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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산행 르포 | 함백산

문성식 2012. 11. 2. 21:34
[눈길산행 르포 | 함백산] 착한 흰수염고래의 속삭임을 따라가다
만항재~창옥봉~함백산~은대봉~두문동재~터널 입구 10.8km
▲ 은대봉에서 두문동재로 이어진 대간길, 늙은 분비나무 한 그루가 홀로 푸른 잎을 틔우고 섰다.

감각이 살아난다. 자동차 문을 열자 깡패 같은 추위가 와락 덮친다. 얼음 방망이로 매질을 하는 추위에 잠에 덜 깬 감각이 화들짝 정신을 차린다. 따뜻한 히터에 의지하던 육체가 섭씨 영하 12도의 설산에 던져진 것이다. 자연은 살아남을 자신이 없다면 돌아가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따스한 곳에 조금 더 머물고픈 나약한 마음을 버리자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인다. 후각이 되살아난다. 미세한 소리도 놓치지 않는 청력이 되살아난다. 야생의 감각이 깊은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감각을 깨운 건 우리나라에서 차로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고개, 만항재다.


GPS로 확인한 고도는 1,240m, 웬만한 산꼭대기보다 높은 데서 산행을 시작한다. 태백의 오지전문 산꾼 김부래(72)씨는 “여기서 이 정도는 추운 것이 아니다”라며 “이번 겨울은 따뜻하다”고 말한다. 지금은 스스로 “글을 쓰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20년 가까이 여러 산악잡지에 오지산행 기사를 연재해 왔다. 나는 그의 원고를 담당하는 기자로 거의 6년을 함께했다. 그의 글 속에서 무수히 많은 산을 동행했지만 함께 산행해 보기는 처음이다. 숲 해설과 산행 가이드가 직업인 그는 고희를 넘겼지만 여전히 쌩쌩한 현역 산꾼이다. 맛깔나게 산행을 글로 풀어내던 그의 스타일처럼, 지금도 말씀이 많으시다.


▲ 1 함백산 정상. 군부대와 각종 중계탑이 있지만 화끈한 경치를 즐기기에 부족함 없다. 2 창옥봉 언저리에서 본 함백산 정상.

그의 얘기를 귀담아 듣기도 하고 앞서가기도 하는 이는 아이더 검단산점 점장인 안명선(39)씨와 한국외대산악부 홍승기(21·버그하우스)군이다. 홍군은 한양공고 산악부 시절 백두대간을 56일 만에 일시종주했으며 한북정맥과 금북정맥, 한남정맥, 한남금북정맥을 일시 종주했다. 아직 우리나라에서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대간과 정맥을 모두 일시종주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으며, 지난해 아이거 북벽을 박희용(아이스클라이밍 세계 1위)과 함께 올랐다. 장거리 산행과 알파인 등반에 모두 능한 보기 드문 젊은 산악인으로 올 봄 특전사 입대를 기다리고 있다.


한백산은 태백산의 산
대간 길답다. 색색으로 수북이 걸린 표지기가 산 입구를 분명하게 알려준다. 러셀이 되어 있어 탄탄대로다. 굳어 있던 일행의 표정에 미소가 돌며 분위기가 가벼워진다. 러셀하느라 진 뺄 것 없이 여유롭게 산을 즐길 수 있다. 긴장을 가져오던 걱정스러운 설경에서 아름다운 순백의 설경으로 바뀌는 건 한순간이다.


사람의 발이 닿지 않은 순수한 여백은 보는 것만으로 감미롭다. 볕을 받아 보석보다 화려하게 반짝이지만 비싸지 않아 누구에게나 발자국을 남기게 한다. 순수하여 사람이든 짐승이든 바람이든 한번 지나가면 그 흔적을 잊지 못한다. 기억을 잊는 법은 두 가지가 있어, 눈으로 다시 덮어버리거나 따스함에 녹아내리면 그를 잊을 수 있다.


▲ 만항재에서 정상으로 이어진 대간 능선길. 고래등처럼 매끈한 눈길 뒤로 대간의 첩첩 산줄기가 펼쳐진다.

