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여행 정보

태화산

문성식 2012. 11. 2. 21:32
[꽃남 한승국의 조곤조곤 산행기 | 태화산] 앙상한 가지 사이로 펼쳐진 눈부신 은빛 세상
영춘면 상리~1,031m 봉~정상~고씨굴…남한강 조망에 연속 감탄

강원도 산간지방에 눈이 내리겠다는 일기예보를 들으면 금세 눈에 그려지는 설경이 아름다운 산들이 있지요. 설악산, 태백산, 계방산, 백덕산, 선자령…. 근데 이 산들은 너무나 유명하고 겨울에만도 여러 번 여러 코스를 다녀와서 머릿속 그림은 좋아도 일부러 다시 가보고 싶다는 데까진 마음이 동하지 않습니다.

강원도엔 다른 산들도 많이 있지요. 사실 강원도 산들은 최소 해발 1,000m는 넘어야 얘기할 만하고요. 그런 높이의 산이 68개나 있어 아직까지 새로운 맛을 느끼며 타는 데는 이상이 없습니다. 이번에 제가 다녀온 영월 태화산(太華山)도 그 중 하날 거라 생각하고 다녀왔는데, 막상 가보니 정상부가 충북 단양군과의 경계인 데다, 눈마저 별로여서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지요.


▲ 태화산으로 연결되는 참나무 숲 능선 길에서 뒤돌아 본 풍경. 이 등산객 등 뒤로 동그마니 솟은 봉우리가 1,031m봉입니다.
이번에 따라간 ㄷ산악회는 휴대폰 문자로 산행 안내를 보내올 때마다 대장님의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가 떠올라 더 친근함을 느끼지요. 그런데 이날은 버스가 들머리인 단양군 영춘면 상리를 가면서 계족산 쪽으로 잘못 들어가질 않나, 어쩐 일로 보조 대장이 두 명 다 결석한 데다 정작 상리에 도착해서는 정규 등산로를 버리고 작은 계곡 길로 접어들어 1시간 넘게 게릴라 산행을 하질 않나, 준비성이 많이 부족해 우리를 안타깝게 했습니다.

TV에서 보던 강원도 산악지대의 그 많은 눈은 볼 수 없고요, 음지쪽에 얇게 깔린 정도라 버스 안에서 착용했던 스패츠는 벗어버리고, 아이젠만 찬 채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희미한 길로 이어지던 작은 계곡이 금방 잡목이 우거진 가파른 산비탈로 변해 우린 나뭇가지들을 싸잡고 올라가는 수밖에요. 산길이란 이렇게 생긴다는 걸 보여주기라도 하듯 30여 명이 지나온 자리는 우리가 처음 올랐던 길보다 더 선명하게 새 길로 변합니다.

그렇게 한 시간쯤 잡목 숲을 헤치고 오르니 약간의 공간과 함께 소나무 숲이 나옵니다. 어디부터가 주능선일까 가늠해 보지만 여기선 알 수 없습니다. 대신 잠시 뒤를 돌아보니 앙상한 잡목 가지 사이로 눈부신 은빛 세상이 펼쳐져 탄성을 지르고 맙니다. 남한강 주변 엷게 눈이 쌓인 반듯한 들판이 햇살을 받아 조명 비추듯 이 산자락으로 반사광을 쏘아주고 있는 겁니다. 바람이 불며 나뭇가지에 쌓인 눈가루를 떨어대기에 더 눈부신 풍경.

▲ 상당한 거리를 ‘알바’했지만 이런 경치 때문에 우린 다 용서하고 즐거워했지요.
우리는 여전히 길 없는 산언저리를 게릴라들처럼 오릅니다. 곳곳에 툭툭 부러진 소나무 가지들. 어떤 곳에는 아예 등걸 아랫부분이 꺾어져버린 것들도 보입니다. 이곳도 아마 지난 초겨울 남설악 곰배령처럼 첨엔 비로 오다 눈으로 변해 얼어붙는 바람에 그 무게를 견디다 못해 이 지경이 됐을 것입니다. 잘못 보면 누가 도벌한 것 같지만 사람의 힘이나 기계로는 저렇게 젓가락을 꺾듯 잘린 부위가 자연스레 어긋나게 하지는 못하지요.

