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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개와 소나기의 교향악’ 연주는 우리 일행이 방태산자연휴양림 산림휴양관 앞에 도착한 시각에 맞춰 정확히 시작됐다. 교향곡의 전주 악기는 한 줄기 돌풍에 이은 천둥과 번개. 순식간에 몰려온 먹구름이 그늘을 만들어 저물녘처럼 어둑어둑하던 적가리골이 번개의 섬광 아래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과 동시에 수많은 유리창이 한꺼번에 깨지듯 비는 와장창 쏟아졌다.
막대한 에너지의 벽력(霹靂)에 모골이 송연하고 간이 콩알만 해져 차 안으로 황급히 도망쳐 들어가 차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자 마치 자동차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형국이 됐다. 물방울이 떨어질 때 공기 저항에 의해 잘게 부서지는데 지금 빗방울은 하나하나가 엄지손톱만큼이나 크다. 아마도 그만큼 낮은 구름에서 비가 떨어지는 것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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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룡덕봉 정상에서 저녁식사를 할 때 황혼이 물들기 시작했다. 우리는 1300고지에서 더 바랄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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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이 차 지붕을 북 치듯 맹렬히 두드리는 소리가 탐탐 또는 팀파니의 음향으로 들렸고 빗물이 눈물처럼 흐르는 차창에 어쿠스틱한 두드림이 일으키는 깊은 울림에 가슴이 쩌릿쩌릿하다. 비는 우박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비로 변하길 몇 차례 반복했는데 냉기를 뿜는 계곡 위로는 신비로운 물안개가 느리게 흐르고 저 멀리 산록과 계곡에 비구름을 몰고 온 바람이 사나운 말처럼 달리고 있다.
바람은 본디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나무들이 잎사귀 뒷면을 허옇게 드러내며 뒤집히는 것에서 바람이 지나는 길을 알 수 있다. 아이폰으로 유튜브를 실행해 The Cascades의 ‘Rythm Of The Rain’을 듣고 있자니 비가 가진 회한과 연민의 마법이 삽시간에 영혼을 낚아채서는 마구 흔들어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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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태산은 다양한 수종이 깊은 밀림을 이루고 있어 이국적이기까지하다. 매봉령으로 향하는 숲길 곳곳에는 멧돼지의 흔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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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이 깊으면 골이 깊다. 깊은 골은 오아시스와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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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sten to the rhythm of the falling rain
Telling me just what a fool I've been…
…The only girl I care about has gone away
Looking for a brand new start
But little does she know that when she left that day
Along with her she took my heart…’
멜랑콜리의 늪에 빠져 상념의 실타래가 학창 시절 국어 교과서에 등장했던 수필 <탈고(脫稿) 안 될 전설>에까지 이르러 온갖 감상에 젖어 있을 때 비는 비로소 한풀 기세를 꺾었고, 나는 그제서야 대자연의 감동적인 연주의 여운에서 서서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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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적가리골 초입 매봉령 갈림길. 가뭄이 비껴간 듯 계곡엔 맑은 물이 콸콸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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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의 위협에 ‘산행 할까 말까’, 잠시 갈등
소나기의 거센 위협을 목도한 뒤여서 날씨를 무릅쓰고 예정대로 산행을 강행할 것인지, 아니면 포기하고 서울로 돌아갈 것인지 잠시 고민에 빠졌다. 게다가 시계는 오후 4시를 향해 가고 있다. 하지만 일단 산행 들머리까지 와 있는 데다 여기저기에서 파란 하늘이 뚫리고 있는 것을 보고는 등산화 끈을 졸라맨다.
적가리골 갈림길에서 하산 중인 몇 명의 등산객을 만났는데 상황이 재미있다. 주억봉 쪽에서 내려온 축은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하고 어금니가 딱딱 마주칠 만큼 추워하는 반면 매봉령 쪽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고슬고슬 마른 옷 그대로인 채 심지어 인근에 비가 내렸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적가리골을 사이에 두고 최대 3km쯤밖에 떨어지지 않은 두 등산로의 날씨가 완전히 달랐던 것처럼 여름철 산악지대의 기상변동은 극도로 국지적이고 돌발적인 현상이며, 그래서 신중하고 경험 있는 산쟁이는 아무리 좋은 날씨라도 비상상황에 대비해 배낭 깊숙이 방수의류 한 벌쯤은 챙기는 것이다. 어느 구름에 비가 들었는지 알 수 없으므로….
