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존재란 가까이 있고, 늘 있으면 그 소중함을 모른 채 지내기 일쑤다. 2013년 새해가 밝았다. 새해 계획으로 가까이 있어 아름다움을 잊고 지낸 우리 국토의 소중함을 느낄 기회인 여행하기를 넣어 보는 건 어떨까? 유례없이 춥다는 올 겨울, 그럴수록 눈과 입이 즐거운 곳을 찾아 추위를 잊는 것이 겨울을 잘 보낼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일 것이다. 여기, 국내여행 마니아들이 혹한도 잊을 만큼 멋진 명소들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한라산의 겨울은 황홀하다. 겨울이 되면 한라산은 반짝이는 눈꽃으로 가득하다. 그 어느 곳에서도 만나지 못할 겨울의 아름다움을 한라산에서 마주하게 된다. 발걸음을 더할수록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겨울 한라산 트레킹. 겨울이 되면 나도 모르게 제주도행 비행기를 찾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한라산 정상가는 길의 깔딱고개. |
따뜻한 위로를 주는 한라산 트레킹
‘그곳엔 나의 산소가 산다.
막힌 숨통을 뚫어주는 심장 같은 곳
한라산은 나의 주치의다’
제주 태생의 시인 김미정은 한라산을 이렇게 표현했다. 특히 빛나는 설경으로 가득한 한라산을 걷는 한라산 트레킹은 누구에게나 자연의 아름다움과 위로를 안겨준다. 산을 오를 때는 눈밭을 힘들게 헤쳐야하지만, 트레킹을 마치고 나면 머리는 상쾌해지고 가슴은 더없이 투명해진다.
한라산은 금강산, 지리산과 함께 신선이 산다는 삼신산으로 여겨졌다. 육지에서 흙을 옮겨 제주도를 만들고, 마지막으로 퍼온 흙을 쌓아 한라산을 만들었다는 ‘설망대 할망의 전설’은 한라산을 더욱 신비롭게 만든다.
신이 사는 한라산은 사계절이 모두 매력적이다. 봄에는 분홍빛 철쭉이, 여름에는 울창한 숲이 신록으로 가득하고 가을에는 형형색색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그 중에서도 손꼽히는 장면은 웅장한 자태를 뽐내는 겨울이다. 켜켜이 쌓인 눈은 바람이 부는 대로 결을 내고 빛에 따라 반짝인다. 한라산 겨울 트레킹은 화산 특유의 지형으로 만들어진 독특한 식생과 생태계를 보며 설망대 할망의 전설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삼각봉 가는 길의 깊은 계곡사이로 빛이 머문다. |
한라산이 특별한 이유 중 하나는 오름 때문이다. 한라산 주변에는 360여개의 오름이 도란도란 모여 있다. 한라산에서 내려다보는 작은 오름들의 모습은 독특하다. 어미 주위로 모여든 어린 병아리들 같기도 하고 신을 향해 경배를 드리는 군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런 풍광 덕분에 한라산은 2007년 6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코스따라 즐기는 한라산 트레킹
왕관릉 절벽 아래 눈꽃으로 변한 구상나무 군락. |
한라산이라는 이름은 은하수를 만질 수 있을 만큼 높은 산이라 해서 붙여졌다. 실제로 해발 1950m로, 남한에서 제일 높다. 이곳에서는 낮에도 밤에도 세상이 반짝인다.
밤에는 푸른 밤을 수놓은 별들이 빛으로 이야기를 하고, 낮에는 빛을 받은 눈들이 보석처럼 영롱하게 반짝인다. 한라산 트레킹은 반짝이는 눈빛과 함께 한라산에 숨어있는 수많은 보석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사랑받는 한라산 트레킹 코스는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한라산 정상으로 향하는 코스와 한라산 화구 남벽 아래까지 가는 코스다.
한라산 정상으로 가는 코스는 성판악에서 출발해 사라오름을 둘러본 후, 진달래 대피소를 거쳐 정상으로 향한다. 산을 내려올 때는 성판악으로 원점 회기하거나 관음사지구 야영장을 거친다.
사람에 따라 8시간에서 9시간이 소요되는 긴 구간이지만, 길다고 겁을 낼 필요는 없다. 코스 자체가 완만해 편히 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구상나무와 삼나무 등 울창한 숲을 통과하기 때문에 더없이 아름다운 설경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관음사 방향으로 가면 화산 지대의 특유의 기암과 고사목이 있어 웅장하고 수려한 경관을 감상할 수 있다.
한라산 남벽까지만 가는 코스는 영실에서 출발해 윗세오름을 지나 어리목으로 향하거나 반대로 어리목에서 올라 영실로 하산한다. 코스 자체가 어렵지 않고 한라산의 제일 비경으로 꼽히는 영실기암이 있어 눈이 호강하는 길이다.
