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고흥반도는 이내가 끼면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며 전설의 섬들이 생겨난다. 거금대교에서 바라본 장재도. 신비감 넘치는 무인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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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풍 따라 꽃소식이 전해지는 3월 봄철에 고흥 땅을 찾았을 때 달랑 팔영산만 올랐다가 고흥반도를 빠져나온다면 그야말로 멋도 낭만도 없는 여행이 될 것이다. 남북 길이 최장 95km에 이를 만큼 거대한 반도로 이루어진 고흥에는 고흥만, 나로도 해상경관, 비자나무숲, 영남 용바위, 금산 해안 경관, 마복산 기암절경, 남열리 일출, 중산 일몰 등 10경이 있고, 거금도와 소록도, 내나로도와 외나로도 등 크고 작으면서 아름다운 섬들도 많이 있다. 이렇게 멋스런 고흥 땅은 한반도에서 봄이 가장 빨리 오는 곳이다. 한반도의 봄은 고흥 앞바다에서 바람 타고 뭍으로 올라와 북으로 올라간다.
팔영산을 기점으로 하는 고흥반도 여행은 지난해 거금대교가 개통됨에 따라 한층 폭넓어졌다. 이제 여객선이 아닌 승용차로도 쉽게 들어갔다 나올 수 있는 섬이 거금도다. 팔영산 산행과 잇는 여행은 고흥만~녹동~소록도~거금도 순이 최고의 코스다. 이후 여유가 있다면 우주선 발사대가 위치한 나로도를 탐승하고, 좀더 여유가 있다면 귀가 길에 벌교읍을 중심으로 구성된 소설가 조정래의 태백산맥 문학기행길을 걸어보도록 한다.
- ▲ 1 두원면 일원의 고흥만 벚꽃길. 사진 고흥군청 2 가족과 연인들에게 명소로 자리잡은 고흥만 유채꽃밭. 사진 고흥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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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만으로 이어지는 벚꽃길과 녹동항
팔영산 산행을 마쳤다면 우선 항공센터와 경비행장이 조성 중인 고흥만을 찾자. 고흥만으로 가려면 두원면 땅을 밟아야 한다. 두원면소재지에서 고흥방조제로 가는 도로는 벚꽃길이다. 3월 말에서 4월 초면 장관을 이루는 벚꽃 터널을 빠져나가면 고흥호와 고흥만 간척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두원면 풍류리와 도덕면 용동리 사이의 바다를 막는 간척사업이 1991년 시작해 15년 만인 2006년 내부 개답공사가 마무리되면서 고흥호라는 거대한 인공호수가 탄생했다.
낭만 넘치는 드라이브코스로 각광받고 있는 2.9km 길이의 방조제는 양옆으로 대조적인 풍광을 보여준다. 바깥으로는 득량만 바다가 펼쳐지고 안쪽으로는 갈대가 무성한 가운데 둑 가까이 유채꽃밭이 조성돼 있다. 때문에 방조제 안쪽은 겨울과 여름이면 철새들의 낙원이요 봄에는 유채꽃으로 천상화원을 이루곤 한다. 반면에 방조제 바깥은 큰 고기 낚겠다는 강태공들의 천국이기도 하다. 특히 봄에는 학꽁치 잡겠다는 새내기 강태공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곧게 뻗은 방조제를 건너서면 도덕면 용동리. 예서 도덕면소재지에 닿을 때까지도 벚나무는 도로 양옆으로 도열해 있다. 도덕면소재지에서 도양면 녹동항까지는 7km 남짓한 거리. 녹동(鹿洞)의 지명은 옛날 귀족 관속들이 사냥을 즐기던 시절 사슴 한 마리가 이 마을까지 도망쳐 왔다 하여 ‘녹동(鹿洞)’이라 불렸다는 설과 함께, 조선시대에 소록도 가는 길목, 즉 녹동진(鹿島鎭)으로 불렸던 데에서 이름이 유래한다는 설이 전한다.