기습적인 소나기에 두 시간 가까이 발이 묶인 탓에 산행 시작이 많이 늦었다. 산림휴양관에서 출발해 매봉령을 통해 능선으로 진출한 뒤 구룡덕봉, 주억봉을 돌아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오려면 약 14km. 이번 산행엔 대암산악회의 간판 클라이머 김효걸(48)씨, 국민대학교 산악부 OB 배성우(46·대정폴리텍 대표)씨 등 다리 근육이 단단한 멤버들이 참가했다. 일단 주능선에 올라붙은 뒤로는 속도를 낼 수 있을 테지만 14km의 거리는 여전히 부담스럽다. 하지만 우리가 일몰까지 불과 4시간여를 남겨 둔 오후 4시에 방태산 등산을 강행할 수 있었던 것은 비박장비를 챙겨온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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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망대에서 운해가 차오르는 풍광을 바라보는 일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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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오르기 시작했고 이제 유일한 변수는 날씨다. 신속한 이동을 위해서 준비한 야영장비는 침낭과 매트리스뿐, 텐트도 타프도 없어 비가 오면 야영 불능이다. 날이 저물어 비가 내린다면 비박을 포기하고 밤새 내쳐 걸어서 주억봉을 거쳐 야간 산행을 해서 산림휴양관으로 돌아와야 할 것이었다.
매봉령을 겨냥하고 가던 중 3명의 심마니를 만났다. 쌀을 담을 때 사용하는 폴리에틸렌 재질의 낡은 자루에 한 쌍의 어깨끈을 꿰매 붙여 만든 등짐을 진 이들에게 앞으로 우리가 가야 할 길에 대해 물었다. 그러나 상투가 풀어 헤쳐진 녹두장군 전봉준을 닮은 심마니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죄송하지만 등산로는 알지 못합니다”라는 것이었다.
그랬다. 심마니들에게 산에서 정해진 길이 있을 수 없다. 저들의 길은 우리 같은 등산객의 길이 아니었던 것이다. 심마니들은 산 아래를 향해 휘적휘적 내려갔고 나는 그들이 풍경화 속으로 걸어들어가 서서히 멧돼지나 노루로 변하며 풍경의 일부로 용해되는 아득한 착시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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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 능선에서의 풍경에 걸음 자꾸 느려져
심마니와 헤어진 뒤 뭔가 막연히 깨달은 것 같은 기분으로 서두르지 않고 걸어 6시 30분에 매봉령을 통해 능선길로 접어들었다. 여기저기 멧돼지가 먹이활동을 하느라 파헤친 흔적이 널린 적가리골 좌릉은 수풀이 하늘을 가려 어두웠으나 주능선에 도달하자 밀림의 장막이 벗겨지며 터널을 빠져나온 듯 환하게 밝아진다.
주능선에 올라서면 빨라지리라 생각했던 주행속도가 오히려 느려졌다. 우리를 둘러싼 주변 풍경이 자꾸 멈춰 서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계방산, 오대산, 점봉산, 그리고 그너머 설악산에 둘러싸여 있었다. 해발 1,200m의 능선에서 바라보는 강원 북동부 산군들이 운해 위로 섬처럼 날등과 봉우리를 내밀었고 고지대 특유의 서늘한 바람이 땀을 시원하게 날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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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억봉 정상의 이른 아침. 휴양림으로 내려가려면 여기서 다시 이정표 삼거리로 내려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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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능선에서 동쪽을 바라본 모습. 운해가 골짜기에서 일어나 능선을 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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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해는 산악의 골짜기마다 작은 사발에 가득 찬 막걸리처럼 찰랑거렸는데 곳곳에서 산맥의 낮은 안부를 타고 넘쳐 반대편 골짜기로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비바람에 겁을 먹고 올라오지 않았다면 볼 수 없었을 장관. 우리는 최대한 느리게 움직이며 눈으로, 그리고 가슴으로 산악의 스펙터클한 파노라마를 한껏 담아냈다.
