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피카소(PABLO PICASSO)
활동년도 : 1881~1973
작가소개 : 금세기 천재화가라고 부르는 것에 그 누구도 토를 달 수 없는 화가일 것이다.
피카소는 1881년 스페인 말라가에서 10월 25일에 태어나서 1973년 92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왕성한 작품창작과 사회활동을 하였다. 그는 끊임없는 열정과 샘솟는 실험정신으로 미적 영역의 새로운 개념을 발굴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었으며, 새로운 입체파 회화를 창시하였다. 입체파 작품이라 하면, 하나의 화면에 단일한 시점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위에서도 보고, 아래서도 보고, 옆에서도 보는 등 다양한 시점으로 대상을 바라본 것을 하나의 화면에 함께 담은 그림들을 말한다. 기하학적 조형의 의미도 있겠으나, 다른 시점을 하나의 화면에 담아내었다고 하는 것은 대상을 해석하는 데에 여러 가지 관점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당시에는 놀라운 대상관찰(가치관)의 변화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입체파적? 시각, 다중의 시점으로 그려진 그림은 우리 민화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하늘에서 본 것 같은 지붕에 옆에서 본 담장이 함께 그려진 그림, 선비들이 서가의 뒤편에 걸어두었다고 하는 책걸이도 등은 서양의 원근법과는 거리가 멀며, 오직 관찰한 자가 그 대상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방식으로 그려진 것이다. 서양이나 동양이나 시점에 따라 같은 대상이 다르게 보이는 것에 대해 많은 관심이 있었던가 보다.
피카소는 1,2차 대전, 스페인내란 등 엄청난 격동과 전쟁, 변혁과 혁명기였던 20세기를 고스란히 살았다. 그는 모든 주제를 망라해서 작품화했으며, 또한 거의 모든 양식을 시험하면서 현대 미술의 모범이 되었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아비뇽의 처녀들(1970)》은 기존에 많이 다루어졌던 여신의 이미지로서의 여성이 아닌 사회에서 소외받던 창녀들이 주인공이 되어 문명화된 사회를 향해 울부짖는 분노와 슬픔을 표현하였다. 자연이 가지고 있는 3차원의 세계 즉 평면적 관점이 아닌 '원뿔, 원기둥, 구'로 상징되는 입체적 관점으로 처리하여 세잔의 회화적 비전을 현실화했으며 복잡한 다원적 공간을 아주 단순하고 축소된 기하학적인 그림으로 만들어 내어 당시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이 작품은 몇 달간 수백 장의 데생과 습작 끝에 그의 나이 26세 늦여름에 발표한 작품이다.
1937년 히틀러가 무차별 융단 폭격으로 바스크의 작은 도시 '게르니카'를 야만적으로 공격했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피카소는 24피트 너비 11피트의 《게르니카》를 완성했다. 게르니카는 파시즘 독재와 공포 앞에 의연히 맞선 분노의 외침이며 혁명으로써 피카소의 상징이 되었다. 그는"회화는 아파트를 장식하기 위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적과 대항하는 공격적이고 방어적인 전쟁의 도구"라 외쳤다.
그가 한국전쟁에 대해서 그린 그림은 게르니카만큼 우리에게 유명하다.
《한국의 대량 학살》이라는 작품은 우리네 전쟁의 상처와 고통을 함께 나누며 전쟁의 야만성을 고발했던 그를 우리와 더욱 가깝게 해준 작품이다.
피카소는 당시 진보적인 문화예술인들과도 가깝게 지냈으며 1944년 10월 10일에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하여 더욱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20세기를 관통하는 하나의 이념인 사회주의, 공산주의 이념에의 관심이 그의 공산당 입당이라는 행보를 가능하게 하였다. 또한 1962년에는 레닌 평화상을 두 번째로 수상하게 된다.
그는 살아 생전에 거의 50,000여 점의 작품을 생산했다. 회화가 1,885점, 조각이 1,228점, 도자기가 2,280점, 동판화가 18,095점, 석판화가 6,112점, 리놀륨 판화가 3,181점, 149개 드로잉 노트, 스케치 4,659점을 남겼다. 이는 그가 연필을 잡았던 시기를 2세로 상정해서 90년 동안 작품을 생산해 내었다 하더라도 하루에 1.5개의 작품을 생산해 낸 것이니 이는 실로 방대한 양이다.
혹자들은 그의 그런 열정을 그가 수없이 염문을 뿌렸던 여성들에 빗대어 "남성 예술가는 효과적이고 우수한 것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여성의 힘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말로써 마치 예술에 있어서 여성의 역할을 숭상하는 듯하지만 결국은 여성을 주체로 인식하기보다는 객체로, 예술의 조력자 정도로만 인식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그의 작품의 방대성이 증명하듯이 그의 미술관은 세계 곳곳에 있다.