대간꾼마냥 도로가 있는데도 능선을 고집해 창옥봉을 넘는다. 숲을 걷다 돌담이 있는 데서 툭 터진 세상을 만난다. 거구의 흰수염고래가 세상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흰 몸에 둥글고 여유로운 선을 가진 정감 가는 거구, 함백산(1,573m)이다. 우리나라에서 여섯 번째로 높은 산이지만 교만하거나 과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넓은 품으로 다 끌어안는다. 꼭대기는 군부대와 중계소들에 터를 내주었고, 오른쪽 태백으로 스키장을 내주었고 여러 개의 터널을 허락해 사람이 지나기 편하게 해주었다. 탄광으로 속도 다 내주었으니 덩치만큼이나 너그러운 아량을 가진 착한 산인 것이다. 그런 마음 씀씀이 덕분에 부처 사리를 모신 정암사가 들어선 것일 테다. 


정암사가 함백산에 있음에도 태백산 정암사라 하는 건 예부터 높이는 함백이 더 높지만 모두 태백산에 속한 봉우리라 보았기 때문이다. 함백산은 대박산이라 불린 기간이 더 길다. 산경표와 대동여지도에 ‘크고 밝은 뫼’란 뜻으로 대박산으로 나와 있고 묘범산, 묘고산, 수미산, 작약산, 한밝뫼, 한배달 등으로 부르기도 했다. 허목의 〈미수기언〉에 보면 ‘태백산은 신라 때 북악인데 문수, 대박의 두 봉우리가 있고 우보산, 우검산, 마읍산, 백산 등이 다 태백산이다’고 했다.


선수촌으로 이어진 도로를 지나 본격적으로 착한 고래의 등을 오른다.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자 선물처럼 펼쳐지는 하얀 능선이다. 키 작은 철쭉과 분비나무가 트인 시야를 선사한다. 분비나무는 구상나무와 닮았으며 크리스마스 트리로 삼고 싶을 정도로 균형 잡힌 깔끔한 맵시다. 정상은 고래등처럼 부드럽고 펑퍼짐하다. 키큰 나무가 없어 달의 표면처럼 둥글고 환하게 열려 있다. 전망에 마침표를 찍는 건 미니 첨성대처럼 돌탑을 쌓은 정상 돌무더기다.


▲ 1 창옥봉 지나 정상으로 이어진 오르막 길. 태백 선수촌으로 이어진 길이 산을 휘감아 돈다. 2 은대봉에서 두문동재로 내려서는 대간길. 굽이도는 두문동재 도로가 보인다. 터널이 생겨 통행하는 차가 드물고, 겨울엔 적설량이 많아 차량 통행이 어렵다.

두문동재 쪽 내리막에서는 썰매 타기
산행하기에 축복받은 날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하늘이 좋다. 물감을 칠해 놓은 듯, 깨끗한 파랑이다. 파노라마로 웅장한 산 그림이 펼쳐진다. 흰 눈을 덮고 누운 산등성이들의 선이 곱고 신비롭다. 시선을 멀리 둘수록 산은 단순하게 생략하는 과감한 기법을 선보인다. 매봉산, 태백산, 민둥산, 소백산까지 모두 이곳에서 하나의 작품이다. 신이 만든 신성한 걸작이다.


중함백산 가는 길, 주목이 장수처럼 서서 아직 죽지 않았다며 힘자랑을 한다. 원래 주목보호를 위해 철조망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없애 자연 그대로다. 내려서니 아프리카 바오밥 나무처럼 생긴 커다란 주목이 앙상한 나무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초록을 틔우며 세월을 거스르고 있다. 숱한 바람을 견딘 거목의 단단한 기운이 눈 덮인 땅을 꽉 붙잡고 있다. 영웅처럼 눈에 띄는 주목 주변에는 신갈나무들이 여백을 메우고 있다. 신갈나무는 평범해 보이지만 강한 생존력과 많은 도토리로 야생 동물에게 도움을 주는 우리 산의 대표적인 나무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뒤에서 노랫소리가 계속 들린다. 트인 곳에서 보니 태백 오투리조트의 슬로프 꼭대기에서 스피커를 통해 음악이 흘러나온다. 스키장이 한창 성수기일 때지만 리프트는 멈춰 있다. 슬로프 한 쪽은 아예 눈이 없는 곳도 있다.  김부래씨의 말에 따르면 막대한 예산을 퍼부어 태백시에서 스키장을 만들었지만 이용객이 없어 거의 망하다시피 했단다. 운영을 하고는 있지만 슬로프 한 곳만 가동하고 있단다.


▲ 1 헐벗은 신갈나무들이 겨울산의 낭만을 완성한다. 2 두문동재로 이어진 내리막에서 홍승기군이 신나게 엉덩이 썰매를 탄다.

