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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이 말하는 행복에 이르는 길

문성식 2010. 9. 18. 09:15

 

법정 스님이 말하는 행복에 이르는 길


더 이상 나눌 것이 없다고 생각될 때에도 나누라.


아무리 가난해도 마음이 있는 한 나눌 것은 있다.

근원적인 마음을 나눌 때 물질적인 것은 자연히 그림자처럼 따라온다.

그렇게 함으로써 내 자신이 더 풍요로워질 수 있다.

세속적인 계산법으로는 나눠 가질수록 잔고가 줄어들 것 같지만,

출세간적인 입장에서는 나눌수록 더 풍요로워진다.

행복의 비결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는가에 있다.

‘위에 견주면 모자라고 아래에 견주면 남는다.’는 말이 있듯,

행복을 찾는 오묘한 방법은 내 안에 있다.

인간을 제한하는 소유물에 사로잡히면

소유의 비좁은 골방에 갇혀 정신의 문이 열리지 않는다.

작은 것과 적은 것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저마다 서 있는 자리에서 자기 자신답게 살라.
내가 지금 순간순간 살고 있는 이 일이 인간의 삶인가,

지금 나답게 살고 있는가,

 스스로 점검해야 한다.

무엇이 되어야 하고 무엇을 이룰 것인가,

스스로 물으면서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누가 내 삶을 만들어 주는가.

내가 내 삶을 만들어 갈 뿐이다.

자주 버리고 떠나는 연습을 하라.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곧 자기답게 사는 것이다.

낡은 탈로부터,

낡은 울타리로부터,

낡은 생각으로부터 벗어나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라.

묵은 수렁에서 거듭거듭 털고 일어서라.

오랜 세월을 앞에 두고 살아가는 대신 지금 이 순간을 살라.
과거나 미래 쪽에 한눈을 팔면 현재의 삶이 소멸해 버린다.

보다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항상 현재일 뿐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다면

여기에는 삶과 죽음의 두려움도 발붙일 수 없다.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말라.

이런 순간들이 쌓여 한 생애를 이룬다.

입에 말이 적으면 어리석음이 지혜로 바뀐다.

말의 의미가 안에서 여물도록

침묵의 여과기에서 걸러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인간과 인간의 만남에서 말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안으로 말이 여물도록 인내하지 못하기 때문에

밖으로 쏟아 내고 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겉으로는 침묵을 지키지만,

마음속으로는 남을 꾸짖는다.

그는 쉼없이 지껄이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또 어떤 사람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말을 하지만 침묵을 지킨다.

필요 없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살 때는 삶에 철저해 그 전부를 살아야 하고,

죽을 때는 죽음에 철저해 그 전부가 죽어야 한다.

우리는 날마다 죽으면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살 때는 삶에 전력을 기울여 뻐근하게 살아야 하고,

일단 삶이 다하면 미련 없이 선뜻 버리고 떠나야 한다.

사는 것도 내 자신의 일이고,

죽음 또한 내 자신의 일이니 살 때는 철저히 살고

죽을 때 또한 철저히 죽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순간마다 새롭게 태어남을 뜻한다.

순간순간 심리적으로 죽지 않는다면

우리는 새로운 삶을 이룰 수 없다.

삶의 장비를 최대한 간소하게 갖추라.

집, 식사, 옷차림을 단순하게 하라.

밖에서 오는 행복도 있지만,

안에서 향기처럼, 꽃향기처럼 피어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다.

문명의 이기에 의존하지 말고,

때로는 밤에 텔레비전도 끄고,

촛불이라도 한번 켜 보라.

그러면 산중은 아니더라도

산중의 그윽함을 간접적으로라도 누릴 수 있다.

또한 가족들끼리,

아니면 한두 사람이라도 조촐하게 녹차를 마시면서

잔잔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거기서 또한 삶의 향기가 피어날 수 있다.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 늘 물으라.

때로는 전화도 내려놓고,

신문도 보지 말고,

단 10분이든 30분이든 허리를 바짝 펴고 벽을 보고 앉아서

나는 누구인가 물어보라.

이렇게 스스로 묻는 물음 속에서

근원적인 삶의 뿌리 같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항상 자신의 삶이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은 늘 근원적인 물음 앞에 마주서야 한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

그런 물음과 대면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인간의 삶이라고 할 수 없다.

항상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고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가 물을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받아들이라.

좋은 일이든 궂은일이든 우리가 겪는 것은 모두가 한때일 뿐.

이 세상에서 고정불변한 채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떤 어려운 일도 어떤 즐거운 일도 영원하지 않다.

모두 한때이다.

한 생애를 통해 어려움만 지속된다면 누가 감내하겠는가.

다 도중에 하차하고 말 것이다.

좋은 일도 그렇다.

