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존재란 가까이 있고, 늘 있으면 그 소중함을 모른 채 지내기 일쑤다. 2013년 새해가 밝았다. 새해 계획으로 가까이 있어 아름다움을 잊고 지낸 우리 국토의 소중함을 느낄 기회인 여행하기를 넣어 보는 건 어떨까? 유례없이 춥다는 올 겨울, 그럴수록 눈과 입이 즐거운 곳을 찾아 추위를 잊는 것이 겨울을 잘 보낼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일 것이다. 여기, 국내여행 마니아들이 혹한도 잊을 만큼 멋진 명소들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광주의 어머니산인 무등산. 한겨울의 무등산은 눈과 얼음으로 뒤덮혀 반짝이는 수정으로 변한 서석대와 입석대가 있어 호남 겨울풍경의 정수로 손꼽힌다. 1988년 변산반도, 월출산에 이어 최근에 21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무등산을 만나러 가는 길은 그래서 더욱 의미 있는 산행이 될 것이다.
반짝이는 수정병풍 서석대. |
무등산을 만나기 위해서는 고즈넉한 옛길을 이용하는 것이 운치 있는데 소걸음처럼 우직한 폼으로 숲길에 접어들면 속세에서 선계로 들어선 듯 세상과 단절을 맛보게 된다.
광주사람들의 무등산 사랑, 1187
무등산은 도심 10km 이내에, 인구 100만 이상을 끼고 있는 세계 유일의 산으로, 서쪽에서 저녁노을이 비치면 수직절벽이 빛을 발하는데 ‘빛고을 광주’란 이름이 여기서 나왔다고 한다. 선동열을 ‘무등산폭격기’라고 칭한 이유는 서석대, 입석대 등 주상절리의 바위 덕이 아닐까 싶다.
폭포수같이 떨어지는 슬라이더에 한국, 일본 강타자들이 헛스윙으로 나가떨어지는 모습에 환호했고 그 힘의 원천을 무등산에서 찾고 싶었던 것이다. 무등산에 대한 광주 사람들의 사랑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옛길을 닦는다고 하니 개인이 뭉텅이 땅을 선뜻 내놓기도 하고 조금이라도 자연을 훼손하면 불같이 일어나는 사람들이 있기에 오늘날 무등산은 광주의 성산(聖山)이 될 수 있었고 가히 등급을 매길 수 없는 산이 되었다.
무등산 임도의 눈길. |
광주 어디든 고개를 쳐들면 어머니 같은 무등산이 보여 마치 산이 양팔을 펼쳐 사람들을 보듬고 있는 것 같다. 동학농민들은 무등산을 보며 힘을 얻었고, 일제강점기 고초를 당했던 광주학생운동의 주역들은 산을 바라보며 울분을 삼켰을 것이다. 1980년 5월 18일 군부의 총칼 아래 죽은 망자는 망월동묘역에 누워 무등산을 바라보고 있다. 이런 어머니 산이 없었다면 그들은 편히 눈을 감지 못했을 것이다.
완만한 평지길인 옛길 1구간은 산수오거리를 시작해 무진고성-청풍쉼터-충장사-원효사까지 7.75km, 무등산 등산길인 옛길 2구간은 원효사를 시작해 제철유적지-서석대까지 4.12km로, 두 구간을 더하면 총 11.87km, 무등산의 높이인 1187m와 숫자가 같다.
시내에서 원효사까지 가는 시내버스 번호가 1187번인 것을 감안하면 무등산에 대한 광주사람들의 사랑이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느릿느릿한 황소걸음, 무등산 옛길 1구간
김삿갓이 거닐던 옛길 1구간. |
옛길 1구간은 산수오거리를 시작해 무진고성-청풍쉼터-충장사-원효사까지 7.75km로 오감을 열어두고 가족과 함께 천천히 거니는 ‘황소걸음길’이다. 무진고성에 올라 시원스런 광주시내의 풍경을 눈에 넣어도 좋다. 큰길과 나란히 놓여 있는 오솔길을 자박자박 거닐면 광주사람의 식수원인 수원지에 닿게 된다. 약속의 다리인 청암교를 건너면 사랑약조의 흔적인 자물통이 철조망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음을 보게 된다.
