교도 여러 종파로 분열되었고, 통일교나 신앙촌과 같은 많은 신흥종파들도 파생되었다.

3) 헨리8세(1509-1547)

영국의 교회분열은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라 당시 영국왕이었던 헨리8세의 개인적인 문제로부터 출발된 것이었다.

헨리8세는 스페인공주 가타리나와 결혼했지만 아들이 없었고, 젊고 아름다운 시녀인 앤 볼랜을 사랑한 나머지 왕비 가타리나와 이혼하려 하였다.

헨리8세는 교황에게 이혼을 허락해달라고 하였으나 교황은 거절하였다. 시녀를 너무나 사랑했던 헨리8세는 교황과의 관계를 끊고, 영국에서 가톨릭교회를 금지시켰다.

그리고 1533년, 독일의 루터를 본받아 영국에 독창적인 교회를 세웠는데, 이것이 성공회다. 헨리8세는 그의 처사에 저항하던 토마스 모어 총리대신과 같은 당시의 대신들 200여명을 처형했다. 성공회에서 침례교, 감리교가 갈라져 나왔다. 영국의 가톨릭은 13%로 파악되고 있다.

 

3. 평가

교회분열은 인류역사에 천추의 한으로 남을 뼈아픈 실패다.

당시 가톨릭교회지도부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변화의 트렌드를 읽지 못하고 중세의 낡은 시스템을 고집함으로써 사람들로부터 지탄을 받았다.

독일북부에서 일어난 조그만 불씨를 제대로 잡지 못하고 오만과 독선으로 안일하게 대처하다가 인류를 갈라놓는 거대한 폭풍이 되었던 것이다. 인류역사에 이보다 더 큰 손실이 어디 있겠나. 전쟁은 한때 지나가는 손실이지만, 교회분열은 아마도 종말까지 계속될 손실이 아니겠나.

교회의 부패는 교회지도부의 부패와 잘못된 제도를 말한다.

그러니 교회의 개혁은 지도부가 먼저 회개하고 잘못된 제도를 고쳐야 하는 것이다... 교회자체가 부패했다면 예수님이 세운 교회를 처음부터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당시의 가톨릭교회가 정치와의 혼합 속에서 많이 변질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교회의 부족함과 잘못을 반성해야 하는 것이지, 교회를 부정하고 새교회를 세울수는 없는것이다. 그렇게되면 그때마다 분열들이 줄을 이을 것이다.

교회가 부패할 때마다 새로운 교회를 세운다는 것, 비극이다.

1500년 된 가톨릭교회를 전부다 부정하고 새로운 교회를 세운다고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다. 루터가 개혁을 기치로 새로운 교회를 세웠고, 루터를 따라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세웠지만, 그 교회들도 여전히 크고 작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또 여기저기 신흥종파들이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지 않나.

당시 무능하고 개혁을 외면했던 가톨릭교회의 지도부가 원망스럽다.

또 35살의 젊은 혈기에 너무나 극단적인 방법으로 교회를 분열시킨 루터도 원망스럽다.

새로운 교회를 세울 것이 아니라 가톨릭교회 안에서 개혁했더라면 분열은 없었을 것을... 부패할 때마다 너도나도 새로 교회를 세운다면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나...

따라서 루터는 새로운 교회를 만들 것이 아니라 교회안에서 개혁을 했어야 했다.

힘이 부치면 다음 세대에 맡기고, 하느님의 섭리에 맡겨야 했다. 분열의 결과로 죄없는 후손들이 얼마나 더 큰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분열은 모두에게 큰 고통이다.

갈라진 교회 모두가 분열의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당시의 가톨릭지도부에도 책임이 있고, 교회 안에서 개혁하지 못하고 새로운 교회를 세움으로써 결국 수많은 분열이라는 결과를 낳은 루터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할 것이다.

어느 쪽이 더 책임이 있는지 정확히 헤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갈라진 교회 모두 상대방에 대해서 선의를 가지고 서로 함께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정교회와 개신교를 '갈라진 형제들'이라고 부르면서 화해의 정신을 가지자고 호소하였다. 가톨릭신자인 우리도 선조들의 잘못을 반성하고 그리스도교 전체의 일치를 위해 기도해야하겠다.

 

제8강 마틴 루터(1483-1546), 회한의 이름


마르틴 루터를 생각하면 회한이 앞선다.

역사 안에서 아무도 스스로 교회를 세운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루터는 주관적 확신을 기초로 교회를 새로 세웠고, 이로써 너도나도 새로운 교회를 세우는 계기가 되었으니... 그저 안타깝고 통분할 일이다. 꼭 그렇게 분열했어야 했나...

다른 개혁가들처럼 가톨릭교회 내에서 개혁했었더라면, 분열은 없었을 것을...


1. 루터와 교회분열

1) 생애

루터는 1483년 독일북부 아이스레벤(Eisleben)에서 태어나 에어푸르트(Erfurt)에서 공부하였다. 광부였던 아버지는 그가 법관이 되기를 원했지만, 22살에(1505년) 아오스딩수도회에 입회하였고, 24살에(1507) 신부가 되었다. 그 후 비텐베르크(Wittenberg)대학에서 신학박사학위(1512)를 취득하고 성서신학교수가 되었다(1512-1519).

하지만 루터는 내적으로 행복하지 못했다.

루터는 늘 '죄의식'과 '하느님 심판에 대한 공포'로 괴로워했다.

수도자가 되었고, 사제로 서품 받고 성서신학박사가 되어 교수가 되었는데도 그는 특히 본능적인 욕구로 괴로워했고 죄의식에 시달렸다. 여자들도 그렇겠지만 독신자들에게 남자들의 본능적인 욕구는 극복하기가 쉽지 않다. 한창 때의 본능적인 욕구는 거의 폭풍우 같다. 본능을 잘 다스려 나가는 것이 성직자나 수도자의 운명이다.

거듭 고해성사를 보고 미사에 참석해 성체를 받아 모셨지만 이것이 불안한 루터의 마음을 진정시켜주지 못했다. 점점 마음 한 구석으로 드는 생각은 이것이었다:

'과연 고해성사와 미사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루터는 늘 혼자 조용히 스스로를 돌아보고 새로운 결심을 하곤했다. 피정이라고 한다. 피정(避靜)... 피할 피, 고요할 정이다. 고요한 데로 피하는 것이다. 가톨릭성직자나 수도자는 정기적인 피정을 통해 영육을 재충전한다.

어느 날 루터는 비텐베르크수도원 탑 안에 있는 독방에서 피정을 하면서 로마서를 묵상했는데, 다음의 구절이 루터를 뒤흔들어 놓았다. :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 (로마 1, 17; 4, 5 참조)

30대 나이의 한창 때, 본능적인 욕구로 인한 죄의식에 시달리던 루터는, 인간을 불안에서 해방시켜주는 것이 '고해성사나 미사'가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라고 확신하였다.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은 '사람은 교회에서 거행하는 고해성사로써 죄사함을 받고, 미사를 통해 하느님과 일치해서 의롭게 되는 것'인데 비해,

루터는 '인간은 고해성사나 미사가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믿음자체로써 죄사함을 받고 의롭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됨으로써 고해성사와 미사가 필요 없게 되고, 고해성사와 미사를 집행하는 사제직과 교회체계 자체가 필요 없게 되었다.

그러면서 루터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확신하게 되었다.

첫째, 영적인 교회 : 참된 교회는 영적인 교회이며, 모든 사람들은 자기 믿음에 따라 의롭게 되어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다. (의화)

둘째, 가톨릭교회와 사제직거부 : 가톨릭교회와 신부들의 역할은 폐지된다.

셋째, 성경자유해석 : 각자가 스스로 성경을 읽고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이 대체로 1517년까지였다. 그리고 곧바로 가톨릭교회의 분열이 시작되었다.


2) 분열의 발단과 경과

분열의 발단은 대사(大赦)문제였다. 대사란 죄를 면해주는 대사면이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가톨릭교회를 설립하고, 사도들에게 교회를 운영할 권한인 교도권을 맡기면서 사람들을 죄에서 풀어줄 것을 명하였다. :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주면, 나도 용서할 것이고, 너희가 용서해주지 않으면, 나도 용서해주지 않을 것이다." (요한 20, 23) 그리하여 처음부터 가톨릭교회는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사해주고, 고행과 엄격한 보속을 하도록 했다. 대사는 이 고행과 보속을 면제해주는 것이다.

313년,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종교자유를 선포하면서 사도 베드로가 순교한 바티칸 지역을 교황에게 헌납했다. 거기에 성당이 지어졌고, 성베드로 성당으로 명명되었다. 베드로 성당은 천년이 넘도록 비바람에 씻겨 다시 손을 보아야 했다.

1513년, 대사선포

당시 교황 레오10세는 베드로성당 증개축을 위해 교회건축헌금을 모금해야 했다.

이를 위해 교황은 대사를 반포하면서 다음의 조건을 명시했다. : 1. 회개. 2. 고해성사. 3. 베드로 성당건축기금 헌금. 단, 극빈자는 헌금을 못하더라도 회개와 고해성사를 하면 대사를 허락한다.

이렇게해서 베드로성당 건축기금을 헌금한 사람에게 헌금을 받았다는 '영수증'을 발급해 주었다. 이 영수증이 역사교과서에 '면죄부'란 말로 잘못 번역되어 마치 돈만내면 죄를 용서받는다는 뜻으로 오해되고 있다.