좋은 일도 늘 지속되지는 않는다.

그러면 사람이 오만해진다.

어려운 때일수록 낙천적인 인생관을 가져야 한다.

기도는 인간에게 주어진 마지막 자산이다.

누구나 자기 존재의 근원을 찾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해야 한다.

진정한 기도는 종교적인 의식이나 형식이 필요 없다.

오로지 간절한 마음만 있으면 된다.

순간순간 간절한 소망을 담은 진지한 기도가

당신의 영혼을 다스려 줄 것이다.

사람의 몸에 음식이 필요하듯 우리의 영혼에는 기도가 필요하다.

기도는 하루를 여는 아침의 열쇠이고,

하루를 마감하는 저녁의 빗장이다.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불행해진다.

남과 비교하지 말라.

꽃이나 새는 자기 자신을 남과 비교하지 않는다.

저마다 자기 특성을 마음껏 드러내면서

우주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다.

남과 비교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삶에 충실할 때

런 자기 자신과 함께 순수하게 존재할 수 있다.

진달래는 진달래답게 피면 되고,

민들레는 민들레답게 피면 된다.

이런 도리를 꽃에게서 배우라.

인간은 생이 다할 때까지 자기 관리에 철저해야 한다.

스스로 자신의 매서운 스승 노릇을 해야 한다.

늙어서 자기 자신에 대한 관리가 소홀하면

그 인생이 초라하게 마련이다.

꽃처럼 새롭게 피어나는 것은 젊음만이 아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한결같이 자신의 삶을 가꾸고 관리한다면

날마다 새롭게 피어날 수 있다.

화사한 봄의 꽃도 좋지만,

늦가을 서리가 내릴 무렵에 피는 국화의 향기는

그 어느 꽃보다도 귀하다.

세상과 타협하는 일보다 더 경계해야 할 일은

자기 자신과 타협하는 일이다.

해답을 얻으려 하지 말고, 직접 살아 보라.

경전이나 종교적인 이론은 공허하고 메마르다.

그것은 참된 앎이 아니다.

참된 앎이란 타인에게서 빌려온 지식이 아니라,

내 자신이 몸소 부딪쳐 체험한 것이어야 한다.

다른 무엇을 거쳐 아는 것은 기억이지 앎은 아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안 것을 내가 긁어모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내 것’이 될 수 없다.

진정한 앎이란 내가 직접 체험한 것,

이것만이 내 것이 될 수 있고 나를 형성한다.


진정한 친구란 두 개의 육체에 깃든

하나의 영혼이란 말이 있다.

 영혼의 친구를 만나라.

영혼의 친구끼리는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을지라도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지척에 살면서도 일체감을 함께 누릴 수 없다면

그건 진정한 친구일 수 없다.

진정한 만남은 상호간의 눈뜸이다.

영혼의 진동이 없으면 그건 만남이 아니라 한때의 마주침이다.

그런 만남을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끝없이 가꾸고 다스려야 한다.

좋은 친구를 만나려면

먼저 나 자신이 좋은 친구감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친구란 내 부름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소유한 것에 소유당하지 말라.

빗방울이 연잎에 고이면

연잎은 한동안 물방울의 유동으로 일렁이다가,

어느 만큼 고이면 수정처럼 투명한 물을 미련 없이 쏟아 버린다.

그 물이 아래 연잎에 떨어지면 거기에서 또 일렁이다가

도르르 연못으로 비워 버린다.

이런 광경을 무심히 지켜보면서,

‘연잎은 자신이 감당할 만한 무게만을 싣고 있다가

그 이상이 되면 비워 버리는구나.’ 하고 그 지혜에 감탄했었다.

그렇지 않고 욕심대로 받아들이면,

마침내 잎이 찢기거나 줄기가 꺾이고 말 것이다.

세상 사는 이치도 이와 마찬가지다.

삶에는 즐거움이 따라야 한다.

즐거움이 없으면 그곳에는 삶이 정착되지 않는다.

자기 생애의 모든 해, 모든 순간들을 음미하라.

즐거움은 밖에서 누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인생관을 지니고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한다.

일상적인 사소한 일을 거치면서

고마움과 기쁨을 누릴 줄 알아야 한다.

부분적인 자기가 아니라 전체적인 자기일 때,

순간순간 생기와 탄력과 삶의 건강함이 배어 나온다.

자기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마찬가지로 자기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그러므로 행복과 불행은 밖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고 찾는 것이다.

삶이라는 커다란 선물을 준 자연에게 감사하라.

우리가 불행한 것은 가진 것이 적어서가 아니라,

따뜻한 가슴을 잃어 가기 때문이다.

따뜻한 가슴을 잃지 않으려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동물이나 식물 등 살아 있는 생물과도

교감할 줄 알아야 한다

마음에 따르지 말고 마음의 주인이 되라.