병풍 같은 암벽과 파란 하늘

길이 다시 희미하게 보여 이제 제대로 등산로를 찾았나 했는데 따라 오르니 이번엔 누구의 묘지입니다. 봉분의 크기에 비해 주변을 잘 닦아놓아서 다들 여기서 쉬었다 오릅니다. 어느새 후미가 된 저도 잠시 엉덩이를 붙이고 앉으니 자연 바라다 보이는 것이 아래쪽과 저 멀리 건너편입니다. 아래쪽이야 이제껏 마냥 잡목 숲이지만 건너편은 바로 소백산 줄기로 근래 보기 드문 훌륭한 산맥 파노라마를 연출해 눈을 고정시킵니다.

후미 몇 사람을 불러서 우리끼리 그룹을 만들어 잠시 요기라도 하고 가자고 권하니 꾸물꾸물 시간을 조금 벌어줄 뿐 동조를 안 해줍니다. 아침에 산악회에서 나눠준 김치 주먹밥을 두어 입 떼 먹고는 바로 일어나 다시 비탈길을 오릅니다. 출발한 지 벌써 시간 반 남짓. 저 앞쪽에 작은 병풍 같은 암벽이 나오며 그 위로 파란 하늘이 펼쳐 있습니다.

▲ 1 오전 11시경 출발, 지도상 897m봉으로 보이는 여긴 오후 1시경 도착했지요. 저 이정표 아래에 앉아서 점심을 들었지요. / 2 사실상 태화산의 최고지점인 1,031m봉을 향해 오르는 회원들. 능선 상에 몰린 눈은 나중에 무릎까지 빠질 정도였지요. / 3 너무 뒤처지면 이런 모델들 없이 덩그러니 표지석만 찍을 뻔 했지요. 해발 1,027.4m 태화산 정상 충북 단양군입니다.
아마도 저기가 능선이겠지. 앞서 가던 두 명이 그 마루금 위로 오르며 마치 승천이라도 하듯 모습을 감춰버립니다. 뒤따라 올라서니 능선길이 맞습니다. 이들이 막 급경사를 올라왔으니 좀 쉼직도 한데 그냥 올라가버려 제게는 사라져버린 것처럼 보였고요.

유일하게 쉬고 있던 먼저 온 여자 회원 한 명도 내가 오르자마자 바로 출발해버려 혼자 남겨집니다. 능선에서부터는 눈이 제법 쌓여 있네요. 아이젠이 성능을 발휘할 차례죠.
간간이 구름을 띄운 파란 하늘이 무척 마음에 듭니다. 이렇게 환한 햇살이 비추는 데선 추위도 한 풀 꺾이기 마련이죠. 제 앞에 사람들이 보이지 않아도 이제부터는 제대로 난 등산로를 따르므로 걱정스럽진 않습니다.

897m봉에 다다르니 벌써 오후 1시. 먼저 와 점심을 드는 회원들이 있어 저도 함께 아까 먹던 주먹밥을 꺼내 먹습니다. 아내가 싸준 보온병에 넣어온 뜨거운 콩나물 국물이 아주 뱃속을 든든하게 만들어 줍니다. 과일도시락까지 꺼내 단감과 사과를 디저트로 들고는 먼저 일어섭니다.