하지만 당시 신부들은 강론을 통해 대사를 강조하면서 헌금을 많이 하도록 경쟁적으로 촉구하는 경우가 허다했고, 그로 인한 폐단도 많아서 대사자체에 대한 불만이 폭넓게 퍼져있었다. 젊은 루터도 교회건축기금을 대사와 결부하여 모금하는 것을 비판하고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1517년, 대사반박 95조

루터는 이것을 95개 조항으로 정리하여 비텐베르그 성당정문 앞에 대자보로 붙였다. 루터는 교회건축기금은 필요하지만, 너무나 심한 모금과 지나친 방법에 대해 비판하고, 절제를 요구했다. 하지만 교회지도부는 루터의 비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1519년, 라이프치히(Leipzig) 논쟁

루터의 비판은 당시 폭넓게 퍼져있던 불만과 스파크를 일으키면서 점점 더 확대되었다. 그리하여 루터와 당시의 신학자 요한 에크신부와 공개적인 신학토론회가 개최되었다. 루터는 여기서 에크와 격렬히 대립하였다. 마침내 에크의 마지막 질문 : "루터신부, 당신은 교황과 주교를 인정하는가?" 루터의 마지막 답변 : "나는 교황과 주교를 거부한다!" 이 말로 루터는 가톨릭교회를 버렸다.

처음에 루터는 가톨릭교회의 여러 폐해들을 우려하고 개혁하려는 순수한 동기였고, 교회건축기금의 남용에 대한 자제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시 독일에 폭넓게 퍼져있던 가톨릭교회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던 많은 사람들 루터를 지지하게 되면서 순식간에 문제가 커져버렸다. 루터는 용기를 얻고 가톨릭교회 전체를 마구 공격하였다.

1521년, 루터 파문

루터에 대한 파문이 로마에서 결정되었다.

1521년, 보름스(Worms) 제국회의

1521년, 당시 독일의 가톨릭 황제 카알 5세(1519-1556)는 루터가 로마에서 단죄되자 독일의 종교적인 분열을 우려해서 독일 보름스(Worms)에서 그를 심문하게 되었다.

루터는 의회에서 멋진 연설을 하였다. : "나는 교황도 공의회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이 자주 오류를 범하였고, 스스로 모순되었다는 사실이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가 가르친 것 가운데 아무것도 취소할 수 없고 또 취소하지 않겠습니다. 내 양심을 거역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 하느님, 저를 도와주시옵소서, 아멘." 루터의 양심이 진리의 기준이었다.

연설은 의회 의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 다음날 황제도 훌륭한 연설을 하였다. : "독일국가 황제들은 모두 죽기까지 가톨릭교회의 충실한 아들들이었고, 수호자였습니다. 그들의 후예인 나는 그들의 모범을 따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한 개인이 자기 양심을 토대로, 전체 그리스도교에 대항할 때는 오류를 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교 자체가 1500년이나 오류를 범해온 것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루터를 공공연한 이단자로 여겨 조치할 것입니다."

1521년, 황제는 보름스칙서를 통해 루터와 그 추종자를 처벌하고자 하였지만, 때마침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전쟁이 터졌고, 황제는 9년 동안 전쟁을 치루어야 했다. 루터의 추종자였던 작센(Sachsen)의 선제후 프리드리히(Friedrich)는 루터를 바르트부륵(Wartburg)성으로 숨겨서 보호해주었다.

이 기간 동안 루터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스스로의 확신에 따라 새로운 교회를 세웠다.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고, 미사를 없애고, 고해성사를 없애고, 사제독신제를 폐지하고, 새로운 교리를 썼다. 이 새로운 교회는 '루터교'로 명명되었다.

독일 곳곳에서 혼란이 일어났다. 루터의 추종자들은 성당을 공격하고, 미사를 드리는 사제를 죽이고, 성당을 접수하였다. 또 수도원을 습격하여 수도자들을 죽이고 수도원도 빼앗았다. 독일 북부 대부분이 루터 수중에 넘어갔다.

1524년, 루터 결혼

루터는 수녀원에서 나온 가타리나수녀와 결혼하였다. 루터 나이 41세, 가타리나 25세였고 두 사람은 6명의 자녀를 두었다.

1530년, 아욱스부르크(Augsburg) 제국회의

9년 동안의 전쟁을 끝내고 황제 카알 5세가 독일에 돌아왔을 때 독일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황제는 즉시 교회 문제를 해결하여 독일의 분열을 막고자 하였다. 루터의 지지자들은 이미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황제는 평화적인 협의로 극복하고자 아욱스부륵에서 제국회의를 개회하였다.

루터측에서 루터의 동료요 친구였던 필립 멜랑크톤(Philipp Melanchton, 1497-1560)은 새로운 신앙고백서인 '아욱스부르크 신조(Confessio Augustana)'를 작성하였고, 가톨릭 측에서는 요한 에크를 중심으로 '아욱스부르크 반박서'를 작성하여 이를 토대로 협상이 시작되었다. 양측은 담판에서 서로를 양보하였다.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일치를 원했고, 황제가 그것을 변호하였다. 재일치가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멜랑크톤의 양보를 신랄히 비난한 루터에 의해 멜랑크톤은 흔들렸고, 결국 담판은 좌절되고 말았다.

1531년, 군사적대결

루터추종자들은 슈말칼덴 동맹을 체결, 황제에 무력으로 대항하려 했다.

1547년, 어려운 상황에서도 황제는 슈말칼덴 동맹군을 전멸시켰지만 분열은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그 와중에 루터는 1546년 사망하였다.

1555년, 아욱스부르크 제국회의

아욱스부르크 제국회의를 통해 마침내 양측의 공존이 결정되었다.

1. 독일의 가톨릭과 루터교는 동등한 권리를 갖고 공존한다.

2. 영주가 자기 영지 종교를 결정한다. 신하들은 종교적 확신에 따라 이주할 수 있다.

이로써 독일의 분열은 고정되었고, 루터교회는 신속히 전파되었다. 독일 전체의 절반(주로 북부), 덴마크, 스칸디나비아반도(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지역이 루터교가 되었다.

루터교회는 기독교 한국루터교회로 또는 복음교회로 불린다.

이제 자기 양심에 따라 새로운 신앙이 저마다 생겨나는 시대가 되었다. 그리하여 여러 신흥종파들이 저마다 참된 교회를 선언하고 나서는 시대가 되었다.

'주관적인 신앙'이 문제다. 분열이란 근본적으로 인간 전체를 위해 불행한 것이다.


2.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 교회를 수습하다

중세말기의 교회전반의 부패, 특히 교황과 고위성직자의 부패는 교회 내에 불만을 가득 차게 했다. 교회개혁의 요구는 이미 100여 년 전부터 강력하게 제기되고 있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교황들은 개혁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517년 마침내 독일의 교회분열이 폭발하였을 때, 독일황제 카알 5세는 교황에게 공의회를 소집해서 재빨리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황제는 교황들(레오10세(1513-1521), 하드리아노6세(1522-1523), 끌레멘스7세(1523-1534))에게 거듭 공의회를 통해 독일에서 일어난 교회분열의 불씨를 잡아야 했었지만, 교황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다.

결국 독일황제의 재촉으로 1545년에 가서야 트리엔트에서 공의회(1545-1563)가 소집되었다. 트리엔트공의회는 수많은 혼란으로 황폐해진 가톨릭교회를 수습하였다. 먼저 개신교를 단죄하고 교황중심의 교회를 확고하게 확인하였다. 나아가 흐트러진 가톨릭교회를 진정시키고 가톨릭교회의 전반적인 개혁을 촉구하게 되었다.

하지만... 공의회가 1545년이 아니라 루터의 문제가 터졌을 때인 1517년 즉시 개최되어 문제를 해결하였더라면... 분열은 없었을 것이다...

분열은 아픔을 준다. 가정에서도 이혼은 아픔을 준다. 분열된 그리스도교는 많은 아픔을 준다. 그래서 서로 일치하자는 운동을 에큐메니칼운동이라 한다.

가톨릭과 루터교회 사이에 1967년부터 대화를 계속한 결과 1999년 10월 30일 독일 아욱스부르크에서 양교회 대표가 만나 양교회 신학과 신앙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인제 와서 신앙이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선언만 하면 우야노, 후손들은 이렇게 갈라져서 서로 싸우고 해왔는데...

선배들의 잘못으로 인한 분열의 혹독한 폐해를 후손들이 힘겹게 바로잡고 있다.


3. 가톨릭교회를 살린 이냐시오 로욜라(1491-1556)

1500년대 교회분열시기의 독일은 혼란과 공포의 도가니였다.

루터와 그 추종자들은 가톨릭교회를 마구 공격했고 신부와 수도자들을 죽이고 성당과 수도원을 빼앗았다. 독일북부의 대부분이 그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가톨릭교회도 루터추종자들과 맞서면서 곳곳에서 폭력과 살인, 약탈과 방화가 난무했다. 급기야 루터추종자들이 일으킨 군사와 가톨릭을 지지하는 군사들 간의 전쟁으로 독일은 그야말로 쑥대밭이었다.

혼란속의 가톨릭교회, 그 가장 큰 원인은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했던 교회지도부의 안일함과 루터와 같은 급진적인 개혁가의 극단적인 선택이었다. 그 혼란 속에서 누가 교회를 구할 수 있을 것인지...

프랑스 파리는 유럽의 중심도시 중의 하나다. 당시 파리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스페인출신의 몇몇 젊은이들은 가톨릭교회가 처한 혼란 앞에 의기투합하였다. 이들이 설립한 것이 예수회였다. 예수회의 젊은 선각자들은 만신창이가 된 교회에 돌풍을 일으켰다.