스페인의 바로셀로나에 있는 그의 미술관을 방문했을 때 그 곳에는 그의 어린 시절의 작품들이 즐비했다. 심지어는 수업시간에 교과서에 낙서처럼 그린 그림까지도 잘 보존해서 전시되어 있었다.
내게 그것은 신선했다. 우리는 훌륭한 예술가들의 예술작품 중에 그 대표작만을 접하게 되는데 그 대표작이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수없이 많은 습작과 과정이 있을 터인즉, 그 과정을 후세대가 볼 수 있다는 것 또한 많은 공부가 된다.
천재는 어릴 때부터 아주 훌륭했다고들 하는데 어디 한번 볼까? 하는 심사로 방문한 피카소 미술관에서 확인한 것은 '날 때부터의 천재'가 아닌 그림을 좋아해서 쉴새없이 그림을 그리고, 연구했던 젊은 피카소였다.
인체소묘를 하며 부족한 부분을 다시 고쳐 그리고, 교과서에 선생님의 얼굴을 그린 것을 보았을 때는 우리 어릴 적 수업시간에 손장난하던 것이 떠올랐다. 그것이 더욱 피카소를 천재 피카소가 아닌 인간 피카소를 만나게 하는 듯 했다. 끊임없이 노력할 줄 알았던 피카소를 만난 것이다.
"15살짜리 피카소 앞에 서 있다. 표현기법, 명암법, 서툴러 보이나 예사롭지 않다. 과연!"이라 적은 스케치북에 적었다. 쉬지 않고 그렸다는 느낌, 피카소의 자신감은 작업량에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피카소는 대가들의 작품을 재해석하는 데에도 열성을 보였는데 들라크루아 《알제의 여인》 14점, 벨라스케스 《메닌느가의 사람들》 44점, 그리고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 27점등 과거 대가들의 그림을 해체하고 재조립함으로써 과거와 대화를 나누었다.
또한 한 개의 풍경을 피카소는 점묘법으로, 아카데미즘한 기법으로, 인상파적 기법 등 당대 이전의 기법으로 한 풍경을 모두 그려낸 것을 보면서 피카소의 미술공부법과 새로운 조형언어를 창출해 내기 위한 그의 과정이 참으로 치열했음을 느끼게 되었다. 그의 그런 조형실험들이 후에 그의 유명한 입체파적 그림을 만들게 된 과정까지 닿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아프리카 원시미술에 관심을 갖고 그 생명감 넘치는 조형의식을 적극적으로 자신의 작품에 활용함으로써 새로운 조형성을 창출했으며, '천재적 넝마주의'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기존의 미술재료가 아닌 철물점 등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로 타블로오브제나 파피에 콜레 등을 애호하였다. 이런 마티에르 등이 주는 낯설음의 효과가 또 하나의 가능성을 열어주어 그림의 고정관념을 깨는 데에도 열과 성을 다하였다. 천재란 날 때부터 무언가를 가지고 태어나는 데 그것은 지칠 줄 모르고, 노력할 줄 아는 특출한 재능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그는 40세에 대단한 부자였으며 65세 이후에는 자수성가한 억만장자였다.
그렇게 한 시대를 화려하게 풍미하며 살았던 피카소지만 그의 유언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진정으로 예술을 고민하던 한 예술가의 슬픈 모습이다.
"예술이 더 이상 진정한 예술가들의 자양분이 될 수 없었던 뒤부터, 예술가들은 자신의 재능을 자신들의 환상이 만들어 내는 온갖 변화와 기분을 위해 사용했다. 지적 야바위꾼들에게는 온갖 가능성이 열려 있었으니까.
대중들은 예술 속에서 더 이상 위안도, 즐거움도 찾지 못했다. 그러나 세련된 사람들, 부자들, 무위도 식자, 인기를 쫓는 사람들은 예술 속에서 기발함과 독창성, 과장과 충격을 추구했다. 나는 내게 떠오른 수많은 익살과 기지에 경탄을 보내면 보낼수록, 그들은 점점 더 나의 익살과 기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오늘날 명성뿐만 아니라 부도 획득하게 되었다. 그러나 홀로 있을 때면, 나는 나 스스로를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술가로 생각하지 않는다.
위대한 화가는 조토와 티치안, 렘브란트와 고야 같은 화가들이다. 나는 단지 나의 시대를 이해하고 동시대의 사람들이 지닌 허영과 어리석음 욕망으로부터 모든 것을 끄집어낸 한낱 어릿광대일 뿐이다."
피카소가 남긴 이 유언은 1952년 5월 2일 마드리드에서, 그 다음에는 유명한 이탈리아 예술 비평가인 조반니 파피니(Giovanni Papini)의 책 《리브로 네로》를 통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유언에는 이 혹독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하든 생존해 가야 하는 예술가들의 씁쓸한 뒷모습이 담겨 있다.