제가 걸터앉았던 좌대가 이정표 지지대라 올려다보니 우리가 올라온 쪽으로 휴석동 3.79km, 북쪽으로 태화산 정상 1.5km라 쓰여 있습니다. 들머리 상리 쪽이 휴석동이라면 아직 10리를 채 못 왔고, 앞으로 3리를 더 가야 정상입니다. 물론 그 전에 1,031m봉을 먼저 오르겠지요. 능선 길은 발이 약간 빠질 정도의 적설량을 보입니다.
영춘면 상리~1,031m 봉~정상~고씨굴…남한강 조망에 연속 감탄
드디어 오른쪽 능선 아래 잡목들 사이로 영월을 지나 달리는 뱀처럼 휘어지며 충주로 향하는 남한강 줄기가 조망되기 시작합니다. 빠드득 뽀드득 눈 밟는 소리 참 좋습니다. 외형적으론 특징 없는 눈길이지만 마음이 자꾸 가서 카메라에 담아도 봅니다. 해를 등져서인지 제 그림자까지 찍히는군요. 눈 위의 제 그림자를 밟고 가는 기분 색다르고요. 능선 길은 정직하게도 직선을 이룹니다. 높낮이만 다르게 방향을 꺾기도 하며 1,031m봉으로 나를 안내해 줍니다.
잡목에 둘러싸인 1,031m봉은 표지석도 없고 조망마저 별로라서 저 역시 그냥 통과합니다. 이제부터 길은 등산화가 푹푹 빠질 정도로 눈이 많습니다. 또 혼자로군요. 단체를 따라 왔지만 정작 이렇게 혼잡니다. 산에서는 많은 걸 배우게 되죠. ‘땀 흘려 올라야 정상의 기쁨을 맛본다’는 건 ‘고진감래’일 거고요. ‘높이 올라야 멀리 볼 수 있다’는 것과 ‘골이 깊으면 산도 높다’는 것 등. 저는 한 가지 더 ‘이렇게 우리가 다 함께 사는 것 같아도 결국은 각자가 따로 산다’는 겁니다. 산에는 나무들이 의좋게 모여 사는 것 같으나 다른 종들끼리 견제하고 경쟁하며 점령하려 하고 동종끼리도 서로 웃자라려고 애쓴다는 거, 그리고 오늘 저처럼 자기 능력에 따라 산을 타게 되는 것도요. 말 같지 않을지 몰라도 제 딴은 이런 생각들로 머릿속이 가득합니다.

▲ 지능삼거리 전망대에서 바라본 계족산 쪽 풍경. 여기서 90도로 방향을 바꾸어 내리꽂는 고씨동굴 길로 하산했습니다.
정상으로 향하는 내림길에서 처음으로 반대편에서 오는 다른 등산객 한 팀을 만납니다. 서너 명 팀인데 역시 얼굴에 복면까지 두른 중무장들입니다. 이때를 놓칠 수 있나요. 이들을 모델 삼아 사진부터 찍습니다. 마침 정상부가 등 뒤로 동그마니 배경을 이루어줘 그림이 좋습니다.

드디어 1시 방향으로 태화산 정상이 나타납니다. 해발 1,027m. 산 이름과 해발 높이를 적은 두 개의 표지석이 나란히 서서 우리를 반겨 줍니다. 동쪽 세로형 화강암 표지석은 강원도 영월군에서, 서쪽 까만 대리석 표지석은 충북 단양군에서 세워놨습니다. 두 지자체가 이렇게 서로 주봉이 우리 쪽 것이라 주장하며 낭비하지 말고 차라리 협상을 해서 이 봉과 아까 지난 1,031m 최고봉을 나누어 가지면 어떨까 싶습니다. 마치 경기도 포천군과 가평군이 운악산 정상부 두 봉우리를 각기 정상으로 부르듯이 말입니다. 그게 더 헷갈리게 한다고요? 그러면 그냥 두든지요.

전망 좋은 데서 사진 찍으며 절경 즐겨

정상에서부터 우리가 하산할 고씨동굴까지는 5.7km 거리. 아까 1,031m봉에서 이곳 정상까지 올 때처럼 큰골이라 재를 하나 내려갔다가 동북쪽 건너편 1.025m봉을 넘어서 태화산성 터를 앞둔 고개에서 동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각동리 620m봉을 통과하자마자 동쪽으로 급강하, 남한강을 끼고 난 고씨동굴 입구 상단으로 빠지게 됩니다.

신기한 것은 처음 897m봉에서 본 1,031m봉, 그리고 1,031m봉에서 본 주봉, 그리고 주봉에서 보는 1,025m봉 풍경이 서로 다 비슷한 거 있죠. 그래서 태화산은 능선상에 표지석만 없다면 어느 봉이 무슨 봉인 줄 분간하기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 봉우리 사이사이 고만고만한 재가 하나씩 존재하는 것까지도요.