그 젊은 선각자들의 리더였던 이냐시오 로욜라(1491-1556)는 개혁정신으로 뭉친 투사였다. 스페인 귀족가문의 장교출신이었던 이냐시오는 프랑스와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오랜 병상생활 중에 수도자가 될 것을 결심하고 스페인 살라만카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후(1526-1527) 프랑스 파리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1528-1535). 당시는 독일에서 루터의 교회분열 여파가 전 유럽으로 확산되던 난세였다.

이냐시오는 파리에서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만났다. 베드로 파베르,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야고보 라이네스, 알퐁소 살메론, 시몬 로드리게스, 니콜라오 보바딜라 등의 동지들은 가톨릭교회를 위해 살기로 약속하고 1534년 예수회를 설립하였다.

이냐시오는 가톨릭교회의 신앙과 전통을 알기 쉽고 명확하게 해설하였다. 그리고 루터를 비롯한 당시 개신교 사상을 비판하였다. : 첫째, 신앙은 공적이고 객관적이어야 하는데, 개신교는 자기 주관에 따른 주관적 신앙일 뿐이다. 둘째, 교회는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전통을 기초로 하는데, 개신교는 사도전통을 무시하고 마음속의 영적인 교회만을 주장하는 이상적인 것이다. 셋째, 개신교처럼 누구나 성서를 자유롭게 해석하면 신앙자체가 개인주의신앙이 된다.

이냐시오의 가르침에 많은 사람들이 큰 감동을 받았다.

예수회는 엄격한 조직, 유연한 사고, 불굴의 정신으로 흐트러진 가톨릭교회에 강력한 복음정신을 불어넣었고, 특히 '교육과 영성과 선교'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이러한 예수회의 정신은 예수회가 100년 만에 가톨릭교회에서 최대의 수도원으로 성장하는 놀라운 결과를 낳았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506-1552), 알로이시오 곤자가(1568-1591), 칼 라너(1904-1984) 등이 뛰어난 예수회회원들이었고, 예수회총장 머리에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하느님도 모른다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

당시 낡고 노쇠했던 가톨릭교회와 루터와 같은 교회분열자들의 도전 앞에 교회의 앞날은 암담했다. 그 어려운 상황에서 사명감에 불탔던 젊은 선각자들이 의기투합하여 '교육과 영성, 선교'라는 큰 틀을 설계하고 불굴의 정신으로 미지의 세계를 향해 도전해나갔던 것이다.

이냐시오와 예수회에서 드러나는 트랜드는 적지 않다. : '명석한 두뇌, 유연한 사고, 정확한 판단력, 진취성, 앞서는 정보, 도전정신, 불굴의 의지...' 그 많은 정신들 가운데 오늘날 가장 시급하게 본받고 싶은 것이 '도전정신과 불굴의 의지'다.

우리 시대에도 이냐시오와 같은 리더들이 많이 나오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하느님의 은총도 끊임없는 노력에 주어지는 선물인 것이다.


 

 

제9강 변질의 결과 2 : 세상에서 고립된 교회



1. 인류역사와 적응

 

** 게르만민족

 

로마인들은 야만인(Barbari)이란 용어를 미개국이나 적대국의 국민들을 가리키는데 사용했다. 특히 로마제국의 역사가들은 이 단어를 제국의 북쪽 국경을 둘러싸고 있던 게르만 민족을 지칭하는데 사용했다. : 역사가들은 동부게르만 민족으로 서고트족(Visigoths), 수에비족(Suevians), 반달족(Vandals), 부르군디족 (Burgundians), 동고트족(Ostrogoths), 롬바르드족(Lombards), 서부게르만 민족으로 프랑크족(Franks), 알레만니족(Alemanni), 앵글족(Angles), 색슨족(Saxons), 프리시아족(Frisians)으로 구별하였다.

375년경, 우랄산맥 서쪽에 포진하고 있던 몽고족의 분파인 훈족이 동유럽을 휩쓸자 유럽 동북부 지역에 살던 게르만 민족이 훈족에 침략에 시달리게 되었다. 기마민족인 훈족의 침략에 쫓긴 게르만민족은 결국은 이들을 피해 보따리를 싸서 서유럽쪽으로 유입되게 되었다. 이것이 소위 게르만민족의 대이동이다.

당시 로마제국은 395년 동서로마로 분열되었고, 서로마제국은 약화일로에 있었다.

게르만민족은 동유럽 대부분과 서유럽전역을 석권, 곳곳에 왕국을 세웠다.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 형국이었다.

수에비족은 스페인지방을 침공하였다가 서고트족에 합병되었다.

서고트족은 프랑스 남부지방와 스페인지방에 서고트왕국을 세웠다. 프랑크왕국에 합병.

반달족은 반달왕국을 세우고 결국 496년 서로마제국을 멸망시켰다.

부르군드족은 라인강상류과 프랑스동부지방에 자리를 잡았다가 프랑크왕국에 합병되었다.

동고트족은 이탈리아반도 동부해안 라벤나지역에 동고트왕국을 세웠다.

롬바르드족은 이탈리아반도 북부에 롬바르드왕국을 세웠다가 프랑크왕국에 합병.

프랑크족은 프랑스 중북부지역에 프랑크왕국을 세웠다. 프랑크왕 끌로비스는 뛰어난 능력으로 주변 게르만왕국들을 격퇴하고 영토를 확장했다. 프랑크족은 점차 주변 게르만국가들을 정복하고 마침내 유럽천하를 통일하게 되었고, 중세를 이루어갔다.

알레만니족은 프랑스동부 알사스지방에 자리를 잡았다가 프랑크족에게 합병되었다.

앵글로족과 색슨족은 영국에 자리를 잡았다.

프리시아족은 유럽북부해안지방에 자리를 잡았다가 프랑크족에 합병되었다.

게르만민족에 의해 서로마제국이 멸망하던 시기, 가톨릭교회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그 전쟁과 혼란의 시기에 가톨릭신앙과 교회가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 때문이었다.

첫째, 게르만민족의 지도자들이 가톨릭신앙을 수용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게르만민족의 본격적인 침공이 있기 전부터 수많은 게르만 사람들이 로마제국으로 이주해서 살고 있었고, 로마문화와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둘째, 교황과 주교들이 게르만민족의 침입으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고 종교와 문화를 지켰기 때문이었다. 서로마제국이 멸망하고 오랫동안 정치적인 공백상태가 계속되면서 교황은 실질적으로 황제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교황은 위험을 무릅쓰고 게르만왕들과 협상을 벌여 백성들을 보호하였고,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식량을 조달하였다.

학자들은 인류역사를 고대, 중세, 근대, 현대로 구별한다.

고대와 중세를 가르는 분기점으로 게르만민족에 의해 서로마제국이 멸망되던 476년...

중세와 근대를 가르는 분기점으로 학자들은 가톨릭과 개신교가 분열되었던 1521년...

근대와 현대를 가르는 분기점으로 학자들은 1914년-1918년까지의 제1차 세계대전...

그 이후를 현대로 구분한다.

개인이나 단체나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되고 마는 것이 역사의 순리다.

가톨릭교회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던 시기에 세상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다가 개신교와 분열되는 뼈아픈 실책을 겪었다.

안타깝게도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던 시기에 가톨릭교회는 또 다시 세상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세상에서 고립되는 뼈아픈 실책을 겪게 된다.

 

2. 변화의 시대와 탈그리스도교

 

근대말기인 1800년대부터 1900년대까지 100년간은 인류역사를 통틀어 가장 변화가 극심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이 바뀌었나...

첫째, 정치적 변화 : 정치제도가 군주제도에서 민주주의로 바뀌게 되었다. 인류역사상 한사람의 군주가 다스리던 제도가 국민들이 국가의 주인인 민주주의로 바뀌게 된 것이다. 1789년 프랑스혁명이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다.

둘째, 경제적 변화 : 경제제도가 봉건지주제도에서 자본주의로 바뀌게 되었다. 산업혁명이 변화의 불씨가 되었다. 그때까지는 땅이 부의 기반이었는데, 그때부터는 기술이나 개인의 능력이 부의 기반이 되었다. 빌게이츠나 워렌버핏이 땅이 많아 부자가 아니다.

셋째, 사상적 변화 : 사람들의 사상이 명령과 순명에서 자유와 개인으로 바뀌게 되었다. 사람들은 전통을 거부하고 자유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나아가 공동체가 거부되고 개인을 중시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근대주의(Modernism)라고 불렀다.

넷째, 사회적 변화 : 오랫동안 계속되었던 정치와 종교의 혼합이 끝나고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게 되었다. 이와 함께 교회가 지배하던 영토가 국가로 반환되게 되면서 교회는 권력과 부를 잃게 되었다. 교황은 교황령을 지키고자 하였지만 이탈리아정부와 격렬한 대립 끝에 결국 교황령을 차례로 내주게 되고 만다.

이러한 세상의 변화로 서유럽일대에 변화의 폭풍이 몰아닥쳤다. 가톨릭교회도 이 변화를 피해갈 수가 없었다. 변화에 성공하여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것인가, 변화에 실패하여 사람들의 외면을 받을 것인가... 교회로서는 기로에 선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가톨릭교회는 변화에 실패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외면하게 되었고, 오히려 변화에 역행하는 정책으로 사람들의 지탄을 받았다. 그 결과는 교회로부터 사람들의 대량이탈이었다. 학자들은 이를 '탈그리스도교'라 불렀다.