은빛 자작나무숲이 은대봉에 온 걸 환영하고 있다. 겨울 숲의 순결한 정령 혹은 <안나 카레니나>의 처연한 귀부인을 닮았다. 잎사귀 하나 없이 알몸으로 서 있으나 도도한 은빛을 잊지 않는다. 겨울 앞에 몸도 마음도 꽁꽁 싸매고 선 인간들이 무언가에 쫓기듯 숲을 떠난다.


자작나무샘터에 자작나무가 없다. 영화 ‘닥터 지바고’의 한 장면처럼 라라를 태운 마차가 달릴 때 끝없이 펼쳐지던 새하얀 숲은 없다. 대신 자작나무과의 사스래나무와 거제수나무가 있다. 김부래씨는 등산객들의 착각으로 ‘자작나무샘터’란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넓게 보면 자작나무과이니 꼭 잘못된 건 아니다. 


숲 속 헬기장은 은대봉 정상이다. 달콤한 경치는 없지만 둘러앉아 숨을 돌리고 담소를 나누기 좋다. 작고 귀여운 표지석이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다며 인사한다. 두문동재로 내려서는 길에서 썰매를 탄다. 앉자마자 상상 못한 속도로 미끄러진다. 짜릿함에 환성이 절로 터진다.


은대봉 숲이 끝나는 곳에서 새로운 세상이 기다린다. 트인 하얀 벌판과 옷을 훌훌 다 벗고 선 대간 줄기. 부드러운 여인의 곡선을 그리며 누워 있다. 춥지도 외설적이지도 않아 보이는 건 한 점 꾸밈없이 다가오는 자연의 타고난 솔직함 때문이다. 가을산이 아름답다면 겨울산은 감동적이다. 두문동재에서 착한 흰수염고래의 매끄러운 등을떠난다.


▲ 1 함백산 정상의 암릉 지대. 겨울산행의 감동을 전해주는 달콤한 경치가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2 아담한 표지석이 있는 은대봉 정상.

산행 길잡이  함백산은 겨울산행이 두려운 초보자에게도 너그러운 겨울산이다. 적설량이 많아 1~2월 대부분 설경을 볼 수 있는 것도 좋지만 1,200m가 훌쩍 넘는 만항재까지 차로 오를 수 있다는 것이 이점이다. 대간 능선에서 바로 산행할 수 있으며 정상 직전 오르막을 제외하면 대체로 경사가 부드러운 편이라 적설기 산행치곤 수월한 편이다. 중요한 건 러셀 유무인데 대간길이라 찾는 사람이 많아 대체로 러셀이 되는 편이다.


만항재에서 함백산과 은대봉을 거쳐 두문동재까지 8.7km, 5시간 걸린다. 두문동재는 도로지만 겨울에는 차량 통행이 어려운 경우가 많다. 대체로 정선 고한 방향으로 하산하는데 두문동터널 입구까지 2.1km에 30~40분 정도 걸린다. 두문동재까지 종주가 마땅찮을 경우 자작나무샘터 사거리에서 고한 방향으로 하산할 수 있다.


교통  원점회귀 산행을 할 수 없는 직선으로 뻗은 산줄기다. 만항재에 차를 세워놓고 두문동재 터널 고한 방향 입구에서 택시를 타고 만항재로 돌아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한택시(033-592-5050, 591-8181)를 부를 경우 콜비 1,000원이며 만항재까지 1만5,000원 정도 나온다. 버스는 고한에서 만항마을까지 1일4회(06:40, 09:50, 14:10, 19:00) 운행한다.


숙식(지역번호 033)  만항재에 식당이 몇 곳 있으며 백숙이 유명하다. 할매닭집(591-3136), 밥상머리(591-2030), 산골닭집(591-5007), 만항식당(591-5196), 웰빙한방마을(592-1380) 등이 있다. 만항재 정상에는 만항재야생화쉼터가 있으며 감자전, 메밀전, 오뎅, 동동주 등의 메뉴가 있다.


만항재에는 민박이 없으며 태백이나 고한에서 숙박을 해결하는 것이 좋다. 경제적인 숙소로는 태백시에서 운영하는 태백고원자연휴양림(582-7440)이 있다. 태백시내에서 가까워 편하다. 주말기준 7평형 4만 원, 10평형 5만 원, 14평형 8만 원이다. 야영데크는 4,000원이다. 태백에는 이마트를 비롯 식당이 많으며 24시간 식당으로 춘하추동 해장국(553-4744), 24시해장촌(553-3337)이 있다.
※ 특별부록 지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