이제부터 다행인 것은 앞서 간 팀들이 길을 잘 다져놓은 점입니다. 근데 이게 곧 큰 화근이 될 줄은요. 정상에서 만난 회원 네 명이 한 조를 이루어 길을 따라 가는데 큰골입구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틀어지며 만난 언덕 위 두 갈래 길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에 빠지게 된 겁니다. 지형으로 보아선 북쪽이고, 발자국 수를 보아선 동쪽인데 결정하기가 참 애매합니다. 지도를 꺼내 봐도 그래서 제가 저 뒤에 대장님이 곧 오니까 그 지시를 따르자고 진행을 만류합니다. 큰 소리로 길을 물은 즉 대장님은 북쪽으로 가라고 합니다.

감질나 하던 회원들이 재빨리 그쪽으로 사라집니다. 저는 이 길이 아무래도 발자국 수도 적은데다 앞으로 만나야 할 태화산성 터가 있어 보이지 않아 뒤따라온 대장님에게 다시 한번 확인을 부탁해 봅니다. 30여 m 전진하던 대장님은 그때서야 마침 정면 남한강 건너로 나타난 영월화력발전소를 발견하더니 아차 싶은지 회원들에게 후퇴를 지시합니다. 그리고 길을 되돌아올라 아까 갈림길에서 반대쪽으로 새 길을 개척합니다.

▲ 태화산 개념도
우리가 이 갈림길 훨씬 이전 능선 상에서부터 길을 잘못 든 것입니다. 정상에서 계속해서 오른쪽으로 남한강을 낀 절벽 능선 길로 가야 하는데 1,025m봉을 에둘러버린 것입니다.

무릎까지 빠지는 눈길을 새로 러셀하면서 올라가니 1,025m봉. 통나무 벤치 두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는 공간이 나타납니다. 대장님이 그제서야 “자 이곳이 오늘 우리가 볼 가장 진경입니다”라고 외칩니다. 바로 남동쪽 절벽 아래로 펼쳐지는 경치를 말함입니다. 절벽 아래 봉긋하게 솟아오른 또 하나의 봉우리 뒤로 건너편 산자락을 오목하게 감싸며 휘돌아 나가는 남한강 줄기가 절벽 위의 소나무들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을 이루고 있습니다. “야아!” 모두들 한 방의 주사를 맞은 것처럼 탄성을 지르며 카메라들을 꺼냅니다. 카메라 다들 갖고 있죠. 요즘은 휴대폰에 내장된 것도 훌륭하죠. 경치 감상하랴, 포즈 취하랴 모두들 조금 전 백 코스에 대해선 묻지도 따지지도 않습니다.

저도 좋은 게 좋다 싶어 아무 말 안 하고 사진 몇 장 찍고 하산을 서둡니다. 알고 보니 대장님, 이 산은 3년 전 동강축제 때 타보고 그 뒤로 처음 왔답니다. 물론 그 기억으로 사전 답사도 안 했고요. 우리 오늘 마침 대장님이 뒤에 합류했고 다행히 별 일 없었기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몇 명 고생깨나 했을 겁니다. 요즘 시민 안내 산악회들 전 같지 않게 매너리즘에 빠져 준비성, 조심성 없이 다니다간 어떤 대형사고를 잉태하게 될지 적잖이 걱정되는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경치는 주능선을 타는 동안 오른쪽으로 계속 펼쳐졌고요, 우리는 전망이 좋은 곳 몇 군데를 더 멈춰 서서 사진을 찍으며 절경을 즐겼습니다. 그리고 태화산성 터 고개에서 기우는 햇살로 태화산 그림자에 서서히 잠식당하는 계족산을 바라보며 얼음이 꽁꽁 언 고씨동굴 입구로 하산, 산행을 마쳤습니다. 정말이지 겨울 산행은 봄·여름·가을만의 기억으로 자만해선 절대 안 된다는 걸 다시 한번 절실히 깨달은 산행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