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만든 향기 좋은 술을 천천히 식사와 곁들이다
나의 술빚기는 순전히 술을 좋아하시는 부모를 위한 작은 배려에서 시작되었다. 아버지의 술에 대한 욕심을 덜어내 건강을 돌보시도록 하자는, 아주 사소하고 소박한 생각이 내가 처음 술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이다. 처음에는 술 빚는 법만 잘 터득하여 손수 술을 빚어드릴 수 있으면 되리라는 생각에 시작했던 것이 좀 더 다양한 술을 공부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고, 술을 어떻게 빚는 것인지를 조금 알고 나자 13년이 지나가버렸다. 그리고 술을 알면 알수록 좀 더 체계적인 연구와 기록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는데, 술 잘 빚는 일 못지않게 술을 빚는 목적이나 용도에 따라 술을 달리 빚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다시 7년이 걸렸다. 그러면서 술을 빚는 사람은 어떤 목적과 용도로 어떻게 빚을 것인지를 결정하여야 하고, 다음으로 어떻게 마시고 어떻게 즐기도록 할 것인가 하는 방법모색 등 음주자에 대한 배려와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결국 술을 빚는 사람은 사람들로 하여금 술을 즐기되, 건강까지 고려하여 가능한 많이 마시지 않고도 흥취를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하여 맛과 향기 등 주질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얘기이다.
술 빚는 법을 교육하고 있는 입장에서 이율배반적인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가장 좋은 음주방법은 반주(飯酒)이고, 훌륭한 주인(酒人/大母, 양조인)은 과음하지 않을 술 맛을 내는 방법을 찾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전통주’라는 말을 사용하기 이전 우리나라에서 빚어진 고유 술에 대한 총칭은 가양주(家釀酒)였다. 가양주란 “용도나 목적에 따라 집에서 빚어 집에서 마시는 술”이란 뜻이다. 그런데 이 가양주의 뿌리를 캐다 보면 지금과는 달리 우리의 음주습관은 본디 ‘반주(飯酒)’와 ‘약주(藥酒)’ 개념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의 가양주가 반주문화로 뿌리내리기 시작한 것은 통일신라시대 때부터다. [삼국유사] “태종춘주공조”에 당시 왕의 식사 내용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왕의 식사는 하루에 쌀 서 말과 꿩 아홉 마리 먹더니, 경신년에 백제를 멸한 후로는 점심을 그만 두고, 다만 아침, 저녁뿐이었다. 그러나 계산하여 보면 하루에 쌀 엿 말, 술 엿 말, 꿩 열 마리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술이 상식(常食)으로 이용되었다는 것과 함께 식사 때 술을 겸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들어 유교를 바탕으로 한 ‘추원보본사상(追遠報本思想)’이 강조되자, 제주는 물론이고 반주와 접대주, 농주, 잔치술 등 다양한 용도로 이용되면서 가양주 문화는 황금기를 구가하게 된다. 양반가는 물론이고 대개의 민가에서도 가전비법의 가양주를 즐기고 상비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일제강점기로 접어들면서 맥이 끊겼거나, 한국전쟁 이후 식량위기에 따른 양곡관리법에 의해 가양주가 밀주로 취급되면서 자취를 감춘 반가와 부유층의 가양주들이 1천여 가지에 달했다.
실제로 필자가 그 동안 맥이 끊겼던 1천여종의 전통주 가운데 재현 또는 복원과정을 통해서 체험했던 절대 다수인 850여종의 주품들에서 단맛이 두드러진다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고, 특히 과실향기나 꽃향기의 방향주(芳香酒)와 미주(美酒) 중심으로 전통주의 품질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결국 이러한 향기 좋은 방향주나 미주는 그 향취를 즐기는데 있으므로, 마시는 일도 서두르지 않게 되고 아까워서라도 두고두고 즐기려는 경향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경향이 집에서 빚어 상비해두고 부모의 식사 때 한두 잔 곁들이는 반주와 귀한 손님 접대에 사용하는 가양주를 빚게 된 이유이다. 한편 부모와 노인을 위한 반주는 술을 즐기는 목적 외에 식사 후의 소화를 돕고 입맛을 돋궈주는 효과를 얻고자 하는 고유한 음주문화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고유의 전통주, 즉 대개의 가양주는 과음을 할 수 없게 양조되고 설사 과음을 하더라도 다음날 숙취 등 아무런 후유증이 없고, 궁극적으로 점차 주량이 줄어들어 하루 서너 잔에 그쳐도 더 이상 술 욕심을 내지 않게 되는 효과를 가지지 않을까 하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