작품명 : 첫 성찬식
제작년도 : 1895-96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바르셀로나 피카소 미술관
작품설명 :
작품명 : 자화상
제작년도 : 1901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73.5x60.5cm
소장위치 : 개인소장
작품설명 :
작품명 : Pere Manyac
제작년도 : 1901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미국 워싱턴 국립미술관
작품설명 :
작품명 : 자화상
제작년도 : 1901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73.5x60.5cm
소장위치 : 개인소장
작품설명 :
작품명 : 깃털장식 모자를 쓴 여인
제작년도 : 1901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46.7x38.3cm
소장위치 : McNay Art Institute, San Antonio, TX
작품설명 :
작품명 : 얼룩무늬의 타이츠를 입은 중세 무언극 등의 어릿광대
제작년도 : 1901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작품설명 :
작품명 : 푸른방
제작년도 : 1901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워싱턴 개인소장
작품설명 :
작품명 : 14번째6월 몽마르트
제작년도 : 1901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뉴욕 개인소장
작품설명 :
작품명 : 자화상
제작년도 : 1901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73.5x60.5cm
소장위치 : 개인소장
작품설명 :
작품명 : 자화상
제작년도 : 1901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73.5x60.5cm
소장위치 : 개인소장
작품설명 :
작품명 : 환기
제작년도 : 1901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150.5x90.5cm
소장위치 : 파리 현대미술관
작품설명 :
작품명 : 삶
제작년도 : 1903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클리브랜드 미술관
작품설명 : 이 작품은 1901-1904년 까지의 피카소의 [청색시대]의 가장 복잡하고 큰 작품이다.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그려진 작품 [La Vie(인생)]은 20세기의 영향력있는 시각예술가의 회화, 소묘, 판화, 조각 그리고 놀랄만한 작품들중에서도 핵심이 되는 작품중의 하나로 남아있다
이 시기 젊고 감수성이 예민하였던 피카소는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 세기말의 암울한 분위기에
영향을 받는데, 이로서 그의 작품이 전체적으로 청색이 감도는 어둡고 침울하고 내성적인 분위기를 띠게 된다.
이 작품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피카소의 인간에 대한 관심은 일생동안 지속된다.
피카소는 이러한 경험으로 육체적 사랑의 허무함을 담은[인생]이라는 작품을 그린것으로 추측된다.
구도에서 인물들이 적어도 두번 바뀐 이 작품을 위해 피카소는 4장의 스케치를 했다. 망또를 걸친 여인은 처음에는 턱수염이 난 남자였다.
남자의 경우, 원래는 피카소 자신의 자화상으로 그려졌지만 나중에는 그의 친구인 카사헤마스의 얼굴로 변했다. 카사헤마스는 피카소의 동료화가로 애인 제르맹의 변심때문에 자살한 사람이다.
남자에 기대있는 왼쪽의 여인이 제르맹으로 여겨지며 망또를 입은채 오른쪽의 아이를 안고있는 여인은 케사헤마스의 어머니이다.
양쪽 인물들의 사이에 보이는 배경의 위쭉에 그려진 그림은 고갱풍으로 그려졌으며 아래쪽 여인은 고호풍으로 그려졌다.
그의 청색시대의 주요한 모티브인 남녀간의 육체적 사랑과 모성애를 통해 인생의 단면을 그려내고 있다.
작품명 : 해변의 가난한사람
제작년도 : 1905-10
작품재료 : 캔버스에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워싱턴 국립미술관
작품설명 :
작품명 : 망토입은 자화상
제작년도 : 1901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81x60cm
소장위치 : 파리 피카소 미술관
작품설명 : 피카소는 20세였으나 이 자화상에는 무척이나 나이 든 모습으로 표현했다. 푹 꺼진 볼, 텁수룩한 턱수염, 넋이 나간 듯한 두 눈은 인생을 관조하는 듯한 인간의 고독과 고뇌를 웅변해 준다.
작품명 : 압생트 마시는 사람
제작년도 : 1902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개인소장
작품설명 :
작품명 : 두형상
제작년도 : 1904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개인소장
작품설명 :
작품명 : 다름질하는 여인
제작년도 : 1904
작품재료 : 캔버스에 유채
작품크기 : ***
소장위치 : 개인소장
작품설명 : 1901년 피카소가 파리를 떠나기 전 이 <다림질하는 여인>을 제작하여 사바르테스에게 헌정했다. 피카소는 이 시기에 있어서 화면 구성에 큰 변화가 있었다. 왼 쪽 어깨를 강조한 것이 마치 사원 실내의 건축적 구조와 같다. 이러한 이유로 이 그림은 '청색 시대'의 한 기념비 적인 작품으로 되었는데, 왼쪽 팔의 만곡이 작품의 깊이를 효과 있게 하고 있다. 여인은 매우 피곤 하다. 여인의 눈은 장님과도 같이 보인다. 그러나, 여인은 이상하리만큼 씩씩한 모습을 하고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놀라게 한다. 피카소의 극과 극의 융합 능력을 볼 수 있는 좋은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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