무등산 옛길 주막터. |
그 뒤로 김삿갓이 화순 적벽가는 길에 잠시 들렀다고 하는 청풍쉼터가 나온다. 김삿갓은 ‘무등산이 높다 하되 소나무 아래 있고, 적벽강이 깊다 하되 모래 위에 흐른다’라는 명시를 남기며 무등산의 절경을 칭송했다.
방랑시인이 걸었던 길은 완만하며 길섶에 서어나무 연리목까지 서있어 신기함을 더해준다. 다시 숲길을 따라 사부작사부작 거닐면 제법 너른 주막터가 반긴다.
60년대까지 주막 한 채가 있어 길손의 갈증과 허기를 달래주었다고 하는데 초가 이엉을 얹은 정자와 널찍한 평상이 조성되어 잠시 발품을 쉬었다 가기 좋다.
임란 때 팔도 의병대장인 충장공 김덕령을 기리는 사당인 충장사, 원효대사가 무등산의 수려함에 감탄해 기도했던 원효사까지 숲길이 이어지며 7.75km 2시간이면 족하다. 옛길 3구간은 충장사를 시작으로 샘바위-풍암정-도요지-김덕령장군생가-호수생태원-환벽당-가사문학관까지 5.6km, 대략 2시간이 소요되며 정철의 성산별곡, 사미인곡 등 수많은 가사문학을 꽃피운 지역을 둘러보게 된다.
빛나는 보석을 만나기 위한 산행, 무등산 옛길 2구간
옛길 2구간, 무아지경의 길. |
원효사에서 무등산 서석대까지 오르는 등산로로 사람의 손때가 묻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어 ‘무아지경의 길’로 통한다. 새소리, 바람소리, 물소리에 마음을 내맡기며 자연과 함께 하면 된다. 20분쯤 걸었을까, 돌에서 철을 뽑았던 제철유적지가 반긴다. 바위에 ‘주검동’이라는 암각 글자가 새겨져 있어 임란 때 김덕령 장군이 무기를 만들었던 장소임을 말해준다.
무등산 상고대길. |
천천히 숨 고르기를 하며 경사진 길을 오르면 제법 폭이 넓은 물통거리가 나온다. 그 옛날 나무꾼들이 땔감이나 숯을 구워 나르던 산길로, 1960년대에는 무등산의 군인들이 보급품을 날랐던 보급로로 바뀌었다.
눈을 잔뜩 뒤집어쓰고 있는 산죽길을 따라 오르면 널찍한 치마바위가 나온다. 옛길 37번은 보급품 종착지로 당시의 흔적인 쇠바퀴, 쇠파이프, 드럼통 등 40년 전 군부대의 흔적들을 따로 모아 두었다.
사력을 다해 계단을 오르면 하늘이 열리면서 무등산과 광주 일대가 시원스레 펼쳐진다. 스탠드에서 야구 경기장을 내려다보는 기분이랄까. 중봉 쪽으로 시선을 던지면 수천 평의 억새군락이 바람에 하늘거리고 가운데 ‘S’ 자 굽잇길이 근사한 그림을 그려내고 있다.
태풍 볼라벤때는 순간 최대 풍속이 59.5m를 기록할 정도로 바람이 매운 곳이다. 임도에서 서석대까지는 눈으로 다져진 돌계단길로 하늘 향한 출입구로 보면 된다. 하늘은 코발트빛을 띠고 있으며 나무는 밍크코트를 걸친 듯 상고대를 잔뜩 뒤집어쓰고 있다.
한 폭의 진경산수화, 서석대와 입석대
무등산옛길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겨울에 만나는 서석대다. 눈과 얼음으로 덮인 수직기둥은 수정병풍을 하고 있어 햇볕이 더해지니 보석처럼 반짝인다. 서석대는 한반도 육지 땅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큰 주상절리대로, 용암이 지표 부근에서 냉각되면서 물리적 풍화로 형성된 중생대 백악기 화산활동의 산물이다.