정상에서 관음사로 향하는 길 눈꽃으로 가득한 상고대가 숲을 이루고 있다. |
아고산식물의 천국인 선작지왓과 고산 초원평원인 만세동산 등 황홀한 풍광이 이어져, 사람들이 많이 찾는 코스다. 그러나 남벽까지 가는 코스는 한라산 정상으로는 갈 수 없다. 자연휴식년제로 정상가는 길이 폐쇄되었기 때문이다. 이 두가지 코스 외에도 돈내코 유원지 상류에서 시작해 남벽까지 가는 돈내코 코스, 가벼운 등산을 할 수 있는 곳으로 어승생악 코스가 있다.
사라오름의 신비로운 산정호수
여러 코스 중 하나의 코스만을 추천해달라고 한다면, 성판악에서 출발해 정상을 보고 관음사로 향하는 코스를 추천하고 싶다. 한라산의 매력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코스이기 때문이다. 출발은 아침 일찍 서둘러야 한다. 먼동이 트기 전 성판악 휴게소에서 국밥으로 식사를 하고 도시락을 준비하지 못했다면 휴게소에서 김밥을 장전해야 한다. 든든하게 에너지를 담아둬야 산행도 즐겁다.
사라오름 가기 전 울창한 삼나무 숲. |
성판악은 해발 750m 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성판악에서 약 9.6km를 오르면 정상이 나타난다. 탐방로를 따라 가다 보면, 눈길 위에 찍혀 있는 수많은 발자국이 보인다. 발길 따라 눈의 서걱대는 소리가 즐겁다. 주변에는 키 작은 조릿대와 덩치 큰 서어나무가 늠름한 장병들처럼 도열해 있다.
성판악에서 약 2km 지점에는 큰 수직암벽의 성널오름이 나타난다. 성널오름은 성판악을 가리킨다. 성널오름 앞의 우람한 삼나무 숲과 속밭 대피소를 지나면 사라오름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마음이 급해 바로 정상으로 올라가고 싶더라도, 숨을 고른 후 사라오름에 꼭 들르는 것이 좋다.
사라오름은 해발 1324m로, 제주도에서 가장 높은 오름이다. 높아서라기보다는 신비로운 풍경덕분에 큰 사랑을 받는 오름이다. 정상에 호수가 자리하고 있어, 사라오름에 오르면 마치 신선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든다.
사라오름 전망대에 서면 고운 한라산의 능선과 서귀포 일대가 한 눈에 펼쳐진다. |
빙판이 된 호수 옆 탐방로를 따라가면, 건너편에 있는 전망대에 도착한다. 전망대에 서면 한라산 중산간 지대의 오름들과 멀리 서귀포 일대, 바다 위에 동동 떠있는 범섬이 펼쳐져 있는 풍경을 볼 수 있다. 이 모습 하나만으로도 오를만한 가치가 있다.
설망대 할망을 만나러 가는 길
사라오름 갈림길에서 조금 더 오르면 진달래 대피소에 이른다. 여기에서 따끈한 컵라면에 김밥으로 주린 배를 든든하게 만든다. 진달래 대피소는 겨울철 낮 12시를 넘기면 정상으로 가는 길을 통제하기 때문에, 12시까지는 도착해야한다.
천천히 오르고 싶은 등산객들 마음에는 이른 통제 시간이 야속하기도 하지만, 가늠할 수 없는 날씨 때문에 사고의 위험을 예방하기 위해서니 이해할 수밖에 없다. 진달래 대피소에서 나와 눈꽃으로 만발한 고사목과 구상나무를 보면서 오르면 깔딱고개에 닿는다. 정상으로 가는 마지막 고개다.
파란 하늘과 하얀 설경 그 자체로 아름다운 한라산 정상 아래의 깔딱고개. 깔딱고개의 거센 바람이 만들어낸 눈의 결들이 곱다. |
한라산 정상은 부악이다. 부악 아래는 백록담이고 흰 눈으로 가득하다. 정상에는 매서운 칼바람이 부는데도 기념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1950m 한라산 표지석 앞은 길게 줄을 설 정도다.
움푹 파인 백록담을 보며 설망대 할망의 전설을 떠 올린다. 옥황상제의 딸인 설문대할망은 바깥세계의 하늘과 땅을 두 개로 쪼개어 놓았다. 옥황상제는 땅이 자신의 통제권에서 벗어난 것에 대해 진노했고 결국 할망은 땅으로 쫓겨나고 만다. 할망은 하늘과 땅을 갈라놓을 때 퍼놓았던 흙만 치마폭에 담고 땅의 세계로 왔다.
사람이 살기 좋은 곳에 치마폭의 흙을 쏟아내 제주도를 만들고 두 손으로 일곱 번 떠서 한라산을 만들었다. 후에 한라산으로 사냥을 나간 사냥꾼이 사슴을 잡기 위해 활을 치켜들다가 옥황상제의 엉덩이를 건드렸는데 화가 난 옥황상제는 한라산 봉우리를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던졌다. 그것이 나중에 산방산이 되고 봉우리가 뽑힌 자리는 백록담이 되었다고 한다.