 

3. 가톨릭교회의 대처

 

1) 개혁적인 학자들

 

당시 개혁적인 학자들은 교회개혁을 주장하였다. 특히 1800년대의 독일 튀빙엔(Tübingen)대학 신학자들은 중세의 낡은 교회와 신학풍토를 몰아내고 교회와 신학 전반에 걸쳐 강력한 쇄신운동을 전개하였다. 튀빙엔학파라고 불리는 이들은 '예수님께서 세우신 가톨릭교회가 마치 교황이 지배하는 교황제국과 같이 되었고, 성직자는 신자들을 다스리는 권력자처럼 되어버린 현실을 비판하고 초대교회의 순수성을 회복하자'고 역설하였다.

튀빙엔학파와 같은 개혁적인 학자들의 주장은 ‘교회의 현대화’였다. 가톨릭교회가 변화하는 세상의 요구를 수용하고 여러 사상들과 대화해야함을 촉구하였다. 나아가 낡은 방법, 즉 단죄와 처벌의 위협, 법과 허례허식으로 신자들을 지도할 것이 아니라 교회전반의 의식개혁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되찾아야한다고 주장했다.

튀빙엔학파의 이러한 쇄신운동은 보수적인 교회분위기에 비추어 대단히 혁신적인 운동이었다. 교황청이 이러한 사상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보수적이었다. 오히려 개혁적인 학자들의 당시로서는 지나치게 혁신적인 주장들이 교황청과 갈등을 불러일으켰고 더러는 제재를 받기도 하였다.

 

2) 교황들의 대처

 

교황 비오9세(1846-1878)는 시대적 변화의 중심에 서있던 교황이었다. 비오9세는 265분의 교황 가운데 가장 오래 재임했던 교황이었다.

교황 비오9세(1846-1878), 레오13세(1878-1903), 비오10세(1903-1914), 베네딕도15세(1914-1922), 비오11세(1922-1939), 비오12세(1939-1958)

요한23세(1958-1963), 바오로6세(1963-1978), 요한바오로1세(1978), 요한바오로2세(1978-2005), 베네딕도16세(2005-)

시대적 분기점에서 교황 비오9세는 교황권과 교도권의 권위를 더욱 강화함으로써 교회의 전통을 확고히 지키려는 '방어정책'을 추진하였다. 나아가 제1차 바티칸공의회를 소집하여(1869-1870) 교회의 권위를 재확인하였다. 제1차 바티칸공의회는 '교황의 무류성과 수위권'을 선포하였고, 교회구성원의 충성과 순명을 더욱 강조하였다.

교황 비오9세 이후의 교황들도 거듭 교황권을 더욱 강화하고 근대주의를 단죄하는 수세적인 방식으로 대처했다.

교황들의 이러한 처사에 교황권을 옹호하는 보수적인 사람들은 환호하고 지지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세상의 변화요구에 대한 교황들의 낡은 처방방식에 반발했다.

첫째, 정치적 변화 : 군주제도가 무너지고 민주주의로 바뀌게 되었지만 교황들은 이러한 변화를 수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교회에 대한 도전으로 보고 민주주의에 대해 충격과 불안한 콤플렉스에 젖어있었다. 교황들은 군주제도를 고수했고 교황의 절대권을 고집하였다.

둘째, 경제적 변화 : 봉건지주제도가 무너지고 자본주의로 바뀌게 되었지만 교황들은 봉건지주제도를 고수하고 자본주의를 수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본주의를 근절하고 중세의 계급질서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산업혁명으로 생겨난 수많은 노동자들이 그들의 어려움을 교회에 호소하였지만 적절한 도움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외면하기 일쑤였다. 노동자들의 어려움을 도와주는 것은 개별적인 도움보다도 법과 제도를 고치는 것이 더욱 근본적인데 그런 사실을 깨닫기까지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결과로 많은 노동자들이 교회에 실망하고 공산주의로 넘어가게 되고 만다.

셋째, 사상적 변화 : 근대주의의 영향으로 사람들은 '자유와 개인' 의식을 주장하게 되었지만 교황들은 교회에 대한 '권위와 순명'을 더욱 강조하였다. 개혁적 신학자들은 세상의 여러 사상들을 무조건 단죄하기보다는 수용하고 대화해야한다고 하였지만 거부되고 만다.

넷째, 사회적 변화 : 오랜 정치와 종교의 혼합이 끝나고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면서 교회가 지배하던 영토가 국가로 반환되자 교황들은 정교분리를 막고 교회의 영토를 지키는 한편, 세상에 대한 교회의 권위와 순명체제를 유지하려 하였다. 그 와중에 정치권과 대립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바야흐로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가톨릭교회는 수세에 몰렸고, 사람들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많은 개혁적인 신학자들은 이러한 상황을 직시하고 교회가 시급하게 바뀌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하지만 교황들은 교회의 권위와 힘을 고수하려 하였다. 오히려 다양한 신학적 분석과 전망을 시도하는 신학자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더러는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교황들은 세상의 도전에 당황하고 있었고, 교회의 전통을 굳게 고수하는 것만이 교회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교황들은 교회의 개혁과 쇄신을 시도하였지만 내놓는 처방들 대부분이 시대의 요구와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교회는 점점 더 세상으로부터 고립되고 있었다. 교회라는 우물 안에 더욱 갖히고 있었다.

 

4. 개혁적 신학자들의 용기와 교황 요한23세(1958-1963)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가톨릭교회를 현대세계에 새롭게 적응시키려는 시도를 하기까지, 100여 년 동안 교황과 교도권은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개혁적인 신학자들은 거듭 교회가 현대세계에 적응해야한다고 주장하였지만 교황청에서는 이들에 대해 경고장으로 응수하였다.

경고를 받았던 학자들 대열에 셔누(D.Chenu, OP), 다니엘루(J.Danielou, SJ), 드 뤼박(H.de Lubac, SJ), 콩가르(Y.Congar, OP), 부야르(H.Bouillard, SJ), 떼이야르 드 샤르댕(Teilhard de Chardin, SJ), 라너(K.Rahner, SJ)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훗날 이들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이끌었던 위대한 학자들이었다. 공의회의 정신이 이들에게서 나왔던 것이다. 이들은 신학교 교수직에서 해임되거나 저작이 금서로 지정되었고, 더러는 공의회가 개최될 때까지 유랑생활을 하였다.

이들은 새로운 시대적 흐름을 정확하게 직시하였고, 교회가 효과적으로 대처해야할 근본적인 방향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교황 요한23세(1958-1963)는 이들의 분석과 처방을 받아들여 공의회를 개최함으로써 교회개혁을 주도하였던 것이니, 이들은 현대교회를 살린 선구자들이었다. 교황 요한23세와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이끌었던 신학자들은 현대가톨릭교회의 영웅들이다. 하느님께서는 공의회를 통해 교회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보여주신 것이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리더는 구성원의 재능을 보고 적재적소에 쓸 줄 알아야 한다.

 

5. 변화와 경영

 

뛰어난 경영인들은 항상 변화를 예의주시하고 적절한 대비책을 강구한다. 교회는 '영적인 동시에 가시적인 조직'이다. 과거와는 달리 이제는 교회지도자들도 변화와 경영에 대한 역량을 반드시 갖추어야 할 것이다.

첫째는 '위기의식과 안목'이다. 최고경영자라면 '우리조직은 내일이라도 망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으로 항상 긴장하고 있어야 한다. 교회지도부도 세상변화 앞에 늘 위기감을 가져야 할 것이다. 안일과 나태는 조직을 쇠퇴시킨다. 나아가 세상에 대한 넓은 안목을 가져야 할 것이다. 과거에는 세상을 마귀로 보고 세상적인 것을 백안시했지만 이제는 세상으로 향하는데 주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물 안에서 안주하다가는 망할 수 있는 것이 오늘날이다.

둘째는 '지혜와 통찰력'이다. 정보와 지식만으로 경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지혜와 통찰력을 갖추어야 한다. 지혜는 정보와 지식을 실천하고 경험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또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통찰력과 선견력이 중요하다. 통찰력과 선견력은 역사와 선각자들의 경험을 많이 읽고 배우며 끊임없이 탐구할 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스피드와 타이밍'이다. 최고경영인은 항상 변화를 재빨리 읽고 트렌드를 정확하게 포착해내야 한다. 적시에 적절한 대책을 찾아내는 것이 조직경영의 생명이다.

넷째 '혁신에 대한 의지와 용기'다. 조직경영은 혁신의 연속이다. 최고경영자는 늘 혁신에 대한 굳건한 의지와 혁신에 따르는 희생과 저항을 이겨내기 위한 용기를 갖추어야 한다.

불확실한 이 시대에 교회의 리더들이 혜안을 가지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제10강 제2차 바티칸공의회, 교회를 구하다


가톨릭교회는 인류역사에서 구원의 사명을 수행해왔다. 많은 성인들이 모범을 보였고 그 열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교회는 시간이 지날수록 세상 속에서 변질되어갔다.

첫째, 외적으로 변질되었다. 교회가 정치와 합쳐지면서 '권위주의'에 물들게 되었다.

둘째, 내적으로 변질되었다. 교회의 삶이 '형식주의'에 물들게 되었다.

변질은 많은 사람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그 결과 가톨릭교회는 2천년 역사에서 크게 두 번의 실패를 겪었다.

첫째가 '교회분열'이다.