- ▲ 소록도 중앙공원. 아름다운 숲 속에 한센인들의 한이 서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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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사슴의 머리를 뜻하는 한자어 ‘녹두(鹿頭)’가 변한 이름이라는 설도 지닌 녹동은 다도해에서 생선을 잡아 올리는 어선뿐만 아니라 멀리 제주까지 가는 여객선이 다니는 큰 항구다. 여행객들에게는 녹동항 못지않게 눈길을 끄는 곳이 수산물공판장 겸 어시장이다. 저렴한 값에 남해의 싱싱한 생선회를 맛볼 수 있으며 경매시간(오전 8시, 오후 2시)을 맞추면 평소 경험하기 어려운 입찰 광경도 볼 수 있다. 활어판매장에는 생선뿐만 아니라 해삼, 멍게, 낙지, 전복 등 다양한 어패류가 판매되고 있으며, 회를 뜬 다음 2층 식당이나 공판장 건너편 식당에 가져가서 저렴하게 먹을 수 있다.
녹동항을 둘러본 다음 꼭 들러야 할 곳이 고흥 10경 중 제2경인 소록도(小鹿島)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작은 사슴을 닮았다는 소록도는 한센인들의 애환이 서린 곳이다. 한센인들과 소록도 사이에 얽힌 슬픈 역사는 1913년 소록도의 최흥종 목사가 조선나병근절대책연구회를 발족시키고 활동을 전개하자 이 모임이 정치적 세력으로 변할 것을 두려워한 일제가 소록도 땅 30여만 평을 강제로 매수하고 1916년 소록도자혜원을 지은 다음 한센병 환자들을 수용하면서 시작된다.
- ▲ 소록도 검시실. 한센인들의 정관수술과 부검 및 생체실험이 이루어졌던 곳이다. 뒤편에 감금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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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센인들의 애환 서린 소록도
이 섬은 3년 전까지만 해도 배를 타고 가야 했던 작은 섬이었으나 2009년 3월 2일 1,160m 길이의 현수교인 소록대교가 개통되면서 이제는 승용차를 몰고 들어설 수 있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오른쪽 길로 틀면 소록도 주차장에 닿는다. 이곳에 차를 대놓은 다음 울창한 소나무 숲길로 들어선다. 아름드리 소나무 우거진 이 숲은 수탄장(愁嘆場)이라 불리던 곳이다. 한센인들이 이곳에 마련된 면회소에서 가족이나 친지를 만나더라도 즐겁기보다는 신세가 한탄스러워 탄식하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소나무숲을 가로지른 해안 데크길을 걷노라면 오른쪽으로 철새들이 날아다니는 득량만(得糧灣) 넓은 바다가 바라보인다. 동행한 고흥 문화관광해설사 김유화씨 말에 의하면 득량만은 이순신 장군이 임진란 전후에 군량미 300석과 800석을 얻은 바다라 하여 이름지어졌다는 곳이다.
소나무 숲길이 끝나고 국립소록도병원 뒤편으로 들어서면 일제 때 건물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1933년 강제동원된 한센인들에 의해 완공된 건물들로 뒤편의 건물은 환자들을 감금하던 곳이고, 길가의 건물 두 동 중 한 동은 산 자의 불임수술실로 이용되었고 또 한 동은 죽은 자의 실험실이었다 한다. 그 시절 정관수술을 받기 위해 초조한 마음으로 감금실에 갇혀 있었을 젊은이들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리다.
