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 술 이야기

약주문화민족

문성식 2012. 3. 14. 06:01

약주문화민족

각종 약주류와 재료들의 모습.

 

 

“약주 한잔 하시겠습니까?”

세계에서 술을 약으로 인식하고 있는 나라나 국민은 드물다. 주지하다시피 술은 성인에 한하여 즐길 수 있는 기호음료인데, 유독 우리나라 사람들만이 술을 약주(藥酒)라고 하고, 이 약주를 반주(飯酒)와 손님 접대에 이용해 오고 있다. 그러나 “왜 술이 약이 되는가?” 하고 물으면 선뜻 합리적 이유나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하지만, 술이 약이 되는 것은 사실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술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오래 전부터 전해오는 몇 가지 설(說)에 연유한다. 전하는 설인 즉, “조선조 중엽 선조 때 ‘약봉(藥峯)’이란 아호(雅號)를 가진 서성(徐渻)이란 선비가 ‘약현(藥峴, 지금의 서울역 뒤편 중림동)’에 살았는데, 그의 어머니 이씨가 빚은 ‘약산춘(藥山春)’이란 이름의 청주가 명주로 이름을 날렸다. 이에 사람들이 ‘약현’에 사는 ‘약봉’의 어머니가 빚은 ‘약산춘’이라는 이름의 술이라는 뜻의 유래를 줄여서 ‘약주’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그것이요, 또 다른 설은 “조선시대 때 천재지변이나 흉년으로 식량이 부족하면 금주령(禁酒令)을 내리곤 했는데, ‘병자가 치료를 목적으로 술을 써야 할 때’에 한하여 한 가지 예외 조항을 두었다 한다. 이에 특권 계층의 양반들이 술을 마시기 위한 핑계로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약으로 술을 마신다.’고 했으므로, 서민들이 비꼬는 말로 ‘점잖은(양반/권력층) 사람들이 마시는 술은 약주다.’고 한 데서 ‘약주’라는 말이 널리 쓰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은 사실 여부와는 관계없이 좀 억지스러운 면이 없지 않으나, 한국인만의 술에 관한 의식이 독특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으며, 우리 민족이 ‘약주문화민족’으로 지칭되는 이유를 엿볼 수 있다.

 

필자의 고향 해남은 교통이 불편하여 서울을 가려면 꼭 목포로 나와야 했다. 목포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가는 길이 가장 빠른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때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목포에서 살게 되었는데, 우리 집은 직장을 찾아 또는 돈벌이로 서울로 나간 자식들의 혼사나 대소사로 서울을 가기 위해 찾아오시는 일가친척들과 심지어 문중의 어른들까지 하룻밤 묵어가는 주막 같은 곳이 되어버렸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오시느라 고생하시어 목이 칼칼하실 텐데 약주 한잔 하시겠습니까?” 하고 물으시면, 어른들은 “괜찮네. 번거롭게 그리하지 말게” 하시는데도 어머니는 먼저 술상부터 차려 내시는 것을 보고 자랐다. 그에 어른들은 상을 물리시고는 “종부, 약주 잘 마셨네. 고맙네.” “약주 대접 잘 받았네. 건강하시게” 하고 답례를 하시는 것이었다. 당시의 필자가 이상하게 느꼈던 것은, 더운 여름철에는 맥주를, 추운 겨울철에는 소주를 데워 주전자에 담아 식사와 함께 차려 내시면서도 꼭 ‘약주 한 잔 하시겠느냐’는 어머니의 인사요, ‘약주 잘 마셨다’는 어른들의 답례였다. 적어도 우리 부모 세대들은 술이 그냥 술이 아닌, 어떤 의미이든 약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약주라는 명칭은 ‘모든 술의 총칭’이자 ‘술을 높여 부르는 말’로 쓰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본래 약주라고 하면, ‘약효(藥效)가 인정되는 술’, 또는 ‘여러 가지 약재(藥材)를 첨가하여 침출하거나 발효시켜 약이성 효능을 간직한 술’로, 일상생활에서 초래되는 갖가지 질병의 예방과 치료, 평상시의 건강증진 도모 등 기능성 추구의 목적으로 제조한 술을 가리킨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사실적인 기능성 약주를 포함하여 청주는 물론이고 소주와 맥주, 막걸리, 심지어 위스키 등의 양주(洋酒)까지도 약주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손님접대. 주주객반 시연 모습.