1500년대 교회에 불만을 가졌던 사람들이 교회를 이탈해서 새로운 교회를 세우게 되었으니 그것이 개신교의 출발이 되었다.

둘째가 '탈그리스도교'다.

1800년대 세상의 급격한 변화를 외면하던 교회에 불만을 가졌던 사람들이 대거 교회를 떠나게 되었고 그 결과 유럽의 가톨릭교회는 급속도로 교세가 추락하게 되었다.

1900년대로 들어오면서 가톨릭교회의 위기는 심화되었다.

위기를 이겨내기 위한 교황청의 생각과 개혁적 신학자들의 생각은 달랐다.


1. 교황 요한 23세(1958-1963)와 제2차 바티칸공의회

비오 9세(1846-1878) 이후 교황들은 100년 동안 과거의 권위를 지키려는 '방어정책'으로 일관하였고, 그 결과는 안타깝게도 사람들의 대량교회이탈로 드러나게 되었다.

비오 9세(1846-1878)-레오 13세(1878-1903)-비오 10세(1903-1914)-베네딕도 15세(1914-1922)-비오 11세(1922-1939)-비오 12세(1939-1958)

변화하는 세상의 흐름을 직시한 사람들이 개혁적인 신학자들이었다.

독일의 예수회신부였던 칼 라너(1904-1984)와 프랑스의 도미니코회신부였던 이브 콩가르(1904-1998)가 대표적 신학자였다. 이들은 교회가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해야 한다는 간절한 염원으로 교회의 개혁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지만 당시 교황들은 오히려 이들을 의심의 눈으로 보고 더러는 경고장으로 응수하였다.

마침내 이들의 의견을 수용한 분이 교황 요한 23세(1958-1963)였고 요한 23세가 개최한 교회회의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였다. 요한 23세는 이들을 모두 공의회 신학자로 불렀다. 바로 이들이 공의회를 이끌었던 주역들이었다.

사실 2000년 가톨릭교회 역사 안에서 신학자들이 출현했던 시기는 그리 많지 않다. 대체로 세 번, 첫 번째는 초기 교회의 교리들이 정리되던 시기의 수많은 교부들로, 대체로 400년 전후의 시기다. 이 시기의 대표자는 두말할 것 없이 아오스딩(354-430)이라 할 수 있겠다. 그 뒤 800년 후인 1200년 전후 중세 신학의 전성기에 출현했던 학자군의 시기. 이시기의 대표자는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이다. 그 뒤 또 약 800년 후경인 1900년 중반 수많은 거장들이 다시 출현한다. 칼 아담을 필두로 로마노 과르디니, 앙뤼 드뤼박, 이브 콩가르로부터 지금 교황이신 요셉 라칭거에 이르기까지, 이시기의 대표자는 아무래도 칼 라너(1904-1984)라 할 수 있겠다.

1958년 11월 4일, 요한 23세가 교황으로 착좌했다.

그 이전의 교황들이 풍기는 이미지는 폐쇄적이고 비밀스럽고 보수적인 가톨릭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그 첫 번째가 '군주이미지'였다.

하지만 요한 23세는 서민적이고 개방적이었다. 전임교황들이 주로 귀족출신이었던데 비해 가난한 농부집안출신의 요한23세는 천성이 서민적이고 소탈했다.

1959년, 요한 23세는 교황에 착좌한지 3달 만에 전격적으로 세계공의회의 소집을 공포했다. 전 세계 교회 안팍의 놀라움은 컸다. 가톨릭 2000년 역사 안에 그때까지 전부 20번의 세계공의회가 개최되었다. 공의회가 개최되기 위해서는 이단의 출현이나 중대한 사안이 있어야 했지만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의회의 필요성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교회가 계속 가라앉고 있어도 교회의 고위성직자들도 느끼지를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개혁적인 신학자들의 냉철한 분석과 전망을 토대로 교황 요한 23세는 이대로 있다가는 교회가 망한다는 절박한 상황을 정확하게 읽었다. 사실 시대의 흐름을 정확히 읽고 어느 특정한 시점에서 적절한 처방을 내린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고 할 때 요한 23세는 혜안을 지닌 이 시대의 예언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교황 요한 23세에 현대교회의 가장 큰 공로와 감사가 돌아가야 마땅할 것이다. 그리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전혀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것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모토가 '현대세계에로의 적응(Aggiornamento)'이었다.

2.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

공의회가 한번 소집되면 엄청나다. 4000여명의 추기경과 주교들, 더 많은 신학자들, 수도회 대표들, 평신도 대표들이 대거 참석하고, 다른 그리스도교파 대표들도 초대된다. 이 많은 인원이 몇 년 동안 회의를 계속한다고 생각해 보면 보통 일이 아니다.

공의회를 준비하기 위한 준비위원회의 위원장으로 당시 교황청 검사성성(지금의 신앙교리성성)장관이었던 오타비아니추기경이 임명되었다.

당시 교황청과 이태리의 많은 고위성직자들이 보수적이었는데, 특히 오타비아니추기경과 시칠리 팔레르모 교구장 루피니추기경, 제노바의 시리추기경, 공의회 사무국장 펠리치추기경, 검사성성의 파렌테대주교 등 대표적이다. 이분들은 공의회 이전에는 개혁적 신학자들의 저작들을 심사하여 단죄하였고, 공의회기간에는 강경발언으로 교황청의 보수주의를 이끌었던 대표자들이었다.

오타비아니추기경은 전 세계 교구로부터 공의회에서 다루면 좋을 의제들을 제안 받는데, 전 세계에서 2000여개의 안건이 제안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공의회 개최 전까지 헌장의 초안을 작성하였다.

이렇게 준비를 마친 다음 1962년 10월 11일, "그리스도 당신만을, 우리는 당신만을 원하나이다."는 교황 요한 23세의 개막연설로 공의회가 개최되었다.

오타비아니추기경 주도로 작성된 공의회초안들은 개혁적인 진영에서 볼 때 너무 보수적이라고 처음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프랑스의 리에나르추기경, 독일의 프링스추기경, 네덜란드의 알프링크추기경, 로마의 베아추기경, 오스트리아의 쾨니히추기경, 벨기에의 수에넨스추기경 등은 공의회초안이 변화된 세상의 요구를 반영하지 못하고 구태만을 되풀이하고 있다고 혹독하게 비판하고, 아예 이 초안들을 폐기하고 초안자체를 새로 작성해야한다고 제안하였다. 특히 미국의 리터추기경은 '이 초안은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노예적인 공포심을 부추기고 있다'고 비판하고 1치워버려라'는 강한 표현을 써가며 초안을 내버리고 다시 만들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보수진영의 루피니 추기경은 초안을 칭찬하며 많은 학자들이 연구하고 신학위원회에서 승인된 것인데 무슨 권한으로 토론도 해보지 않고 폐기하려하느냐고 반문하고, 새 초안을 만들려면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공의회를 끝없이 끌고 갈 것이라고 걱정하였다. 검사성성 차관 파렌테 대주교 역시 초안을 옹호하고 나섰다.

양측의 격렬한 논쟁 끝에 결국 교황 요한 23세가 중재에 나서게 되었다. 투표에 붙인 결과 초안자체가 폐기되고 새로운 초안이 작성되어 본회의에 다시 상정되었다.

공의회문헌

공의회는 4번의 회기를 거치면서 치열한 격론과 타협의 오랜 과정을 통해 현대교회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공의회문헌에 담았다. 계시헌장, 전례헌장, 교회헌장, 사목헌장 등 4개의 헌장과 9개의 교령, 3개의 선언문으로 된 제2차 바티칸공의회문헌은 현대 가톨릭교회의 시금석이 되었다. 이 가운데 으뜸은 교회헌장이다.

3.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주요정신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급격한 세상변화에 따른 거듭된 교회개혁의 요구를 받아들여 2000년 교회역사를 돌아보면서 복음정신을 이 시대에 재조명하였다. 공의회의 주요한 정신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현대세계에로의 적응(Aggiornamento) : 세상의 변화에 무관심하고 전통만을 고집함으로써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하고 고립되었던 폐쇄적 태도를 바꾸어, 세상변화에 잘 적응하여 현대의 상황에 맞게 유연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정신.

2) 대화와 자성 : 교회가 세상에 대해 일방적으로 지시하고 명령하던 태도를 바꾸어, 세상을 구원의 협력자로 보고 대화하고 협력하려는 정신. 나아가 교회 스스로 자만하던 태도를 버리고 역사 안에서 교회의 과오를 인정하고 스스로의 부족함을 반성하고 쇄신하려는 정신.

3) 연대성(공동체성) : 모든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된 시스템을 개선하여 구성원들이 서로 함께 힘을 합쳐 공동체를 운영하려는 정신.

4) 교회 밖에서의 구원가능성 : 가톨릭교회에서 세례 받은 사람만 구원되고 가톨릭교회에서 세례 받지 않은 모든 사람은 멸망된다는 플로렌스공의회(1439-1445)의 결정을 버리고, 가톨릭교회 밖에서의 구원가능성을 인정하는 정신.

5) 갈라진 형제들과의 일치 : 갈라진 그리스도교 형제들인 정교회와 개신교(성공회 포함), 나아가 곱트교회와 야고보교회 등과의 반목을 버리고 일치를 이루려는 정신.

6) 종교의 자유 : 가톨릭만이 유일한 종교라는 확신을 버리고 세상의 다양한 종교와 사상들도 진리를 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정신.

