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 고장을 지칭할 때 늘 '좌 안동, 우 함양'이란 수식어가 따라 붙듯이, 함양 역시 안동 못지않은 양반 고장으로 손꼽힌다. 여기에는 조선 성리학의 대가인 일두 정여창의 고향이자 500여 년이 훨씬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개평마을이 있기 때문이다. 개평마을에는 일두 고택을 중심으로 마을 곳곳에 유서 깊은 고택이 남아 있다. 마을길 구석구석을 둘러보노라면 기품 있으면서도 수수한 시골 인심이 느껴지는 포근한 시간을 즐길 수 있다.
일두 선생 산책로에서 본 개평마을
고색창연한 전통 한옥을 만나다
'좌 안동, 우 함양'이란 말이 있다. 빼어난 유학자들을 많이 배출한 영남 사림을 대표하는 두 지역을 여섯 글자로 함축한 말이다. 그만큼 선비의 기개, 가문과 학문에 대한 자부심, 뿌리 깊은 양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고장이다. 함양 가운데서도 지곡면에 자리한 개평마을은 조선시대 성리학을 대표하는 동방오현 가운데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일두 정여창 선생의 고향이다. 이 마을에는 일두 고택을 비롯해 수백 년 동안 대물림해온 유서 깊은 고택이 즐비하다.
개평이라는 이름은 내와 마을이 낄 '개(介)' 자처럼 생겼다는 데서 유래했다. 개평마을 표지석이 서 있는 마을 입구에서 보면 좌우로 두 개울이 하나로 합류하고, 그 사이로 개평마을이 들어서 있다. 마을과 잇닿아 넓은 들판이 펼쳐져 '개들'이라 불리기도 한다.
개평마을 고샅길을 걷기 전에 마을 전체를 굽어볼 수 있는 일두 산책로를 둘러보는 것이 좋다. 일두 선생 산책로는 지곡초등학교에서 개울 건너편 늠름한 소나무 군락을 지나 선암공원의 정자와 마을회관, 정일품농원을 거쳐 마을로 내려오는 코스다. 낮은 언덕을 따라 수십 그루의 소나무가 무리지어 서 있는데, 한없이 자유로운 모습으로 휘어지고 퍼져 있어 자태가 매우 인상적이다. 이 소나무 군락은 풍수지리에 따라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심었다고 전해진다. 300∼400년 된 다부진 적송이다. 언덕을 오르면 오를수록 개평마을의 전경이 소나무와 함께 어우러진다. 마을과 들판뿐 아니라 남덕유산 능선이 장쾌하게 흐른다.
이제 개평마을을 한번 둘러보자. 마을의 고샅길을 둘러보는 순서는 따로 없다. 길이 나 있는 대로, 발걸음이 닿는 대로 그냥 걸으면 된다. 흙과 돌을 섞어 만든 담장의 곡선과 이끼가 낀 기와를 이고 있는 기와지붕에 오래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고택 주변 곳곳에 자리한 텃밭에는 옥수수며 고추 따위가 담장을 마주하고 탐스럽게 영글어 시골 정경을 물씬 풍긴다. 가녀린 소리로 짖어대는 강아지와 우사에서 두 눈 휘둥그레 뜨고 쳐다보는 소 한 마리가 낯선 이방인을 맞아준다.
개평마을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고택들이 제법 많다. 일두 고택(중요민속문화재 제186호)을 필두로 오담 고택(경남 유형문화재 제407호), 풍천 노씨 대종가(경남 문화재자료 제356호), 노참판댁 고가(경남 문화재자료 제360호), 하동 정씨 고가(경남 문화재자료 제361호)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마을길을 따라 걷다 보면 숨어 있는 보물을 찾듯 만날 수 있는 유서 깊은 고가들이다. 이들 가운데 오담 고택, 풍천 노씨 대종가, 노참판댁 고가는 사람이 실제 거주하는 주거공간이므로 둘러볼 때 주의해야 한다. 개평마을에서는 일두 고택을 비롯해 한옥에서 하룻밤을 보낼 수 있다. 최근에 지어진 정일품명가는 한옥체험뿐 아니라 청국장, 된장, 가마솥밥 등 전통식품체험도 함께 즐길 수 있다.