 

이러한 인식의 배경에는 “술이란 하늘이 내린 아름다운 복록(福祿)으로, 제왕은 이것으로 천하의 백성을 기르고, 이것으로 제사 지낼 때 복을 빌며, 이것으로 쇠약한 자와 병자를 부양한다. 또한 온갖 예식(禮式)도 술이 아니면 거행되지 않는다.”고 한 데서 유래한 것으로, ‘술이 모든 약 가운데서 으뜸(백약지장;百藥之長)’이라는 생각을 낳게 되었다. 술은 적당히 마시면 몸에 이롭고 생활리듬에 활력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한국인 고유의 정서이자 하나의 독특한 음주문화로 뿌리를 내렸다.

 

 

어른에 대한 공경, 도리와 예절, 그리고 정성이라는 인식이 담긴 우리 약주문화

실제로 적당량의 술은 위를 자극하여 위액의 분비를 촉진시키는 작용을 한다. 따라서 가벼운 소화불량에 술을 마셔주면 상당한 효과를 볼 수가 있다. 술은 또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역할도 한다. 체내에 흡수된 알코올은 즉시 연소작용을 일으켜 칼로리로 되어 열을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추위로 팔다리가 뻣뻣해지고 한기를 느낄 때, 저혈압으로 인한 졸도 등에 술을 마시면 몸이 따뜻해져 추위를 덜 느끼고 굳었던 팔다리가 풀리는 효과를 볼 수 있는 것도 알코올의 순기능이다. 특히 “노인들의 경우는 술이 심장질환이나 뇌졸중을 줄여줌으로써 술이 생명을 건져주는 것으로 확인되었다.”는 학계 보고도 있다. 이 연구를 주도한 뉴질랜드의 제니 오코너 박사에 따르면, “음주의 혜택을 가장 많이 보는 사람은 조금씩 자주 술을 마시는 나이가 든 노인들”이라고 했다.

 

이러한 이유에선지 서양에서도 술을 일컬어 ‘생명의 물’ 이라고 불렀다. 13세기에 들어서 꼬냑이나, 위스키 같은 독한 술을 만들게 되었으며, 알코올의 뛰어난 살균능력 등을 빌어다 상처의 치료와 마취성 등을 이용할 줄 알게 되면서부터 사람들은 ‘생명의 물’ 이라고 이름하고, 어떤 병이라도 고치는 만병통치약으로 이용되기도 했던 것이다. 이렇듯 서양에서 술이 질병의 직접적인 치료 목적으로도 이용된 반면, 한국인의 의식에는 질병예방 목적이 우선이며, 늙으신 부모와 어른을 대접하는 자식이자 아랫사람, 또 배운 사람으로써 마땅히 행해야 할 최고의 도리(道理)와 예절, 정성이라는 인식을 마음바탕에 깔고 있었다는 것에서 동서양의 문화적 차이를 알 수 있다.

 

약주 상차림 모습.

 

 

술은 또 다른 이름으로 불려지기도 했다. 해석의 차이는 있겠지만, 답답하고 우울한 마음, 슬펐던 기억이나 긴장감을 해소시켜 주는 효과로서 ‘망우물(忘憂物)’이 그것이다. 알코올은 체내에 들어가면 중추신경의 기능을 억제하는데, 이 중추신경은 충동적 행동을 이성으로서 억제하는 부위로, 술이 들어가게 되면 중추신경이 마비되어 마음이 느슨해지고, 긴장감이 해소되어 기분이 좋아지면, 말이 많아지고 명랑한 상태의 도원경(桃源境)을 헤매는 무아(無我)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적당량의 술을 마시는 것은 정신건강을 돕는 약주의 개념이 성립된다.

 

문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술을 과음함으로써 갖가지 문제를 일으키는데 따른 말로, 우리나라에서는 ‘망주(亡酒, 忘酒)’, 서양에서는 ‘더러운 물’로도 인식했다. 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시면 우리 몸 각 기관에 해를 끼치는 것은 물론이고, 중추신경의 작용을 억제하여 판단을 흐리게 하여 여러 가지 실수를 하게 되고 남에게 피해를 끼치기도 하며, 종내는 건강을 해치고 재산을 탕진하여 가정을 파탄으로 이끄는 독약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들은 음주의 양이 많든 적든 간에 인체의 각 기관에 적잖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가능한 과음에 따른 건강문제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가양주에 가능한 감미가 남게 양조를 함으로써 음주량을 최소화 하도록 노력했다. 이와 더불어 탄수화물 중심의 고유 식생활에 따른 소화와 흡수를 돕는 차원의 반주문화를 가꿔온 데서 우리 민족의 뛰어난 양조문화의 진면목과 약주문화의 우수성을 엿볼 수 있다.

 

 

 

박록담
시인, 한국전통주연구소장, 숙대 전통문화예술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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