7) 타종교와의 화해와 협력 : 세상의 다양한 종교가 인류의 행복을 증진하는데 유익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인류구원을 위해 타종교와 서로 협력하고 조화를 이루려는 정신.

8) 전례거행에서의 공동체중심 : 전례를 거행함에 있어 집전자 1인 중심이던 것을 공동체의 모든 참여자가 함께 예배를 드리는 정신.

9) 평신도사도직 : 평신도가 단순히 사목의 대상이 아니라 사제와 수도자와 함께 인류구원을 위한 고유한 사명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고 적극적 역할을 촉구하는 정신.

10) 사목의 개념 확대 : 사목이라는 말이 사제가 인간구원을 위해 하는 모든 활동을 뜻하던 데서, 사제와 수도자, 그리고 평신도 모두가 인간구원을 위해 하는 모든 활동을 의미하는 것으로 확대되어 함께 협력하려는 정신.

11) 권위주의 철폐 : 성직자들이 권위주의를 버리고 복음을 전하는 봉사자로서의 자세를 갖추는 정신.

12) 성모마리아에 대한 올바른 이해 : 과도한 성모신심을 자제하고 올바른 성모신심을 가지는 정신.

4. 공의회 이후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교회를 '하느님백성'과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 두 가지를 종합해서 공의회는 교회를 '인류구원을 위한 성사'로 종합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제야 정치와 종교의 혼합으로 왜곡되었던 교회에 대한 이해를 바르게 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즉시 낙관주의가 도래했다. 교황과 공의회를 주도했던 추기경, 주교, 신학자들은 새로운 희망에 젖어 있었다. 교회개념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함께 가톨릭교회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공의회 이후 가톨릭교회는 많은 혼란에 직면하게 되었다. 일치 대신에 분열이 찾아오게 되었고, 개방이라는 구호아래 저마다 자기 준거점에 따라 각자가 자기 목소리를 내게 되면서, '진보와 보수'니, '좌파와 우파'니 하는 각자의 관점으로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공의회 이후의 노선은 뚜렷이 세 가지 경향을 띠고 있다.

첫째, 진보(개방)주의 :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과거의 왜곡을 딛고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지만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을 따라잡기에는 벌써 부족하다. 새로운 공의회를 하더라도 교회가 더 변화되어야 한다 : 예컨대, 사제독신제도의 폐지, 여성사제서품허용, 인공피임허용, 재혼한 이혼자에 대한 성사허용, 주교 임기제 및 주교선임제도개선 등등.

둘째, 보수(전통)주의: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섣부른 개방을 함으로써 교회 전통을 붕괴시키고 오히려 교회를 세상풍조와 뒤섞이게 하였다. 과거교회의 전통을 더욱 엄격하게 지키는 것이 교회를 지키는 길이다.

셋째, 중도노선 : 전통을 유지하면서 현대세계의 요구를 수용하고 적응해나가려는 노선.

오늘날 인간의 정신적 가치가 현저히 퇴조하고 물질세계가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더구나 60년대 말부터 정신사조를 지배해온 포스트 모더니즘은 강력하게 인간 삶의 형태를 바꾸어 놓고 있다. 개인과 자유가 오늘의 코드다.

이 와중에 가치체계의 혼란은 신앙 자체와 교회를 뿌리째 흔들고 있다. 교회 내의 많은 신자들이 교회를 통해 제시되는 가치체계와 세상이 내어놓는 가치체계 사이에서 긴장과 갈등을 겪고 있다. 교회는 오늘날 새로운 위기를 맞고 있다.

이러한 공의회 이후의 혼란을 독일 주교회의 의장이었던 율리우스 되프너 추기경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공의회 이후의 교회는 하나의 거대한 건축 공사장과 같다. 교회는 건축 공사장, 그러나 설계도를 잃어버린 공사장, 그래서 각자가 자기 생각대로 계속 작업해 나가는 공사장과 같다."

이러한 혼란된 상황은 가톨릭 내부에 잠재해 있던 여러 긍정적인 힘이 개방을 통해 일시에 분출되는 과도기라고 할 수 있지만, 갑작스런 개방의 여파, 무분별한 개방, 여과되지 않은 개방, 절제되지 않은 개방, 저마다 자기 준거점에 따른 개방에 더 큰 원인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먼저 교회의 올바른 개념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 교회가 해야 할 일을 말할 수 있게 된다.

5. 개혁과 혁신의 마인드

변화와 개혁은 이시대의 가장 강력한 아이콘이다.

변화하는 세상에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개인이나 기업과 같은 조직 할 것 없이 걱정이 많다. 변화의 트렌드를 재빨리 읽고 적극 대처하기 위해 우리 사회 곳곳에서 개혁과 혁신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되고 만다는 것이 역사의 순리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현대교회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정한 분기점이 되었다. 두터운 보수적 풍토의 가톨릭교회가 놀랍게도 요한 23세와 같은 개혁적 수장을 만났고, 요한 23세는 개혁적 학자들을 아울러 과거교회를 돌아보고 현대교회를 분석하여 미래교회를 전망하였으니 공의회는 이 시대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큰 은총이었다.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semper reformanda)'는 라틴어 격언은 우리에게도 꼭 맞는 격언이다. 오늘날 교회가 처한 현실도 결코 녹록치 않다.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고 교회가 처한 환경도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낡고 굳은 경직성과 폐쇄적인 사고를 버려야 하겠다. 열린 마음을 가지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받아들이는데 주저하지 말아야 하겠다. 그렇기에 뛰어난 경영인들은 늘 개혁과 혁신의 마인드를 가진다. 그들은 늘 위기의식을 가지고 변화하는 세상의 흐름을 예의주시하면서 적절한 대비책을 강구한다.

교회는 '영적인 동시에 세상 안에 있는 조직'이다. 과거와는 달리 이제는 교회의 리더들도 세상변화에 대한 안목과 적절한 대책을 강구하는 역량을 반드시 갖추어 나가야 할 것이다.


 

제 11강 이 시대의 예언자, 교황 요한23세(1958-1963)

초심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살다보면 처음의 순수한 마음을 간직하기가 어려운 것이 인간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세상 속에서 점차 변질되기 쉽다.

그렇기에 라틴어 격언처럼 '교회는 종말까지 개혁을 필요로 한다.'

역사 안에서 꾸준한 개혁이 있었지만 가톨릭교회는 많이 변질되기도 하였다.

중세시기 성직자들이 권위주의로 물들면서 봉사자가 아니라 대접받는 권력자가 되었다.

세상은 급변하고 사람들은 더욱 앞서가는 데, 가톨릭교회만이 낡은 방식을 고집하고 우물 안에 갖혀 있었으니 세상으로부터 왕따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세상은 앞서가는데, 교회의 제도와 성직자들의 사고방식은 구식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본당신자들 중에 기업하는 사람들은 사람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인간경영, 조직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조직경영, 도사들인데... 본당신부들의 본당운영솜씨는 구닥다리인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독선적이고, 들을 줄 모르고, 고집부리고, 큰소리치고, 게다가 잘 삐지고... 특히 아무나보고 말 놓고, 놓는건지 안놓는건지 어지중간하고...

1900년대 초... 가톨릭교회는 늙고 병들어 있었다. 노쇠한 가톨릭교회...

당시 개혁적인 신학자들은 이러한 상황을 직시하였다.

시대적으로도 근대가 끝나고 현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정신없이 변화하는 세상 앞에 우왕좌왕 어쩔 줄을 몰랐다.

교황청의 보수적인 고위성직자들은 '옛날 교회의 전통과 권위를 확고하게 지키는 것이 교회를 살리는 길'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많은 개혁적인 신학자들이 시대의 흐름을 정확하게 직시하고 교회의 쇄신과 개혁을 요구해도 역대 교황들과 고위 성직자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가고 교회는 끝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이런 세상변화를 사람들은 잘 읽지 못했다.

하지만 당시 뛰어난 신학자들은 세상흐름을 정확하게 읽었던 것이고, 교황 요한23세께서는 이대로 앉아 있다가는 교회가 망한다는 절박한 상황을 받아들여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개최함으로써 교회의 변화를 이끌었던 것이다.

나는 요한 23세를 모든 사제들의 모델로 신학생들에게 추천한다.

1958년, 비오12세(1939-1958)의 뒤를 이어 늘 유머와 웃음이 풍부하고 인자한 동네 할아버지 같던 론깔리추기경이 차기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가 바로 요한23세였다.

요한23세 이전의 교황들은 비밀스럽고 보수적인 '군주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고 교황님의 생활은 다 드러나서는 안되었다. 비밀속에 있어야 했다. 교황님은 거룩하게 보여야 했다. 교황들은 세상과 동떨어져 있었다.

교황에 당선되면 바티칸과 라떼란성당, 그리고 휴양지인 까스텔깐돌포에만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전통에 따라 교황은 ‘바티칸의 포로’라고 불리었다.

이러한 교회의 모습은 늘 세상사람들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저 안에 뭐가 있을까... 수도원 내부의 이야기를 다루었던 영화 ‘장미의 이름으로’, 신부가 사랑하고 애낳고 어쩌고 하는 이야기로 된 영화 ‘가시나무 새’도 다 그런 맥락이다.

요한23세는 서민적이고 개방적이었다.