- ▲ 1 김일선수공덕비. 2 고산 윤선도가 거금도 풍광의 명성을 듣고 찾아왔다가 심었다는 고산목. 3 ‘한센병은 낫는다’는 한센인의 절박한 심정을 표현한 글귀가 써 있는 구라탑. 한센인을 핍박했던 슈호 원장의 동상이 있던 자리다. 4 영남면 남열리 해안가의 용바위. 용이 승천한 흔적이 남아 있다는 널찍한 갯바위 지대로, 봄철 나들이 코스로 인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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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위쪽의 중앙공원 또한 1936년부터 3년 4개월간 연인원 6만 명에 이르는 한센인들에 의해 조성된 곳이다. 공원이 제대로 조성되기까지 환자들에게는 지옥 같은 세월이었던 셈이다. 공원 숲속에 세워진 여러 탑 중 구라탑(救癩塔)은 한센인들의 아픈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탑이다. ‘한센병은 낫는다’는 글귀가 새겨진 구라탑은 자신의 임기(1933년 9월 1일~1942년 6월 20일) 동안 실험실과 공원 등을 만들기 위해 한센인들을 강제 노역시킨 슈호 원장의 동상 자리에 세워진 탑이다. 슈호는 1940년 자신의 동상을 세우고 매월 20일을 보은감사일로 정한 다음 동상 앞 요배석에서 한센인들에게 참배케 했으나 1942년 6월 20일 ‘몽당손’ 한센인 이춘상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이렇게 한센인들의 한이 서려 있는 중앙공원에는 방사한 사슴 200여 마리가 살고 있다 하나 여간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소록대교 개통에 맞춰 일반인들에게 중앙공원이 개방된 이후 한센인들은 일반인들의 눈길을 피해 섬 남단에서 잘 벗어나지 않는다 하니 한센인들의 서글픈 삶은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 ▲ 고흥반도 개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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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도로 따르며 탐승하는 거금도 해안 경관
소록도를 빠져나올 때에는 승용차 따로 몸 따로 거금대교를 건널 일이다. 공사 9년 만인 지난해 12월 16일 개통한 거금대교는 2,028m 길이의 사장교로 국내 최초의 2층 다리다. 2층은 차량 전용도로이고, 1층은 사람 전용도로다. 자전거가 있다면 바다 풍광을 즐기면서 한결 쉽게 다리를 건널 수 있을 것이다.
공원 주차장 끄트머리의 펜스 문 뒤편 길을 따르면 자연스럽게 거금대교로 들어선다. 청정계곡의 소를 보는 듯 맑은 바닷물이 빠른 속도로 흘러가는 남해바다와 파랑도, 이어도 같은 분위기의 작은 섬을 바라보며 걷는 재미가 쏠쏠하면서도 시심을 돋게 하는 구간이다.
거금대교 건너 거금도(巨金島)는 고흥군 금산면이다. 한때 7번째로 큰 섬이었으나, 간척 사업으로 인해 땅이 넓어진 섬들이 등장하면서 11번째로 밀려났다. 다리를 건너면서 고흥7경으로 꼽히는 거금도 해안선이 이어진다.
- ▲ 거금도 명천마을 포구에 위치한 쌍굴. 바닷물이 들어왔다 나가는 모습이 신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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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km 길이의 해안일주도로가 나 있는 거금도는 우선 프로레슬러 김일 선수와 조망 명산 적대봉(積臺峰·592.2m)으로 이름난 섬이다. 맑은 날에는 제주도까지 보인다고 할 만큼 다도해 풍광이 일품인 적대봉은 산 북쪽 금산정사에서 출발해 봉수대 자리인 정상에 올랐다가 마당목재를 거쳐 남쪽 바닷가 오천마을로 내려서는 코스가 가장 인기 있다. 자동차로 파상재에 올라서면 2시간 반이면 정상에 올랐다 내려올 수 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초반 프로레슬링은 우리 국민이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였고, ‘박치기 왕’ 김일은 국내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선수였다. 그의 생가는 면소재지 남단의 도로가에 있고, 생가 옆에는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그 뒤편 멀리에 조성 중인 기념체육관에는 김일 선수가 생전 경기 때 입었던 옷과 챔피언 벨트, 우승컵, 사진 등을 전시할 전수관도 들어설 계획이다.
김일선수공덕비를 지나 해안도로를 따르노라면 왼쪽으로 꺾어지고 이후 백사장이 내려다보인다. 거금도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운 모래사장을 갖춘 익금해수욕장이다. 활처럼 곡선을 그린 채 남해바다를 껴안을 듯 부드럽고 넉넉한 분위기의 익금해수욕장은 봄철 모래밭을 거닐며 바다 풍광을 누리기에 적합한 곳이다.
- ▲ 1 고흥10경 중 하나인 거금도 해안도로. 40km 길이의 도로가 해안을 따라 이어진다. 2 거금도 월포문굿농악전수관 앞의 250년생 팽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