경치를 탐닉하느라 굼벵이 걸음으로 갔으므로 홍천에서 올라붙는 길과 합류되는 삼거리 임도를 지날 무렵 황혼이 찾아왔고 구룡덕봉에 이르렀을 때 태양은 소뿔산, 가리산 위에 붉은 노을을 물들이며 저물어가고 있었다.
잘 준비는 매트리스, 그리고 발수 섬유 커버 속에 들어있는 침낭을 펼치는 것으로 끝. 비박 산행의 성공 여부는 욕심을 버릴 수 있는 자제력과 함께 소박함 속에서도 풍요로움을 느껴내는 감성에 있지 않나 싶다.
자연을 즐기는 방법으로서 오토캠핑이 갖는 치명적 한계는 역설적으로 자동차로 거의 무제한의 짐을 가져갈 수 있다는 데 있다. 거의 이삿짐 수준의 물건을 쟁여 싣고 다니는 경우 결국 장비와 짐이 캠퍼와 자연의 접촉면을 가로막는 장애요인이 되기 십상인 것이다. 배낭을 지고 걸어야 하는 비박 산행의 경우 짐을 줄이고 줄여서 짐에 짓눌리지 않고 가뿐하게 운신할 수 있는 것이 꽤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우리는 잠자리가 조금 덜 푹신하고, 음식이 조금 모자라는 대신 가벼운 배낭으로 편하게 움직이는 쪽을 택했다. 취사도구도 물을 끓이기 위한 가스 스토브와 가볍고 작은 냄비, 그리고 컵인 동시에 밥그릇으로도 쓰이는 손잡이가 달린 금속 용기(흔히 시에라컵으로 통칭되는)가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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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룡덕봉에는 전망대 데크가 설치되어 있었다. 소나기가 먼지를 씻어내려 맑아진 대기 덕분에 별이 또렷하게 보이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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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소한의 장비로 밤을 견뎌내는 것이 비박이지만 이날밤 우리는 밤을 견디지 않고 즐겼다. 국민대학교 산악부 OB 배성우씨가 차를 마시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감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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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가리계곡에 닿은 뒤 샌들 신고 첨벙첨벙
오늘 밤, 하늘이 우리에게 보여줄 것을 다보여줄 모양이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면서 우리 머리 바로 위의 구름이 점차 옅어지더니 별 총총한 맑은 하늘이 펼쳐졌다.
낮에 내린 비가 대기 중의 먼지를 씻어간 덕분인지 방금 세수한 것같이 말간 얼굴의 밤하늘이 사무치게 아름답다. 미산계곡에서 방태산 남서사면을 타고 불어오는 바람에 남쪽으로 둔 머리 부분이 살짝 시려웠지만 별들이 많은 만큼 별똥도 많이 떨어져서 밤이 이슥할 때까지 침낭의 지퍼 마지막 부분을 닫을 수 없었다.
달이 둥실 떠올라 별들이 빛을 잃어갈 때쯤 잠들었던 것 같다. 알람 없이 오전 5시30분에 개운하게 깨어나 햇반과 커피로 아침을 삼은 뒤 구룡덕봉 비박지를 떠나 해발 1,444m의 방태산 주봉 주억봉까지 걸린 시간은 40분. 주억봉은 높이만 높을 뿐 각 산악회의 표식리본이 나무마다 어지러워 옹색하고 실망스러웠다. 주억봉에서 동쪽으로 계속 능선을 밟으면 인제 기린면과 홍천 상남면의 경계선인 하남리까지 긴 종주길이 이어진다.