전임교황들이 주로 귀족출신이었던데 비해, 가난한 농부집안출신의 요한23세는 천성이 서민적이었다. 교황은 교황청의 신비스러움과 비밀스러움을 고집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세상을 향하기 시작했다. 지금처럼 교황이 다른 나라를 방문하고 하는 것은 비오12세 시대만해도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1958년 10월 28일 당선되어 11월 4일 교황좌에 착좌했다. 그해 12월 24일, 교황은 로마의 한 병원 어린이 환자들을 방문하여 함께 성탄을 보냈다. 놀라운 사건이었다. 교황이 바티칸을 떠나 병원을 방문한 사실 자체가 그 동안의 전통을 깬 충격이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이튿날 교황은 로마의 한 교도소를 방문하여 죄수들과 함께 식사를 하였다. ‘여러분들이 올 수 없기 때문에 제가 왔습니다.’ 사람들은 당황하였다. 그러나 교황은 계속해서 공장과 양로원, 고아원과 교도소 등을 찾아다니면서 기꺼이 보통사람들을 만났다.

교황은 바티칸 군주로서의 지위를 낮추고 하느님 종들의 종으로서의 역할을 스스로 실천했다. 사람들은 교황을 존경하기 시작하였다.

교황은 또한 바티칸의 높은 벽을 깨고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자유롭게 만났다.

500년 만에 처음으로 성공회 켄터베리 대주교를 만났고, 역사상 처음으로 일본 민속종교인 신도(神道)의 대신관 등을 만났다. 소련공산당서기장 흐루시초프의 딸과 사위를 만났고, 공산국가 외교관을 만나면서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무신론자인줄은 알지만, 이 노인의 축복을 받지 않겠습니까.’

교황이 교회 안팎으로 찬사와 존경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온화한 인격에 있었다. 교황은 화려한 환경에 있었으면서도 항상 소박하고 소탈했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인도적인 가치관에 직접 호소했다.

나아가 교황은 갈라진 그리스도교 형제들과 과거의 적대행위를 청산하고, 가톨릭교회가 져야할 책임을 인정함으로써 일치의 토대를 놓았다. 실제로 교황은 정교회, 성공회, 개신교 지도자들을 극진히 영접했고, 유대인에 대해서도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라고 소개할 만큼 겸손했다.

요한23세 이후로 교황을 황제로 만드는 격식이 점점 폐지되었다. 교황을 알현할 때 무릎을 세 번 굽혀 절하는 규정을 없애고, '성부성하'라는 호칭으로 부르지 못하게 하였다.

바티칸에서도 수행원 없이 혼자 다니면서 일꾼이나 정원사들과 즐겨 이야기를 나누었다. 불쑥 바티칸 목공소에 들러 목수들에게 포도주를 대접하기도 하고, 근위대와 같은 직원들의 봉급을 자녀수에 따라 올려주었다. 가족이 많으면 봉급이 많게 되었다. 그래서 교황청장관들은 자녀를 많이 가진 교황청수위가 자기들보다 봉급이 많다고 투덜거리기도 하였다.

교황은 늘 '복잡한 것은 간단하게 만들고, 간단한 것은 복잡하게 하지 마라.'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았다.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일기장에 자주 이렇게 적었다. '안젤로야, 너를 너무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런 생각이 그를 자유롭게 하였다.

교황은 점점 세계의 아버지 상(像)이 되어갔다.

1881년, 북부 이탈리아 베르가모 교구의 소토일몬테에서 태어난 가난한 소작농의 13남매 가운데 장남이었던 요한23세의 이름은 안젤로 론깔리였다. 론깔리는 천성이 검소하고 순박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공부를 할 형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머리가 좋은 론깔리가 농부로 한평생을 살게 될 것을 안타까워한 본당신부의 도움으로 11살 때 소신학교에 입학하면서 사제의 길을 걷게 된다.

신학교시절, 가난 때문에 눈물을 흘릴 때면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넌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다. 그러니 신부가 되더라도 가난한 신부가 되어라.’ 훗날 요한23세는 늘 '나는 소토 일 몬테의 가난한 농부출신이라는 사실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소신학교를 마치고 로마로 유학, 신학대학에서 학업을 계속하였고, 온갖 어려움을 이기고 23세 때 마침내 사제로 서품되었다. 서품식 때 부모님은 비싼 기차표 때문에 참석하지도 못했다. 서품식을 마치고 론깔리신부는 미사도구를 챙겨서 베드로성당 지하로 내려가 성베드로 무덤 앞에서 혼자 첫미사를 드리면서 스스로에게 이렇게 다짐했다. ‘너는 존경 받기위해서 사제가 된 것이 아니다. 돈을 벌거나 편안하게 살거나 명성을 얻거나 쾌락을 위해서는 더더욱 아니다. 너는 오직 가난한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기 위해서 사제가 된 것이다.

이후 공부를 계속한 론깔리신부는 교회법 박사학위를 받고 베르가모 교구장의 비서와 교구신학교의 교수로 9년 동안 일했다. 이때 론깔리신부는 노동자들,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해 많은 일을 하였다. 때로는 길거리 시위현장에 달려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특히 노동자들의 노동조합운동을 도왔는데, 부유층의 비위를 건드려 교황청에 론깔리신부를 비난하는 투서가 들어가기도 하였다. 론깔리신부는 예리코로 가는 길에 강도당한 사람들을 못본체 지나친 사제의 예를 들면서, 신부는 정의를 위해 사회적 약자들을 도와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러한 론깔리신부에 대해 당시 교황 비오10세는 다행히 '문책을 하지 않겠지만 조심해라'는 요지의 경고장을 보냈었다.

그 후 1925년 불가리아 교황대사로 임명되면서 주교로 서품되었고, 이후 그리스, 터키의 교황대사로 20년 동안 일했다. 불가리아와 그리스는 정교회국가이고, 터키는 이슬람국가여서 가톨릭은 소수였다. 이 기간 동안 론깔리주교는 소수인 가톨릭교회의 처지를 체험하면서 권위와 힘이 아니라 겸손과 진실로 사람을 대하는 법을 배웠다. 터키에서는 사제들에게 '까치발을 하고 조심스럽게 직무를 수행하라'고 당부했고, 모든 성사를 터키어로 집전하게 하였다. 터키외무성은 론깔리주교를 존경하기 시작했다. 또한 가톨릭과 정교회의 갈라진 그리스도교의 현실을 깊이 경험하면서 교회일치에 대한 간절한 열망을 갖게 되었고, 이것은 훗날 공의회정신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온후한 성격과 뛰어난 유머감각, 재치와 인내는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특히 터키 대사시절 2차 세계대전 동안 나치의 대학살로부터 유대인들에게 위조문서를 만들어주어 유대인들이 다른 나라로 도망갈 수 있도록 도왔다. 특히 헝가리정부에 서한을 보내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수용소로 보내지 말도록 간곡히 호소하는 등의 방법으로 유대인 만2천명을 구해냈다.

1944년, 프랑스교황대사로 임명되었을 때, 론깔리주교는 로마에서 사무착오가 생긴 것으로 생각했을 정도로 자신의 중요직 임명에 놀랐다.

1944년 8월 25일, 파리는 독일로부터 해방되었고, 당시 프랑스교회는 독일치하의 비시정권과 임시정부사이에서 곤경에 처해있었다. 프랑스 대다수 주교들이 나치독일에 협력했기 때문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독일에 저항했던 레지스땅스의 최고 책임자였던 드골이 프랑스의 임시정부 대통령이 되었다. 드골은 프랑스가톨릭교회에 비시정권 하에서 독일에 협조한 주교 33명을 퇴임시키라고 요구하는 등, 가톨릭교회와 정부관계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 프랑스의 역사바로세우기

2차 대전 때 나치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고 즉각 친 나치 정권을 세운 것이 비시정권이었다. 비시정권은 프랑스내 나치 저항세력이었던 레지스땅스를 소탕하고, 유대인을 잡아 수용소로 보내는 등 나치에 적극 협력하게 된다. 여기에 ‘랭트랑 시냥’, ‘마탱’, ‘프띠 파리지엔’ 같은 신문들이 끊임없이 나치를 찬양하고 시녀로 활약했다.

목숨을 걸고 나치에 저항했던 사람들이 레지스땅스였고 그 지휘자가 영국에서 임시정부를 이끌던 드골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레지스땅스의 영웅 드골장군이 프랑스로 돌아오면서 프랑스대통령이 되었고, 가장 먼저 한 것이 바로 역사바로세우기였다.

드골은 비시정권에 적극 협력했던 7,000명을 색출해서 사형시켰다(즉결처분, 민중재판까지 합치면 사형된 자는 최소 만명, 최대 10만명). 그리고 단순 협력자 100만 여명을 감옥으로 보냈다. 900개 언론사중 나치를 찬양했던 언론, ‘랭트랑 시냥’, ‘마탱’, ‘프띠 파리지엔’ 등 649개 언론사책임자를 처벌하고 폐간했고, 나치 시대동안 스스로 문을 닫았던 신문사 ‘르피가로’, ‘라크로와’, ‘르땅’을 복간시켰다. 국회의원 80%가 레지스땅스 출신에서 뽑혔다.

나라가 어려울 때 국가를 위해 몸바친 사람이 대접받는 것이 정의... 프랑스의 자부심.

우리는 일제시대의 참담한 시기를 거치면서 해방후 역사바로세우기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많이 듣는다. 일제에 저항했던 사람들이 올바른 대접을 받지 못하고 어렵게 살고 있고, 오히려 일제에 협력해서 출세했던 사람들이 해방 후에도 그대로 권력과 부를 이어받은 경우가 적지 않다. 지난 10월 26일이 안중근 토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던 100년 되는 날이었다.

프랑스로치면 드골과 같은 김구선생, 당시 중국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지휘했던 김구선생이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된 것이 아니라, 우리는 죽였다.