개평마을을 이어주고 있는 돌담길
개평마을을 대표하는 고가, 일두 고택
일두 고택은 정여창 선생이 태어난 곳으로 개평마을을 대표하는 고택이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100년이 지난 후에 후손들이 중건했다. 무오사화?갑자사화로 유배와 죽음, 부관참시까지 우환이 이어졌으니 집안을 쉽게 일으키지는 못했을 터다. 고택에는 원래 17동의 건물이 있었지만 현재는 사랑채, 안채, 문간채, 사당 등 12동의 건물만 남아 있다. 사랑채와 안채는 조선 후기에 중수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고택 입구 솟을대문 안쪽으로 홍살문과 함께 붉은색 목판에 흰 글씨가 쓰여 있는 5개의 편액이 눈길을 끈다. 이 편액은 나라에서 하사한 충효 정려(旌閭, 충신?효자?열녀가 살던 고장에 붉은색을 칠한 정문을 세워 표창하는 일)로 집안의 자랑이자 자부심을 표현하는 하나의 징표다. 일두 정여창의 조부를 비롯하여 후손이 하사받은 정려가 무려 5개나 된다. 한 집안에서 정려를 5개나 받은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마당에 들어서면 높은 축대 위에 다부지게 올라앉은 사랑채가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충효절의(忠孝節義)'라는 글이 사랑채 벽면에 붙어 있다. 한지가 겹겹이 붙어 있어 세월의 흔적이 물씬 느껴진다. 한지에 쓰인 글자가 바래거나 해지게 되면 그 위에 다시 한지를 덧대어 똑같이 필사한다고. 일두 고택의 가장 큰 특징은 집 안에 석가산을 조성해놓았다는 점이다. 사랑채 누마루 앞에 조성한 석가산은 돌을 쌓아 만든 산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산에 흙과 돌, 물과 나무가 있듯이 마당 안으로 산을 끌어들여 자연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정원을 만든 셈이다.
사랑채가 남성의 공간이라면 안채는 여성의 공간이다. 남녀가 유별했던 조선시대에는 남녀의 공간이 확실히 분리되어 있었다. 안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일각문과 중문을 통과해야 한다. 넓고 밝은 안채는 금잔디가 깔려 있어 조선시대 폐쇄적인 여성의 공간이란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일두 고택 입구에는 일두홍보관이 새로 조성되었다. 일두 정여창의 생애와 업적 등을 둘러볼 수 있다. 일두홍보관에는 문화관광해설사가 상주하여 미리 예약하면 일두 고택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문의 및 예약 055-960-5555).
함양에서 만나는 일두 정여창의 흔적
함양에는 일두 정여창의 삶과 죽음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정여창의 고향인 개평마을을 둘러봤다면 선생의 흔적을 차근차근 되짚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화림동계곡에는 선비들이 시를 읊고 풍류를 즐기던 정자들이 즐비했다. 예부터 팔담팔정이라 하여 8개의 정자가 있었지만, 지금은 거연정, 동호정, 군자정만 남아 있다. 그 중 군자정은 일두 정여창이 자주 찾아와 시를 읊던 곳으로, 그를 군자로 추켜세우며 지은 정자다. 군자정은 이웃한 거연정의 아름다운 풍광에 가려 있지만, 안의를 거쳐 개평마을로 가는 길에 꼭 들러봐야 할 곳이다. 안의면 소재지 남강천변에 서 있는 광풍루는 조선 태종 때 선화루라는 이름으로 세워진 뒤 성종 때 일두 정여창이 안의현감으로 부임해 중수하면서 광풍루로 이름을 바꾸었다.
정여창의 위패를 모신 남계서원의 사당
영남 사림파의 희생이 컸던 무오사화는 일두 정여창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스승이었던 점필재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사초에 실리면서 김종직을 비롯해 김일손, 정여창, 김굉필 등이 죽거나 유배를 당했다. 일두 정여창은 목숨을 건져 유배길에 올랐지만, 결국 함경도 종성에서 숨을 거뒀다. 그의 시신은 제자들이 수습해 두 달이 걸려 고향 땅 함양으로 돌아왔다. 개평마을에서 약 4km 떨어진 승안산 자락에 일두 정여창의 묘가 있다. 동계 정온이 쓴 신도비와 함께 문인석, 망주석, 석양 등의 석물이 봉분 앞에 세워져 있다. 묘역 주변은 승안사라는 절터로 삼층석탑과 석불입상이 남아 있어 함께 둘러볼 수 있다.
일두 정여창의 위패를 모신 남계서원은 소수서원에 이어 두 번째로 건립된 서원이다. 흥선대원군 때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다. 경상남도에서 유일하게 훼철되지 않은 서원이다. 송암 강익과 동계 정온을 함께 배향하고 있는데, 송암 강익은 일두 정여창의 신원을 요청하고 남계서원을 건립한 인물이다. 동재와 서재를 누각 형태로 만들고 그 앞으로 작은 연못을 만든 것이 독특하다. 사당으로 오르는 계단 좌우에 선 커다란 배롱나무 두 그루가 한여름이면 분홍빛 자태를 뽐낸다.
갤러리
지역정보
가는길
중부고속도로 지곡IC → 24번 국도 우회전(함양로) → 지곡면사무소 삼거리에서 우회전 → 병곡지곡로 → 개평마을
※ 위 정보는 2012년 7월에 작성된 정보로, 이후 변경될 수 있으니 여행 하시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