서석대를 알리는 표지석. |
서석대를 멋지게 감상할 수 있도록 마주하는 곳에 전망대가 서 있어 난간을 잡고 자연이 만들어낸 수정바위를 감상하며 연신 감탄사를 내뱉는다. 눈꽃터널을 지나 200m쯤 오르면 ‘11.87km 완주를 축하합니다’라는 옛길 종점 푯말과 환영인사가 정상임을 알려준다.
그리스 신전을 닮은 입석대. |
사방 거침없는 풍경이 정신을 쏙 빼놓는다. 북쪽으로 내장산이, 남쪽으로는 월출산이 아른거린다. 지도 한 장 펼치고 남도의 산하를 손가락으로 짚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1100m 서석대 정상에는 표지석이 서 있다. ‘광주의 기상이 이곳에서 발원되다’라는 웅장한 글씨가 가슴을 짜릿하게 해준다.
장불재 방향으로 하산하면 기묘한 바위가 하늘 향해 서 있는 입석대를 마주한다. 높이 10m 오각, 육각, 팔각형의 돌병풍이 열 지어 서 있는 모습은 마치 그리스의 신전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서석대와 함께 입석대는 천연기념물 제465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앞으로 세계지질공원 지정을 추진하고 이다. 해안가가 아닌 해발 1천m 이상의 고지에 발달한 것으로 세계적으로 매우 희귀한 사례란다.
무등산 2구간은 길 보호를 위해 스틱 사용을 금하고 있고 올라가는 것만 허용하며 옛길로 내려가는 것은 막고 있다. 임도를 따라 무등산의 자태를 감상하며 하산해도 좋고 광주와 화순을 잇는 고개인 장불재를 거처 중머리재를 지나 증심사로 내려와도 운치 있다.
●여행정보
*무등산 옛길
옛길은 광주 시내에서 시작되고 원점회귀형이 아니므로 차를 가져가는 것보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편하다. 광주역이나 광주시외버스터미널 앞에서 20~30분마다 한 대씩 운행하는 시내버스를 이용하면 옛길 2구간 초입인 원효사까지 갈 수 있다. 주말이면 증편된다.
옛길은 총 3구간으로 하루에 3구간 전체를 둘러보기는 무리다. 이틀에 걸쳐 걷는 것이 좋은데 서석대 눈꽃을 볼 수 있는 2구간에 중점을 두고 시간이 남으면 원효사부터 쉼터까지 1구간을 거꾸로 내려오는 것이 좋다.
서석대 상고대 풍경. |
폭설이 내린 다음 날 아침에 찾으면 수정병풍 같은 서석대와 황홀한 눈꽃을 볼 수 있다. 정상은 바람이 심해 옷을 두둑히 입어야 하며, 미끄럼 방지를 위해 아이젠과 스틱은 필수, 빵과 육포 등 간식을 준비하면 체력저하를 막을 수 있다.
*가는 길 경부고속도로-천안논산간고속도로-호남고속도로-동광주IC-무등산
*맛집 신성산장(토종닭·산채비빔밥, 062-265-8778), 산해가든(닭요리, 062-266-6679),
장성오리탕(오리탕, 062-526-1504, 광주역 인근), 형제송정떡갈비(떡갈비, 062-944-0595, 송정동)
*잠자리 무등파크호텔(062-226-0011, 지산동), 히딩크모텔(062-528-0071, 광주역), 몰디브모텔 062-226-2460, 대인동)
*주변 볼거리 충민사, 국립 5·18 민주묘지, 금남로 공원, 빛고을국악전수관, 소쇄원, 증심사
글·사진/이종원 여행작가
(사)한국여행작가협회 정회원, 여행동호회 ‘모놀과 정수’(cafe.daum.net/monol4 1만6천명) 대표. <대한민국 숨겨진 여행지100><우리나라 어디까지 가봤니56><한국의 숨어있는 아름다운 풍경> 등 개인서적과 20여 권의 공저가 있다. 2008년 터키문화원 사진공모전 대상 수상. 2012년 ‘한국관광의 별’ 단행본 부문 대상 수상. 세계자연유산 거문오름 원고 중학교 3학년 국어교과서에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