우리들이 화를 내고 속상해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외부의 자극에서라기보다

마음을 걷잡을 수 없는 데에 그 까닭이 있다.

인간의 마음이란 미묘하기 짝이 없다.

너그러울 때는 온 세상을 다 받아들이다가

한번 옹졸해지면 바늘 하나 꽂을 여유조차 없다.

그런 마음을 돌이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마음에 따르지 말고

마음의 주인이 되라고 옛사람들은 말한 것이다.

자신의 영혼을 가꾸는 일에 시간을 바치라.

모습은 여러 가지로 바뀌나,

생명 그 자체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생명은 우주의 영원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근원적으로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변화하는 세계가 있을 뿐.

이미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그들은 다른 이름으로 어디선가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원천적으로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

불멸의 영혼을 어떻게 죽이겠는가.

우리가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기약할 수 없는 것이다.

내일 일을 누가 아는가.

이 다음 순간을 누가 아는가.

순간순간을 꽃처럼 새롭게 피어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매 순간을 자기 영혼을 가꾸는 일에,

자기 영혼을 맑히는 일에 쓸 수 있어야 한다.

죽을 때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면

어떤 것도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지 말라.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내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살 만큼 살다가 삶의 종점에 다다랐을 때

내게 남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원천적으로 내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때 맡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물질이든 명예든 본질적으로 내 차지일 수 없다.

내가 이곳에 잠시 머무는 동안

그림자처럼 따르는 부수적인 것들이다.

진정으로 내 것이 있다면

내가 이곳을 떠난 뒤에도 전과 다름없이

이곳에 남아 있는 것들이어야 한다.

따라서 타인에게 베푼 것만이 진정으로 내 것이 될 수 있다.

옛말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고

자신이 지은 업만 따를 뿐이다.’ 라고 한 뜻이 여기에 있다.

하루 한 번은 홀로 있는 시간을 가지라.

홀로 있지 못하면 삶의 전체적인 리듬을 잃는다.

홀로 조용히 사유하는,

마음을 텅 비우고 무심히 지켜보는 그런 시간이 없다면

전체적인 삶의 리듬 같은 것이 사라진다.

삶의 탄력을 잃게 된다.

단순한 삶을 이루려면 더러는 홀로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사람은 홀로 있을 때 단순해지고 순수해진다.

이때 명상의 문이 열린다.

홀로 있다는 것은 어디에도 물들지 않고 순수하며 자유롭고,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서 당당하게 있음이다.


용서를 가장 큰 수행으로 삼으라.

남을 미워하면 저쪽이 미워지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이 미워진다.

부정적인 감정이나 미운 생각을 지니고 살아가면,

그 피해자는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

하루하루를 그렇게 살아가면 내 삶 자체가 얼룩지고 만다.

인간관계를 통해 우리는 삶을 배우고 나 자신을 닦는다.

 맺힌 것은 언젠가 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번 생에 풀리지 않으면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

무엇인가를 소유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소유를 당하는 것이며,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소유물은 우리가 그것을 소유하는 이상으로

우리 자신을 소유해 버린다.

무엇인가를 가질 때

우리의 정신은 그만큼 부자유해지며

 타인에게 시기심과 질투와 대립을 불러일으킨다.

소유한 것을 버리고 모든 속박에서 그대 자신을 해방시키라.

그리고 존재하라.

필요에 따라 살아야지 욕망에 따라 살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늙음이나 죽음이 아니다.

녹슨 삶을 두려워해야 한다.

삶이 녹슬면 모든 것이 허물어진다.

어떻게 늙는가가 중요하다.

자기 인생을 어떻게 보내는가가 중요하다.

거죽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중심은 늘 새롭다.

지나가는 세월을 아쉬워할 게 아니라,

오는 세월을 잘 쓸 줄 아는 삶의 지혜를 터득해야 한다.

하루에 한 번은 명상하는 시간을 가지라.

사람의 마음은 그 어디에도 얽매임 없이

순수하게 집중하고 몰입할 때,

저절로 평온해지고 맑고 투명해진다.

 먹고, 마시고, 놀고, 자고, 배우고, 익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명상은 우리들 삶의 일부분이다.

 명상은 안팎으로 지켜보는 일이다.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변화와 언어와 동작,

생활 습관들을 낱낱이 지켜보는 일이다.

때때로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이 없다면

마음은 황무지가 되고 말 것이다.

명상하라,

그 힘으로 삶을 다지라.

무엇이든 단 한 번의 기회로 여기라.

차(茶)의 세계에 일기일회(一期一會)란 말이 있다.

일생에 단 한 번 만나는 인연이란 뜻이다.