설망대 할망의 전설을 품고 있는 백록담. |
설망대 할망의 전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정상에서 내려온다. 관음사지구 야영장으로 향하는 길은 계곡이 깊고 산세가 웅장하다. 해발 고도 차이가 커서 한라산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웅장한 바위와 고사목 등 풍경이 아름다운 왕관릉과 삼각봉 대피소, 탐라계곡을 지나면 관음사지구 야영장이 나타난다.
제주의 맛으로 화룡점정
제주 여행의 화룡점정은 신선한 제주의 음식을 맛보는 것이다. 힘든 트레킹이 끝난 후에는 따끈한 해물탕이나 싱싱한 회가 제격이다. 제주시 삼도1동에 있는 백선횟집은 현지인에게 인기 있는 횟집으로, 독가치회가 유명하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제주 토박이 맛을 내는 백선횟집의 따치회. |
독가치회는 제주도에서만 먹을 수 있는 생선으로 따치 또는 따돔으로 불린다. 두툼하게 썰어진 회는 쫄깃하니 씹는 맛이 좋다. 독가치회 이외에도 쥐치와 광어, 밀치 등 제철 생선들도 괜찮다. 반찬이 많지는 않다. 겨울철에는 따치가 잘 잡히지 않으므로 따치를 맛보고 싶다면 미리 문의하는 것이 좋다.
얼큰한 국물과 신선한 해물이 가득한 서귀포 기억나는집의 해물탕. |
하얀 눈 세상에서 설망대 할망의 전설을 떠올리며 동화 속을 걸었던 한라산 트레킹. 제주의 맛으로 마무리를 하고 나면, 몸과 마음 구석구석에 아무리 추운 강추위라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은 에너지가 충전되어 있는 것이 느껴질 것이다.
한라산 즐기는 법
1. 철저한 준비
겨울 한라산 트레킹은 준비가 많이 필요하다. 아이젠과 스틱, 스패츠는 필수고 발목까지 보호하는 등산화를 신는 것이 좋다. 뜨거운 물을 담을 보온병과 찬바람을 막아줄 버프도 요긴하다. 관음사지구 야영장으로 하산하는 경우 경사가 급한 왕관릉 구간이 있기 때문에 조심해서 내려가야 한다.
성판악에서 관음사로 향하는 구간은 코스 자체가 길기 때문에 초코바나 귤 등 행동식도 챙기는 것이 필요하다. 무엇 보다 체력 안배를 잘해야 한다. 풍경에 푹 빠져 지체 하다보면 정상에 오르지 못할 수도 있다.
2. 기상 예보 확인
섬은 날씨 변화가 심하다. 그 중 한라산은 언제 어떻게 날씨가 바뀔지 모르니 기상 예보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3. 오름 오르기
한라산을 직접 오르는 것이 아니라 한라산을 마주하는 것도 기억에 남을 만한 추억을 안겨준다.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리에 있는 노꼬메 오름은 억새와 해넘이를 조망하기 좋은 곳이다. 특히 눈으로 뒤덮인 한라산과 정상의 봉긋하게 솟은 화구벽을 붉게 물들이는 노을은 장관이다.
서귀포시 안덕면 창천리에 있는 군산은 차로 정상 못미처까지 갈 수 있는데 정상에서 해돋이와 해넘이를 볼 수가 있다. 우뚝 선 한라산과 푸른 바다로 흘러내리는 늘씬한 한라산의 자태가 멋지다.
●여행정보
* 한라산 국립공원: http://www.hallasan.go.kr/
* 한라산국립공원탐방안내소: 어리목 064-713-9950~3, 성판악 064-725-9950,
영실 064-747-9950, 관음사 064-756-9950
* 백선횟집(독가치회) 064-751-0033, 제주도 제주시 삼도1동 584-22
영업시간은 오후 5시~오후 11시 30분이며 명절에는 쉰다.
* 기억나는 집(해물탕) 064-733-8500,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486-4
영업시간은 오전 10시~오후 9시이며 연중무휴다.
글·사진/채지형 여행작가(http://www.traveldesigner.co.kr)
모든 답은 길에 있다고 믿는 여행가. 세계의 시장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나는 것과 표정 담긴 인형 모으기를 특별한 낙으로 삼고 있다. <지구별 워커홀릭> <인생을 바꾸는 여행의 힘> <여행작가 한번 해볼까> <어느 멋진 하루 Photo&Travel> 등 여러 권의 책을 펴냈다. KBS FM 이금희의 ‘사랑하기 좋은 날’ 등 각종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여행 코너를 진행했으며, 신문과 잡지에 따뜻한 여행과 삶에 대한 글을 싣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