주억봉에서 출발점인 산림휴양관까지 길은 길고(약 4km) 가파르다. 어제 비가 쏟아졌을 때 이 길로 하산한 사람들의 신발과 엉덩이가 진흙투성이였던 이유를 알 만하다. 다행히 길은 몇 개의 미끄러진 발자국과 함께 하루 만에 잘 말라 있어서 이른 아침 하산길은 경쾌했다.
지금 저 아래 세상은 논바닥이 갈라지는 극심한 가뭄에 시달리고 있지만 적가리골은 물이 풍부하다. 산이 높은 만큼 골이 깊고, 골이 깊은 만큼 품은 물도 많아 이 메마른 와중에도 옥구슬 같은 물줄기를 콸콸 흘려보내는 계곡에 가까이 갈수록 계곡물이 내뿜는 서늘한 냉기가 기분 좋다.
마침내 저지대 계곡에 닿은 뒤 등반용 샌들로 갈아 신고 몇 개의 계류를 첨벙첨벙 건널 때 먼 길을 걷느라 뜨끈하게 달궈진 맨발에 얼음처럼 차가운 물을 적시는 것은 여름 산행의 피날레로 더할 나위 없었다.
- 산행 길잡이
10km에 7~8시간 소요
방태산은 백두대간 본령에 속한 갈전곡봉에서 서쪽으로 흐른 가칠봉, 응복산의 지맥이 월둔고개를 거치며 마지막으로 기세를 몰아 구룡덕봉, 주억봉 등으로 솟은 산이다. 인근에 월둔, 적가리, 아침가리 등이 있는 3둔5가리의 승지를 품었는데 둔은 펑퍼짐한 고원 구릉을 뜻하며 가리는 갈다, 즉 산간의 경작할 수 있는 밭을 의미한다.
방동리 휴양림산장에서 출발해 매봉령까지 약 3km, 매봉령에서 구룡덕봉까지 약 1.5km, 구룡덕봉에서 주억봉까지 약 2km이며 주억봉에서 다시 출발점까지 내려오는 길이 약 4km로 대략 10km에 7~8시간이 걸린다.
교통 서울춘천고속도로를 동홍천 IC로 빠져나와 인제, 현리를 거쳐 덕다리 삼거리에서 아침가리 방향인 418번 지방도로 좌회전해 방태천을 끼고 8km 정도 가면 우측으로 휴양림 안내 표지판을 따라 방동교를 건너고 2.5km쯤 가면 방태산 휴양림이다.
서울 동서울터미널 상봉동터미널, 그리고 강원도 홍천터미널에서 현리행 버스가 하루 5회씩 약 1시간 간격으로 운행된다. 주의할 점은 서울의 터미널에서는 경기도 가평의 현리로 가는 버스도 함께 있다는 사실이다. 가끔 군인들이 휴가 나왔다가 버스를 잘못 타 강원도 현리로 가지 않고 경기도 현리로 가는 바람에 탈영보고 되는 웃지 못 할 경우가 심심찮게 발생한다.
현리에서 방태산휴양림까지는 시내버스로는 (방동)약수터입구에 하차해 걸어 들어가야 한다. 택시를 탈 경우 1만 원 안팎이면 휴양림 입구까지 데려다준다.
숙식(지역번호 033) 이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은 방동계곡을 끼고 황토산촌민박(463-1930), 들꽃나라펜션(463-2956), 방태산황토펜션(463-5488), 산여울펜션(463-4634) 등 숙소가 비교적 많은 편이다.
방태산 산행에서 놓치면 섭섭한 식당 2곳이 있다. 막국수와 편육이 맛있는 방동리의 방동막국수(461-0419)와 두부전문 고향집(461-7391).
방동막국수는 ‘숲속의빈터’라는 다소 생뚱맞은 새 간판이 붙었는데 아마도 다른 곳에서 방동막국수라는 이름을 자주 쓰는 바람에 차별화를 기하기 위함인 듯하다. 다행히 맛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고향집은 이 지역 비탈밭에서 난 콩으로 만든 두부요리집으로, 보리새우로 맛을 낸 두부전골과 함게 나오는 산채 반찬이 깔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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