한국 현대사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반드시 필요할 것이고, 그렇지 못하기에 우리나라 사회의 정의와 가치관이 많이 왜곡되어 있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이러한 현실이 결국 국민의 분열과 대립을 가져올 수 있기에 평화를 염원한다면 그 원인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일이 전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드골은 가톨릭교회에 대해서는 나치에 협력했던 주교들을 처리하라고 교황에게 요구하였다. 교황청은 큰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주교들을 퇴임시키기도, 그대로 버티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 어려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해결사가 시급했다. 그러다가 사람 좋은 론깔리 주교를 생각하고 해결사로 프랑스대사로 임명한 것이다.

론깔리 주교는 드골을 만났다. 드골은 론깔리 주교의 인품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한 처리를 모두 론깔리 주교에게 위임하였다. 론깔리 주교는 프랑스주교들을 소집하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결국 주교 3명이 사임하고 프랑스주교회의 이름으로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는 것으로 일을 매듭지었다.

나아가 론깔리 주교는 프랑스에 잡혀있는 독일군포로들 가운데 독일신학생 949명이 신학을 계속 공부하여 사제가 될 수 있도록 조치하는 등 어려운 문제를 유연하게 해결하였다. 또 프랑스주교들과 힘을 합쳐 26만 독일군 전쟁포로들이 수감기간을 단축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노력했다. 어려움에 처한 모든 이가 사목대상이었다.

프랑스 대사시절, 론깔리주교는 프랑스 상류사회의 귀족들과 정치인들을 상대해야 했다. 때로는 짓궂은 신사들이 그의 뚱뚱한 체구를 조롱하기도 하였고, 갑자기 여자 누드사진을 불쑥 눈앞에 내밀기도 하였지만 대주교는 웃으면서 '사모님이신가 보군요?'라고 대답하는 재치를 보였다. 늘 소박하고 검소했고, 길거리에서 사람들 틈에 섞여 산책을 즐겨 하곤 했는데, 교황 비오12세로부터 대사의 품위를 손상시킨다고 꾸중을 듣기도 했다.

9년 뒤, 론깔리주교는 추기경으로 서임되면서 베네치아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취임식 때의 인사말이 사람들을 감격시켰다: '저는 어린 시절 어렵지만 축복받은 가난 속에서 자랐습니다. 이 가난이 저를 성숙시키고 세상을 보는 마음과 눈을 열어주었습니다. 저는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고, 사회적 약자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가톨릭신앙을 굳게 지키면서도, 그들과 대립하기보다는 일치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론깔리추기경은 늘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승객들과 자연스레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자, 자, 이리들 와서 앉으세요. 여러분이나 나나 같은 요금을 내고 탔잖아요. 우리 이야기 좀 합시다...' 취임 후 몇 일 만에 공장을 찾아 산업재해를 당한 노동자들을 위해 미사를 봉헌하였고, 공단 항구에 있는 노동자들과도 미사를 드렸다. 매일 4시에 일어나 밤 10시까지 강행군을 하면서 5년 동안 공단지역에 30개의 신설본당을 세웠다. 1957년에는 교구시노드를 개최하였는데, 개막식에서 추기경은 '권위적인 태도가 삶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면서 '권위적인 태도는 냉혹함과 힘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가부장적 태도는 자신의 우월성을 지키기 위해 인간을 미성숙하게 만들지요. 그런 태도는 아랫사람의 권리를 무시하게 됩니다.'

그는 명령하는 권력을 마다하고 사람들과 진정으로 소통하기를 바랐다.

1958년, 교황 비오12세가 서거하였다. 당시 교회에 대한 세계의 도전은 거셌다. 오랫동안 근대주의의 강력한 도전에 맞서 교황들은 교황권을 더욱 강화하고 전통을 굳게 방어하는 정책을 취했다. 총명하고 의지가 강했던 비오12세도 전임교황들의 뒤를 이어 방어정책을 다져놓았고, 추기경들은 이 정책이 교회를 위해 유익하다고 확신했다.

론깔리추기경은 가난한 농부의 아들 출신으로 교회의 정치무대에서 성공할 중요한 연줄도, 강력한 후원자도 없었다. 귀족출신들의 입장에서 보면 론깔리추기경은 교황에 당선될 인물이 아니었고, 교황으로 선출될 뛰어난 자질을 갖춘 것으로 평가받지 못했다. 교황선출도 3일이나 걸렸다. 77세의 고령으로 교황에 선출된 요한23세는 여러 파벌이 고령이라는 이유로 절충했던 대안 후보였다. 따라서 요한23세가 얼마동안 현상을 유지해놓으면 다음에는 보다 젊은 교황이 계속해서 교회의 방어정책을 계승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요한23세는 세상에 대한 교회의 '방어정책'을 적극적인 '적응정책'으로 완전히 바꾼 놀라운 일을 했던 것이고, 교회사에 영원히 빛날 뛰어난 업적을 남겼던 것이다. 교황 요한23세에 현대교회의 가장 큰 공로와 감사가 돌아가야 마땅할 것이다.

교황직에 오른 후에 요한23세의 머리에는 온통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교회가 현대세계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1959년 1월 25일, 바오로 개종축일에 교황은 이태리의 추기경들을 성바오로 수도원으로 초대하여 연설을 하였다. 교황은 교황직 3개월을 회고하고 교회와 현대세계를 위협하는 갖가지 위험들을 열거하면서 맨 마지막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현시점에서 교회의 필요에 대응하기 위해서 세계공의회를 개최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공의회는 갈라진 형제들과의 일치를 모색하는 공의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추기경들은 숨을 죽였다. 공의회! 거창하고 위험한 행사다. 그러나 교황은 늘 하던 대로 웃으면서 말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저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일에 착수합시다.’

공의회 후에는 교회에 격변과 혼란이 따른다는 것이 역사의 가르침이었다. 보수적인 교황청의 핵심담당자들은 교황의 공의회결심을 냉담하게 받아들였다. 전임 비오12세가 교회를 발전시켰고, 세계의 도전에 방어정책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지, 새로운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실제로 일부 추기경들은 고령의 교황이 서거함으로써 공의회가 자연스럽게 취소될 수 있도록 공의회 개최를 의도적으로 지연시키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나 교황은 공의회를 계획대로 밀고 나갔고, 교회가 시대의 요구에 적응해야하며, 세상을 향해 자신을 열어 놓아야한다고 하면서 ‘현대세계에로의 적응(aggiornamento)'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였고, 이러한 과제를 해결할 때 갈라진 형제들과의 일치가 가능할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이렇게 하여 ‘현대세계에로의 적응과 갈라진 형제들과의 일치’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목표가 되었다.

1962년 10월 11일, ‘그리스도 당신만을, 우리는 당신만을 원하나이다’라는 교황의 개막연설로 시작된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시작되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18개의 갈라진 교회들 대표들이 교황의 초청을 수락하여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1962년 11월 11일-12월 8일, 첫 번째 회기가 끝날 때쯤 교황은 위암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두 번째 회기를 맞지 못하고 1963년 6월 3일 서거하였다.

요한23세 후임으로 선출된 교황 바오로6세는 공의회를 그 본래의 목표에 따라 이끈 교황으로 평가된다. 폐회전날인 1965년 12월 7일, 공의회는 1054년에 있었던 동서방교회의 상호파문을 철회하여 동서방교회의 화해를 이끌었고, 교회, 전례, 사목, 계시 등 4개의 헌장과 교회일치, 매스미디어 등에 관한 9개 교령, 종교자유 등에 관한 3개의 선언을 채택함으로써 현대교회사에 빛나는 금자탑을 세웠다.

요한23세 재임 시기는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극에 달하던 시점이었다. 미국과 소련의 대립은 핵전쟁 일보직전까지 갔다. 교황은 서거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미국대통령 케네디와 소련공산당 서기장 흐루시초프를 설득하여 핵전쟁의 발발을 막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1963년도 회칙 ‘지상의 평화’는 이러한 치열한 대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1963년 6월 3일, 요한23세는 제2차 회기를 맞지 못하고 서거하였다.

서거하던 날, 비서신부가 눈물을 흘리면서, “교황님의 삶은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천국으로 가셔서 하느님 옆에 계시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자, 교황은 “그렇게 기쁜 소식을 들려주면서 울기는 와 우노.”하면서 위로하였다.

서거 직전 비서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이것이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보시오. 저 넓게 벌린 팔이 내 교황직의 이상이었소. 나는 겸손하고 소박하게 살려고 했소. 모두를 사랑하고 모두에게 잘해주려고 노력했소. 성모님, 나의 어머니시여!’ 신학교 때부터 평생 입술에서 떠나지 않던 성모님께 드리는 기도였다.

스스로를 낮추어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이 시대의 예언자 요한23세는 2000년 9월 3일 복자품에 올랐다. ‘착하신 교황 요한’이 그의 별칭이 되었다. 베드로대성당 지하무덤 교황요한23세께서 누워계신다. 지금도 교황님들 가운데 인기1위. 항상 꽃다발과 향유...

지난 2000년 대희년 때 요한23세 석관을 열었더니 시신이 부패하지 않고 있었다. 사람들은 놀랐고, 석관을 그대로 성당으로 올려 대희년 1년 동안 순례객들이 참배하도록 하였었다. 성지순례가면 꼭 인사드리고 오면 좋겠다.

 

 

 

출처 :어둠속에갇힌 불꽃 원문보기   글쓴이 :정중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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