개인의 생애로 볼 때도 이 사람과 이 한때를 갖는 이것이

생애에서 단 한 번의 기회라고 여긴다면,

순간순간을 뜻 깊게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몇 번이고 만날 수 있다면 범속해지기 쉽지만,

이것이 처음이면서 마지막이라고 생각할 때

아무렇게나 스치고 지나칠 수 없다.

기회란 늘 있는 것이 아니다.

한번 놓치면 다시 돌이키기 어렵다.

갑작스런 불행에 자신을 지킬 수 있도록

 삶의 중심을 키우라.

거죽은 언젠가 늙고 허물어진다.

그러나 중심은 늘 새롭다.

영혼에는 나이가 없다.

혼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그런 빛이다.

어떻게 늙는가가 중요하다.

자기 인생을 어떻게 보내는가가 중요하다.

거죽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중심은 늘 새롭다.

거죽에서 살지 않고 중심에서 사는 사람은

어떤 세월 속에서도 시들거나 허물어지지 않는다.

가치 있는 삶이란

욕망을 채우는 삶이 아니라

의미를 채우는 삶이다.

의미를 채우지 않으면 삶은 빈 껍질이다.

자기를 가둔 감옥에서 탈출하려면

무엇보다 의식이 깨어 있어야 한다.

자기 인생에 대한 각성 없이는 벗어날 기약이 없다.

깨어 있는 사람만이 자기 몫의 삶을 제대로 살 수 있고,

깨어 있는 사람만이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끝없는 탈출을 시도한다.

있음보다 없음,

가득 참보다 비어 있음의 여유를 느끼라.

‘문으로 들어온 것은 집안의 보배라 생각지 말라.’는 말이 있다.

바깥 소리에 팔리다 보면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

바깥의 지식과 정보에 의존하면 인간 그 자체가 시들어 간다.

오늘 우리들은 어디서나 과밀 속에서 과식하고 있다.

생활의 여백이 없다.

가득 채우려고만 하지,

비어 있음의 여유를 두려고 하지 않는다.

텅 비어야 그 안에서 영혼의 메아리가 울린다.

우리는 비울 줄을 모르고 가진 것에 집착한다.

텅 비어야 새로운 것이 들어찬다.

모든 것을 포기할 때,

한 생각을 버리고

모든 것을 포기할 때 진정으로 거기서 영혼의 메아리가 울린다.

텅 비었을 때,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고

비었을 때 그 단순한 충만감,

그것이 바로 극락이다.

여행을 더 많이 다니고, 가끔은 홀로 여행하라.

가끔은 자기가 살던 집을 떠나 보라.

자신의 삶을 마치고 떠나간 후의

그 빈자리가 어떤 것이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홀로 여행자가 되면 투명하고 순수해진다.

낯선 환경에 놓여 있을 때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눈을 뜬다.

자기 모습이 뚜렷이 드러난다.

개체가 된다는 것은 곧 자유로워지는 것.

그리고 온전한 휴식을 누릴 수 있다.

작은 것과 적은 것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행복은 많고 큰 데서 오는 것도 아니고

지극히 사소하고 아주 작은 데서 찾아온다.

행복은 크고 많은 것에서보다 작은 것과 적은 것 속에 있다.

크고 많은 것만을 원하면 그 욕망을 채울 길이 없다.

작은 것과 적은 것 속에

삶의 향기인 아름다움과 고마움이 스며 있다.

나는 향기로운 차 한 잔을 통해 행복을 느낄 때가 있다.

내 삶의 고마움을 느낄 때가 있다.

산길을 가다가 무심히 피어 있는 한 송이 제비꽃 앞에서도

얼마든지 나는 행복할 수 있다.

그 꽃을 통해 하루의 일용할 양식을 얻을 수 있다.

행복은 이처럼 일상적이고 사소한 데 있는 것이지,

크고 많은 데 있지 않다.

법정 스님

1932년 출생. 1956년 송광사에서 효봉 스님의 문하에 출가했다.

70년대 봉은사 다래헌에 거주하며 한글대장경 역경에 헌신하고,

함석헌 등과 함께 <씨알의 소리> 발행에 참여했으며,

불교신문사 주필을 지냈다.

70년대 말 모든 직함을 버리고

송광사 뒷산에 스스로 불일암을 지어 칩거한 후

30년 동안 한 달에 한 편 쓰는 글로써 세상과 소통해 왔다.

2004년에는 그동안 맡아 왔던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 ‘길상사’ 회주직에서 사퇴했다.

2006년 현재 강원도 산골 화전민이 살다 떠난 작은 오두막에서

 여전히 홀로 살며 청빈과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무소유> <서 있는 사람들> <물소리 바람소리>

<산방한담>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텅빈 충만>

<홀로 사는 즐거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